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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화 (132/142)

제132화

눈앞에서 나디아를 놓친 직후, 이지호는 곧장 추격대를 풀었다. 근처에 윈터펠 후작가의 병력이 숨어 있으리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숲속에서 대규모 인원이 지나간 흔적이 있습니다. 이미 저희 측 영역을 빠져나간 듯합니다.”

“더 이상의 추격은 불가능…… 할 것 같습니다.”

“…….”

그러나 빠른 대처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그리 좋지 못했다.

비보를 전하는 부관들의 말에 이지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러니까 놓쳤다는 말이군?”

“예…… 그런 듯합니다.”

“하!”

그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사실 그녀가 갑작스레 유순하게 굴 때부터 다른 꿍꿍이가 있으리라는 건 예상하긴 했다.

그럼에도 그녀의 요구를 들어준 것은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용이 등장할 줄이야……. 생각지도 못했다.

표정을 구긴 이지호를 향해, 그의 부관이 입을 열었다.

“무, 물론 예상지 못한 일이 일어나긴 했지만 지호 경이 세운 공이 없어지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고작 여자 한 명일 뿐입니다.”

“그 여자 한 명의 신분이 윈터펠 후작 부인이자 발라지트 공작 영애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그, 그건…….”

눈앞에서 놓쳐 버렸다. 제 손에 들어왔었는데, 한순간에 날개를 달고 사라져 버렸다.

마치 너 따위는 평생 나를 가질 수 없다는 듯이.

“…….”

아직도 그 순간이 망막에 새겨진 듯 생생했다. 평생을 가도 잊히지 않으리라.

“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조금 더 수색을…….”

“됐다. 지금쯤 무사히 도착하고도 남았을 테니.”

“예, 옙!”

내장이 꼬이는 듯 속이 쓰렸지만, 여기서 더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무의미한 짓이었다.

“우선 본래 일정대로 이동한다.”

이지호는 그리 명령을 내리곤 몸을 돌렸다.

일단 이동 후에 나디아를 되찾을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내전이 끝나지 않은 이상 기회는 남아 있다.

하지만 그의 계획은 초장부터 난관을 맞이하게 된다.

본래 목적지인 성에 도착한 직후, 먼저 이동하였던 에이든은 그를 맞이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야기는 이미 들었다. 내 사촌 누이를 놓쳤다지.”

“죄송합니다. 제 불찰입니다.”

“실수를 저질렀으니 그에 대해 처벌이 있어야 다들 납득할 수 있겠지. 당분간 경의 지휘권을 회수하겠다.”

“……예?”

이지호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포로 한 명을 놓치긴 했으나 그가 오래간만의 승리를 가져다주었다는 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지휘권을 회수한다니?

“……사촌 누이를 그리 애틋하게 생각하고 계셨을 줄은 미처 몰랐군요.”

“그럴 리가.”

에이든이 픽 웃으며 뒷말을 덧붙였다.

“그 애가 죽든 말든, 우리 집안을 배신했든 아니든, 내 알 바는 아니야. 고작 여자애 하나가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나?”

“그럼……?”

“하지만 우리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이 적측으로 넘어갔다면 얘기는 달라지지.”

그가 의아해하는 이지호의 귀에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나디아가 백부님이 위독하시다는 걸 알고 있다.”

“……!”

“이 사실이 윈터펠 후작과 그 참모들의 귀에 들어가는 건 시간문제야. 그들이 이 좋은 정보를 그냥 넘길 리가 없지.”

북부 귀족들이 바보들의 집단이 아닌 이상 말이다. 그렇기에 공작의 건강 문제를 쉬쉬하며 비밀에 부친 것 아니던가?

하지만 이지호에게도 반박할 말은 있었다.

“그전에, 어떻게 그 사실이 나디아 양의 귀에 들어간 겁니까? 일단 저는 비밀을 입 밖에 낸 적이 없습니다만…….”

“…….”

발라지트 공작의 건강 문제에 대해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고작해야 열댓 명 정도일 것이다.

그리고 그 열댓 명 중 나디아와 접촉한 이는 딱 세 명이었다. 자신과 라파예트 자작, 그리고 눈앞에 있는 에이든.

“제가 부주의했다는 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처벌보다 비밀이 새어 나간 경로를 알아내는 것이 먼저라고 봅니다.”

“그건 내가 알아서 조사하겠다. 경이 신경 쓸 일은 아닌 것 같군.”

그 순간, 이지호는 욕설을 내뱉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어야 했다.

‘역시 착각이 아니었어.’

악마 전쟁 이후, 그가 노골적으로 자신을 견제하고 있다는 느낌이 말이다.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나디아에게 비밀을 흘린 것은 바로 에이든 본인이리라. 본인의 실수를 제게 덮어씌워 무마하려는 것이다.

“자네에게 악감정이 있는 건 아니야. 하지만 이 정도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간 다들 불만을 가지겠지. 일시적인 조치일 테니 부디 내 입장을 고려해 주게.”

“…….”

에이든은 그리 말한 뒤, 곧장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

이지호는 그 자리에 선 채로 점점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기만 해야 했다.

할 말이 솟구쳤지만 에이든은 공작의 대리인이자 후계자다. 그와 대립각을 세워 봤자 좋을 게 없었다.

‘저 빌어먹을 놈이…….’

내부 분열을 일으킬 수는 없다. 일시적인 조치라 했으니 믿어 보는 수밖에.

이내 그 역시 한숨과 함께 자리를 떴다.

