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9화 (129/142)

제129화

그로부터 얼마 후, 이지호는 나디아에게 좀 더 후방에 있는 성으로 이동하는 것이 어떠하냐고 제안했다. 말이 제안이지 사실상 통보나 다름없었다.

나디아는 ‘왜?’라고 묻는 대신 조용히 그 제안 속에 숨겨진 뜻을 읽어 냈다.

‘전선이 뒤로 밀렸나 보군.’

그건 머나먼 곳에 있는 글렌이 잘해 주고 있다는 뜻이다.

혹시나 자신이 사로잡힌 것 때문에 동요가 심할까 걱정했는데, 그럴 염려는 덜어 천만다행이었다.

그때쯤 그녀는 제 편지에 대한 그쪽의 반응이 어떠하냐고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당연하게도 제대로 된 답변은 없었지만 말이다.

“앞으로 이런 복잡한 일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마십시오. 저는 그저 당신이 앞으로 무얼 하며 살면 좋을지, 행복한 생각만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

그리 말하는 표정이 퍽 다정했다. 제 딴에는 나름의 친절을 베풀고 있다는 뜻이리라.

‘고작 그따위 말이나 하려고 내게…….’

하고픈 말이 목구멍까지 솟구치는 것 같았으나 참아야 할 때였다.

그리고 좀 더 시간이 흘러, 테니어 성을 떠나야 하는 날짜가 임박했다.

출발 이틀 전, 성내가 어수선하다는 걸 눈치채고 바깥으로 나간 그녀는 몹시 익숙한 얼굴을 발견하게 된다.

“에이든 오라버니?”

바로 사촌 오라비인 에이든이었다.

오래간만에 만난 그의 모습은 많이 변해 있었다. 눈 부근을 덮고 있는 안대부터가 그러했다.

“세상에, 눈이……!”

“다 네 남편 덕분이란다. 그자가 쏜 화살이 눈을 스쳤지.”

“…….”

“물론 네 탓을 하려는 건 아니니 겁먹지 마렴.”

에이든이 어깨를 으쓱이며 그리 말했다.

하지만 태연한 어조와 달리 그의 얼굴은 많이 해쓱해져 있었다.

온실 속 도련님이었던 그에게 직접 목도하는 최전방의 참상은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으리라.

나디아는 서둘러 화제를 돌려야 했다.

“테니어에는 어쩐 일로 오셨어요?”

“지호 경과 함께 합류하여 이동하기로 했거든. 잠깐 들린 거지. 너와 함께 출발할 거란다.”

“아하…….”

“그나저나 나디아, 정말 오래간만이다. 그동안 잘 지냈니?”

빈말로도 잘 지냈다고는 말할 수가 없었다. 나디아는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이런저런 일이 있긴 했지만 살아 있으니 됐죠, 뭐. 저도 이곳에서 오라버니를 만나서 기뻐요.”

“나 역시 기쁘단다.”

그리 말하는 것치곤 안색이 어둡다. 그가 그늘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최근 들어 좋지 않은 소식만 들려서 마음이 안 좋았는데…… 네가 작은 기쁨을 주는구나. 내 사촌 누이가 배신자가 아니라서 다행이야.”

“저야말로 다행이죠. 오라버니가 저를 믿어 주셔서요. 아버지가 절 의심하고 계시다는 걸 알았을 때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몰라요.”

“그래?”

“네, 지금은 지호 경이 중간에서 오해를 잘 풀어 준 모양이니 괜찮지만…….”

“글쎄, 그분은 아직도 널 신뢰하지 않고 계실걸. 한 번 품은 의심은 쉽게 거두는 분이 아닌 거 너도 잘 알잖니?”

“…….”

어쩐지, 무언가 이상하다 싶었다. 마음속에 품었던 의문 한 가지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네 존재를 용인한 건, 지호 경이 널 열성적으로 변호한 덕분이야. 기회가 있다면 꼭 감사를 표하렴.”

하지만 머릿속의 모든 의문이 모두 명쾌한 해답을 찾은 건 아니었다.

‘나를 여전히 의심하고 있는데도 수하의 입장을 봐서 내 존재를 용인한다고? 물론 악마족과의 전쟁 이후의 그가 영향력이 크긴 하지만 그 정도는 아닐 텐데…….’

사촌누이가 의아해하고 있는 걸 눈치챈 듯, 에이든이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납득이 안 되는 얼굴이구나.”

“아무래도 좀…… 그렇죠.”

“설령 네가 배신자라 한들, 큰일을 벌이지 못하도록 잘 감시하겠다는 조건을 내건 모양이야. 그 덕분에 네가 지금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거지.”

“하지만 지호 경은 가신들 중 한 명일뿐인데요. 물론 그 이름값이 대단하다는 건 알지만…… 아버지가 그자의 말에 큰 의미를 부여하실 줄은 몰랐어요.”

“백부님께서는 건강이 매우 안 좋으시다.”

“네?”

나디아의 눈이 커다래졌다.

걱정 때문이 아니라 깜짝 놀라서였다. 과거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정보이기 때문이다.

딸인 나디아조차 몰랐던 것을 보니 측근 중의 측근만 알고 있는 사실인 듯했다.

그렇다면 이제 와서 그걸 제게 알려 주는 저의가 무엇인가? 그녀의 눈빛에 살짝 경계심이 서렸다.

