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0화
“예.”
또다시 멈추라는 명령이 전달되자, 곳곳에서 의아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또? 멈춰선 지 얼마나 됐다고…….”
“아서라. 귀하신 공작 영애께서 함께 이동하시는 중이란다.”
“어휴, 왠지 출발할 때부터 불길하더라니.”
물론 그것들 중 단 한 문장도 나디아에게 가 닿지 못했지만 말이다.
마차에서 내려온 나디아는 병사들이 마련해 준 간이 의자에 앉아 바람을 쐬었다.
‘너무 열심히 연기했더니 정말 멀미가 나는 것 같아…….’
그래도 혼신의 연기를 펼친 보람이 있었다. 하루 일찍 출발한 것이 무색할 만큼 이동속도가 느렸던 것이다.
그때, 해의 위치를 살피는 나디아의 앞으로 물컵이 불쑥 나타났다.
“물입니다. 속이 좀 편해지실 겁니다.”
“고마워요, 지호 경.”
나디아는 물을 홀짝거리며 조용히 상황을 살폈다.
제 주변으로는 병사들이 깔려 있어, 도무지 빠져나갈 틈이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지척에는 이지호가 무장을 한 채 서 있다.
여기서 도주를 시도한다면 채 열 걸음을 옮기기도 전에 붙잡히리라.
결국 그녀는 그의 옷자락을 살짝 잡아당기며 입을 열어야 했다.
“저…… 죄송한데…….”
“편히 말씀하십시오.”
“시원한 물은…… 없겠죠?”
본인이 그리 말해 놓고도 염치없는 걸 안다는 듯, 나디아는 살짝 얼굴을 붉혔다.
“미, 미안해요. 속이 답답해서…… 찬물을 마시면 속이 좀 시원해질 것 같아서 그래요. 무리한 요구라는 건 알아요.”
“미안해하실 것 없습니다. 제가 더 신경 썼어야 했는데, 도리어 제가 더 죄송해야지요. 그런데…….”
그가 정말 난처하다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정말로 찬물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그냥 한번 꺼내 본 말이에요.”
괜찮다고 말했음에도 그는 여전히 신경 쓰인다는 얼굴이었다.
그때, 병사들 중 하나가 입을 열어 말했다.
“지호 경, 이 근처에 냇가가 있으니 그리로 가 보시겠습니까?”
“냇가가 있다고?”
“예, 말을 타고 조금만 걸어가면 나옵니다. 그리 먼 거리는 아닐 겁니다.”
“음…….”
이지호가 입을 다문 채 고민에 잠겼다.
이동 도중 일행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 자체가 위험한 일이긴 하다. 특히나 지금 같은 전시에는 말이다.
하지만…….
“잠시 다녀오면 안 될까요? 정 걱정되면 같이 가요.”
“…….”
제 옷깃을 잡아당기며 애원하는 눈빛 앞에서, 그는 항복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제가 호위하겠습니다.”
이지호는 먼저 그녀를 말 위에 올린 뒤, 그 자신도 같은 말에 올라탔다.
자연히 그의 품속에 갇히게 된 그녀가 마음속으로 불만을 터트렸다.
‘말을 타고 도망이라도 갈까 봐서 그러나?’
정답이다. 눈치가 빠른 것인지, 아니면 지나치게 철두철미한 것인지.
어쨌거나 그들은 빠르게 이동하여 근처에 있는 냇가까지 다다랐다.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잠시 휴식을 취하기엔 충분했다.
첨벙.
“와, 시원해요.”
나디아가 반쯤은 정말 감탄하며 말했다. 공기는 이렇게 후덥지근할진대 냇물만은 시원하다니, 몹시 놀라운 일이다.
“당신도 마셔 봐요.”
“저는 딱히…….”
“지금 안 마시면 후회할걸요.”
결국 그는 나디아의 강요를 이기지 못해 냇물을 뜨고 말았다. 두 사람이 물을 마시자, 함께 따라온 병사들도 쭈뼛쭈뼛 눈치를 보며 물을 마시기 시작한다.
이지호가 말했다.
“여기서 잠시 쉬었다 가시겠습니까? 이곳의 바람이 조금 더 시원한 느낌이군요.”
“허락해 주신다면 저야 환영이죠.”
나디아는 신발을 벗어 앉아 있는 바위 옆에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냇물에 발을 담그기 위함이었다.
잠시 후엔 치맛자락을 위로 올려 종아리를 물에 담그기까지 했다. 하얀 허벅지가 반쯤 드러난다.
“크흠, 흠.”
그러자 위에서 헛기침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나디아는 슬쩍 고개를 돌려 이지호의 위치를 확인했다.
그는 서 있는 그 자리에서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렸을 뿐, 여전히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젠장.’
나디아가 마음속으로 혀를 차며 해의 위치를 확인했다. 약속한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충분히 쉰 것 같으니 이만 돌아갈까요?”
“멀미는 괜찮아지셨습니까?”
“네, 더워서 그랬나 봐요. 열이 식으니까 좀 낫네요.”
“다행이군요.”
그리 말하는 이지호는 시선을 먼 곳으로 돌리고 있었다. 그가 나름대로 기사도를 지키는 사람이라 천만다행이다.
나디아는 앉아 있는 바위에서 일어나다가, 발이 미끄러진 척 냇물 위로 몸을 내팽개쳤다.
풍덩!
“꺄악!”
“나디아 양!”
그다지 깊지 않은 물가였던 데다, 이지호가 곧장 달려와 부축을 해 준 덕에 나디아는 금방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머리부터 발끝까지 홀딱 젖어 버린 것이 문제였다.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살짝 긁힌 곳은 있는 것 같지만 곧 낫겠죠, 뭐. 그보다는 젖은 게 더 문제인데요.”