* * *

나디아는 후방으로 돌아가는 대신 글렌의 곁에 머물기로 했다. 제 옆이 가장 안전하다는 그의 강력한 주장이 먹혀든 덕분이었다.

그리하여 예상치 못하게 글렌과 동행하게 된 나디아는 현재―

“하아아…….”

무료함에 몸을 뒤트는 중이었다.

“으으음…….”

“불편한 점이라도 있으신가요, 마님?”

연이은 한숨 소리에 수를 놓던 하녀가 쪼르르 달려와 물었다.

“뭔가…… 이상해.”

“네?”

“할 일이 없어! 며칠째 그냥 놀고 있다고! 느낌이 이상해!”

“…….”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어색했다. 회귀한 이후 줄곧 숨 가쁘게 달려왔던 그녀다.

요양을 명분으로 글렌에게 모든 일감을 빼앗긴 이후, 줄곧 침대 위에서 빈둥대고 있으니 안달이 날 수밖에.

그때, 재빠르게 나디아의 무릎으로 올라온 노아가 몸을 부비적댔다.

“키르륵!”

마치 심심하면 자신과 놀자고 말하는 듯하다.

나디아가 생각했다.

‘아니, 얘는 대체…… 언제까지 말을 못 하는 척할 생각이지? 물론 이편이 더 귀엽긴 한데…….’

그래도 몹시 귀엽긴 하니까 머리를 쓰다듬어 주긴 했다.

나디아가 열심히 까만 비늘 위로 손을 놀리고 있을 때였다.

“마님, 지스카르 경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래? 어서 들어오라고 해.”

방문객의 등장을 알리는 목소리에 나디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마침 심심하던 차에 잘 되었다.

웬일로 찾아왔나 했더니, 지스카르의 용건은 그녀 앞으로 온 연락을 전해 주는 것이었다.

그가 서신을 내밀며 말했다.

“여기 아드리안의 편지입니다. 상처를 잘 회복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마님께 안부를 전하고 싶었나 봅니다.”

“편지를 쓸 수 있을 만큼 회복되었나 보네요. 다행이에요.”

그가 살아 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얼마나 안도했던지.

부상을 입은 채로 강물에 빠져 도망쳤다고 했다. 어두운 밤중이라 적군의 눈을 피할 수 있었던 게 천만다행이었다.

적진에 억류되어 있는 동안 그의 생사를 몰라 얼마나 걱정…….

‘어?’

그간의 기억을 떠올리던 나디아의 몸이 멈칫했다. 탈출에 모든 신경을 몰두했던 탓에 잊어버렸던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아, 맞아! 잊어먹고 말 안 한 게 있어요.”

“중요한 일입니까?”

“네, 테니어 성에 포로로 잡혀 있을 때 들은 내용인데…….”

나디아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아버지의, 그러니까 발라지트 공작의 건강이 몹시 안 좋은 것 같아요. 가볍게 넘어갈 병을 앓고 있는 건 아닌 게 분명해요.”

“저, 정말입니까?”

“네, 에이든의 입에서 나온 말이니 확실해요.”

“역시…….”

지스카르가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 반응이 묘하다. 그녀가 깜짝 놀라 물었다.

“설마 알고 있었어요?”

“그건 아닙니다. 다만 내전 도중임에도 그자가 너무 일선에서 물러나 있다는 느낌은 받았지요. 그래서 무언가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했는데 건강 문제일 줄이야……. 하필이면 이럴 때 큰 병을 앓다니 운이 나쁘군요.”

“지금까지의 악행이 다 되돌아오는 모양이죠.”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님. 덕분에 좀 더 과감한 작전도 시도해 볼 수 있겠습니다.”

“뭘요.”

손사래를 치던 나디아가 ‘아’ 하고 탄성을 토해냈다.

“그러고 보니 요즘 글렌은 뭘 하고 있나요?”

“영주님이요? 그야 평소와 같으십니다만…….”

“흐음…….”

남편의 근황을 전해 들은 나디아의 눈이 샐쭉 가늘어졌다.

평소와 다를 바가 없는데 나를 안 찾아오고 있다 이거지?

“한데 그것은 왜 궁금하십니까?”

“그런 일이 있어요. 조만간 찾아가 봐야겠네요.”

* * *

찾아오지 않으니 찾아가는 수밖에.

남편과 다시 만나기 위해 나디아는 아주 간단한 방법을 택했다.

바로 그가 지나칠 수밖에 없는 장소에 죽치고 앉아 있는 것.

‘자기 처소에는 돌아오겠지. 잠은 잘 것 아냐?’

예상했던 대로 해가 저물어갈 때쯤 저 멀리서 글렌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부관과 무어라 대화를 나누며 걸어오고 있었던 탓에, 그는 입구에 당도할 때까지 나디아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녀가 팔짱을 끼며 입을 열었다.

“글렌, 저랑 얘기 좀 해요.”

“나, 나디아?”

“그래, 저예요. 영주님을 잠시 빌려 가도 되겠지?”

마지막 말은 그의 곁에서 졸졸 따라오고 있던 부관에게 한 질문이었다.

마님의 질문이 떨어진 순간, 부관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예, 바쁜 일정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네요. 그럼 들어가 볼까요?”

“…….”

물러날 장소가 없었다. 그는 하릴없이 나디아의 뒤를 따라가야 했다.

휘장을 걷고 들어가니 주인의 성격답게 깔끔히 정리되어 있는 처소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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