“지호 경의 부탁을 들어준 건 후사를 부탁해야 할 가신들의 인심을 사기 위함이겠지. 죽음을 대비해야 할 만큼 안 좋으신 거야.”

“…….”

“그러니 나디아, 자식 된 도리로서 건강이 안 좋은 아버지에게 심려를 끼치는 짓은 하지 말도록 해라. 카레인도 유배된 마당에 너까지 그러면 안 되지.”

에이든은 그리 말하며 나디아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무게가 느껴질 만큼 세게 눌렀다.

“내 말, 알아듣겠니?”

“……네.”

“다행이다.”

하나만 보이는 그의 눈이 초승달 모양으로 휘어졌다. 그러나 눈동자만큼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그건 이지호의 얼굴을 봐서 목숨은 살려 줄 테니, 허튼짓하지 말라는 경고였다.

‘이 사람도 나를 의심하고 있구나.’

하긴, 아버지가 제 후계자로 점찍은 사람이니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으리라.

나디아가 유순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절대 심려를 끼쳐 드리지 않을게요.”

“잘 생각했다. 그나저나 떠날 채비는 다 했니?”

“물론이죠. 사실 챙길 것도 없…….”

“당장 내일이 출발이니 오늘은 일찍 잠에 들도록 해. 며칠간은 야영을 해야 하거든.”

“내일? 출발이 내일이라고요?”

그녀의 목소리가 살짝 높아졌다.

“출발은 모레 아니었던가요? 지호 경이 그렇게 말하던데…….”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도착한 다음날 함께 출발하기로 했지. 그런데 내가 예정보다 하루 빨리 도착했잖니? 그 때문에 네 일정도 하루 당겨진 거지.”

“아아…….”

낭패다. 나디아는 표정을 일그러트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그렇게 된 거군요. 저는 또 상황이 더 악화되는 바람에 후퇴가 일러진 건 아닌지 걱정했지 뭐예요.”

“너무 걱정하지 마렴. 다들 제 몫을 다 해내고 있으니 너같이 연약한 아가씨까지 마음 쓰지 않아도 된다.”

“네…….”

에이든은 어린 사촌 누이의 어깨를 토닥여 준 뒤 자리를 떠났다.

홀로 남은 나디아는 생각했다.

‘저들이 날 살려 둔 건 혈육에 대한 정 때문이 아니야.’

그건 인정이 아니라 교만이었다. 나디아처럼 힘없는 어린 여자 하나쯤은 살려 두어도 아무것도 하지 못할 거라는 교만.

철저하게 감시하고 행동반경을 제한하면 얼마든지 통제할 수 있는 거라는 오만이다.

굳이 그녀를 죽임으로써 이지호의 반감을 사느니, 살려 두는 게 낫다는 판단을 세운 것이리라.

멀어져가는 사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디아는 굳게 결심했다.

그것이 오판이었음을 깨닫게 해 주겠다고.

* * *

온실 속 귀부인이 일행에 함께하게 되면 이동속도가 느려진다더니,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발라지트 공작 영애의 호위를 맡은 위병들은 서로 곤란한 눈빛을 교환해야 했다.

개중 한 명이 그녀에게 다가가 물었다.

“으으으…….”

“많이 안 좋으십니까?”

공작 영애는 마차의 창틀 위에 상체를 늘어트린 채 반쯤 죽어 가고 있는 중이었다. 괜찮으냐는 말을 하는 것조차 눈치가 보일 만큼 처참한 꼴이다.

나디아가 창백한 얼굴을 들어 대답했다.

“멀미가 좀…….”

“도로가 부서진 탓에 길이 고르지 못합니다. 부디 양해를…….”

“우읍!”

“레, 레이디!”

그녀가 헛구역질을 하자. 주변에 있던 병사들이 어찌할 줄 몰라 혼비백산하기 시작했다.

후방의 소란이 전열까지 가 닿은 것인지, 그때 이지호가 말을 탄 채 나타났다.

“무슨 일이냐? 자꾸 후열이 쳐지고 있는 것 같은데.”

“아, 그게…… 공작 영애께서 멀미가 심하신 듯합니다.”

“공작 영애께서?”

그가 미간을 좁히며 마차로 다가왔다. 위병들 뒤로 창틀 위에 엎드려 있는 나디아의 모습이 보인다.

“괜찮으십니까?”

“……빈말로도 괜찮다고는 못하겠네요.”

“멀미가 이렇게 심하실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돌아가더라도 고른 길을 선택할 것을요.”

“그럴 필요까진 없어요. 근데 조금만 쉬었다가 가면…… 안 될까요?”

그리 말하는 나디아의 눈가에는 눈물이 살짝 맺혀 있었다. 헛구역질을 하다 생리적으로 나온 눈물인 듯하다.

난처하게 나디아를 바라보던 그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해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계속 멈춰 섰더니 예상했던 것보다 속도가 훨씬 느리다.

얼마 전 휴식을 취했으면서도 또 멈추는 건 조금 무리…….

“안 되는 거예요?”

“…….”

“하긴, 일정이란 게 있을 테니 어쩔 수 없죠. 제가 좀 더 참아 볼게요.”

“…….”

나디아가 애써 웃으며 그리 말했다.

눈물까지 매달고 있는 사람 앞에서 어떻게 더는 지체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결국 그는 한숨과 함께 명령해야 했다.

“잠시 쉬었다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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