“마차에 여벌 옷이 있을 겁니다. 어서 돌아가야…….”
그의 말소리가 어느 순간 뚝 멎었다.
옷이 흠뻑 젖은 채 몸 위로 달라붙어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체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
결국 그는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려야 했다.
봄철이라 다들 옷을 한 겹만 입은 상태였기에, 덮어 줄 망토 같은 것도 없었다.
나디아가 저와 시선을 마주치지도 못하는 지호를 향해 말했다.
“물이 너무 뚝뚝 떨어지는데…… 물을 좀 짜고 와도 괜찮을까요? 저 나무 뒤로 가서 짜고 올게요.”
“그러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는 여전히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린 채였다.
귓가까지 붉게 변한 모습이 나름대로 귀엽다면 귀여웠지만, 병사들에게 명령하는 목소리만큼은 위협적이었다.
“모두 눈 돌려.”
“예, 옙!”
왜 이런 부분에서만 기사도를 발휘하는지 알 길이 없었으나 나디아로서는 잘된 일이었다.
그녀는 품속에 숨겨 놓은 작은 나이프를 꺼냈다. 그러고는 나무 뒤로 가는 척 발걸음을 옮기다가, 말들이 쉬고 있는 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히히히힝!
나디아가 가장 튼튼해 보이는 말 위에 올라타자, 놀란 말들이 길게 울음소리를 냈다.
“나디아!”
상황을 알아차린 지호가 고개를 돌렸을 때는 이미 말들을 묶어 둔 고삐가 다 끊어진 후였다.
나디아는 말들을 걷어차 사방으로 흩어지게 만든 후, 들판 쪽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지호 경, 공작 영애께서……!”
“나도 안다.”
어쩐지 이상하게 유순히 굴더라니. 그가 눈을 가늘게 뜨며 혀를 찼다.
‘어리석은 짓을…….’
몸에 걸친 것이라곤 옷 한 겹뿐인 여자가 도주에 성공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가 휘파람을 불어 제 애마를 도로 불러들였을 때였다. 병사들 중 한 명이 멀어지는 나디아를 향해 활을 당기고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깜짝 놀라 목소리를 높여야 했다.
“쏘지 마라!”
“하, 하지만 이대로라면 놓칩니다! 말을 쏘겠습니다!”
“공작 영애의 몸에 부상이라도 생긴다면 네놈이 책임질 셈이냐? 내가 모셔오겠다.”
낙마하기라도 하면 부상은 둘째 치고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이지호는 애마 위에 올라타 곧장 그녀를 뒤쫓기 시작했다.
말을 불러들이느라 잠시 시작이 흘렀지만 나디아를 뒤쫓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녀가 들판 방향으로 뛰쳐나간 덕분이었다.
그 순간, 무언가 불길한 느낌이 등허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왜 엄폐물 하나 없는 곳으로 방향을 잡았지?’
그것조차 고려하지 못할 만큼 아둔한 사람은 아닐 텐데.
그는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계속 말을 몰았다. 거리는 점점 좁혀졌다.
“레이디 나디아! 거기 서십시오!”
“……!”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디아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제 쪽이 한참 먼저 출발했음에도 그는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공포에 젖은 그녀는 거의 악쓰듯이 외쳤다.
“오지 마요! 날 좋아한다면서! 그럼 나를 놔 줘요!”
“오늘 일에 대해 책임을 묻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멈추십시오!”
“날 데려가서 뭘 하고 싶은 건데요! 딱히 쓸모도 없잖아!”
“칫!”
그 뒤로 더 이상 멈추라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말로 경고하느니 손수 붙잡기 위해 스퍼트를 올리고 있다는 증거였으니까.
멀찍이서 들리던 말발굽 소리가 점차 가까워진다. 귓가에 울리는 말발굽 소리가 어느 쪽의 것인지 구분할 수도 없었다.
“……!”
슬쩍 뒤를 돌아보았을 때, 나디아는 하마터면 혀를 씹을 뻔했다.
그가 지척까지 따라붙어 있었던 것이다. 고개를 완전히 꺾지 않아도 그의 모습이 보일 정도였다.
이지호가 저를 향해 손을 뻗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그녀는 다시 정면을 바라보아야 했다.
‘잡힌다……!’
아니나 다를까 어깨를 낚아채는 손길이 느껴졌다. 그 순간 나디아는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순식간에 몸이 공중으로 붕 뜬다. 도저히 뿌리칠 수 없는 강력한 힘이 그녀를 공중으로 들어올렸다.
‘……공중으로?’
뭔가 이상한데?
의아함에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가 바라본 것은 제 발밑에 펼쳐져 있는 들판이었다.
“……!”
거센 바람이 뺨을 때린다. 옷자락과 머리카락이 미친 듯이 휘날렸다.
그제야 나디아는 자신이 허공에 떠 있다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허공을 나는 무언가에게 고정되어 함께 날고 있는 상태였다.
시선을 위로 돌리자 새카만 비늘이 보인다. 전에 본 적 없는 거대한 크기였지만, 그녀는 그것의 정체를 단번에 알아챘다.
“노아……!”
그러자가 노아가 화답하듯 ‘키륵’하고 울음소리를 토해 낸다.
나디아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서, 성공했어…….’
사실 반쯤은 도박이었다.
글렌이 제가 보낸 편지에 표시되어 있는 암호를 알아챌지 확신할 수 없었고, 제가 약속된 시간에 약속 장소에 다다를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아무튼 중요한 건 그녀의 계획이 성공했다는 것이다.
나디아가 제 상체를 붙들고 있는 노아의 발에 더욱 단단히 매달렸다.
아래에서 고함 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칼라드볼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