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8화
나디아는 잠시 말을 멈추곤 숨을 골랐다. 하지만 씨근덕거리는 숨소리는 쉽사리 안정되지 않았다.
노기를 삭히기 위해 심호흡을 하는 그녀 앞에서, 이지호가 다시 한번 용서를 빌었다.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나가세요. 내 눈앞에서 사라져 줘요.”
“…….”
그러자 그의 눈이 충격받은 듯 커다래진다.
마치 상처받았다고 주장하는 듯한 표정에 나디아는 다시 한번 헛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나가요.”
“…….”
무언가 더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거리는가 싶더니, 이지호는 입을 다문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눈물을 닦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럼 쉬십시오. 원하시는 것은 언제든 사용인들을 불러서 말씀만 하시면 됩니다.”
나디아는 멀어져 가는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이내 달칵,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난 후에야 그녀는 욕설을 내뱉을 수 있었다.
“미친 새끼.”
나디아는 그가 미웠다.
그리고 미운 만큼…… 그가 두려웠다.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상대가 두렵지 않을 리가.
‘당분간은 나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라도 해코지를 하진 않겠지. 하지만 그게 얼마나 갈지는 알 수 없어.’
제 잘못이라는 걸 알면서도 사죄가 번번이 거절당하면 화가 나는 것이 사람의 심리인 법이다.
계속해서 그를 거부한다면 현재와 같은 대우가 지속될지 가늠하기 힘들었다.
나디아가 치맛자락을 움켜쥐며 다짐했다.
‘그의 죄책감이 남아 있을 동안, 어떻게 해서든 탈출해야 해.’
* * *
탈출 방법을 고민하던 중 잠이 든 모양이었다. 눈을 뜨니 아침 햇살이 커튼 아래로 쏟아지고 있었다.
‘……젠장.’
나디아는 마음속으로 욕지거리를 씹어 삼키며 커튼을 젖혔다.
창밖 아래로 경비병들이 여기저기 배치된 것이 보인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력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는 자신이 저 경비 병력을 뚫는 것은 무리였다.
‘사실 경비를 뚫는 건 둘째 문제고, 하녀들부터 따돌리는 게 먼저지.’
이 방을 나서기만 하면 어딜 가든 하녀들이 줄줄 따라붙으니 말이다.
나디아가 초조하게 입술을 짓씹으며 설렁줄을 당겼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하녀 하나가 문틈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일어나셨어요, 아가씨?”
“성주님을 만나고 싶은데, 지금 집무실에 찾아가도 될까?”
“네? 지금은 시간이 너무 이른데…… 식사부터 하시고 가는 건 어떠세요?”
“그래, 그럼 그러도록 할게.”
나디아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더니, 마침 배가 고프던 차였다.
하녀가 식사를 준비하러 나간 사이, 홀로 남은 나디아가 생각을 정리했다.
‘자력으로 탈출하는 건 불가능해. 이용할 수 있는 건 최대한 이용해 보는 수밖에.’
지금 현재로서 그녀가 쥔 가장 큰 패는 바로 감정적 우위였다. 이지호가 제게 강한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
아침 식사를 마친 뒤 집무실로 향하는 길에서, 나디아는 매우 눈에 익은 얼굴을 보게 된다.
바로 아버지의 수족 중 하나인 라파예트 자작이었다.
“……!”
눈이 마주친 터라 못 본 척 할 수도 없었다. 그녀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인사했다.
“자작님, 오래간만이네요. 다시 봬서 반가워요.”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레이디 나디아. 공작 영애께서 되돌아오셨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이렇게 다시 뵈니 감회가 새롭군요.”
포로로 잡힌 게 아니라 되돌아왔다, 라…….
아무래도 이지호가 주변에 그리 둘러댄 듯했다.
‘그런데 제대로 먹혀들지는 않은 모양이군.’
라파예트 자작의 눈은 나디아를 향한 경계심과 적대감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아버지로부터 자신의 배신이 유력하다는 말을 전해 들은 것이리라.
“아버지는 잘 계신가요?”
“지금쯤 수도를 지키고 계시겠지요. 그분께서도 공작 영애가 되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으시면 기뻐하실 겁니다. 공작님을 뵈러 가실 겁니까?”
“상황이 안정되면 수도로 돌아가야지요. 마침 그것과 관련해서 성주…… 그러니까 지호 경과 이야기를 나누러 가는 길이었답니다.”
“아아, 제가 눈치도 없이 계속 붙잡아 둔 모양입니다. 어서 올라가시지요.”
그리 말하는 라파예트 자작의 눈에는 경계심이 지워지지 않았다.
이로 미루어 추측하건대, 첫째 공작 영애를 믿어선 안 된다는 게 가신들 사이에서 공공연한 인식인 듯했다.
나디아가 걸음을 옮기며 생각에 잠겼다.
‘지호 경, 대체 무슨 수로 나를 보호하고 있는 거지……?’
감시당하며 호송되지는 못할망정, 귀빈실에서 호사나 누리고 있다니.
이지호의 발언권이 그리 강력하단 말인가?
의아해하며 걸음을 옮기다 보니 어느새 집무실 앞에 다다라 있었다.
나디아는 노크와 동시에 문을 열었다.
“지호 경, 저 들어가요.”
달칵.
그러자 안에서 무언가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활짝 여니 급히 책상을 정리하고 있는 이지호의 모습이 보인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리로 걸어갔다.
“여긴 웬일로…….”
“이것저것 물어볼 게 있어서 왔어요. 방금 라파예트 자작을 만났는데…… 응? 이건 뭐예요?”
서류철 아래로 보이는 것은 수북하게 쌓여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편지 봉투였다.
그리고 그 사이로 익숙한 문양이 보였다. 바로 윈터펠의 것이다.
나디아가 무의식중에 그리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녀의 손이 편지에 닿기도 전, 누군가 그것을 거칠게 채갔다.
“……!”
편지를 가로채간 이는 당연하게도 이지호였다. 그녀가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글렌이 보낸 편지죠? 보여 줘요!”
“안 됩니다.”
손을 뻗어 다시 빼앗으려 했지만 불가항력이었다.
힘으로 빼앗는 건 절대 불가능할 테니 다른 방식을 쓰는 수밖에.
그녀가 울상을 지으며 애원했다.
“왜 못 보여 주는 거예요? 나에 대한 이야기일 것 아녜요? 읽게만 해 줘요. 네?”
“…….”
울먹거리는 표정 앞에서 그가 한순간 흠칫거린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
“나디아 양에 대한 내용은 아닙니다. 죄송하지만 못 보여 드리겠군요.”
“거짓말! 그럴 리가 없잖아요. 글렌이 포로 협상을 하자고 했나요?”
“글렌? 그자를 이름으로 부르시는 겁니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나디아가 까치발로 폴짝폴짝 뛰어가며 편지를 가로채려 했지만 무용한 노력이었다. 애초에 키 차이가 너무 났다.
“왜 못 보여 주겠다는 거…… 아!”
그의 손에서 내던져진 편지가 벽난로 속으로 직행했다. 종잇조각이 불타올라 재로 변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아…….”
나디아가 할 수 있는 일은 허망하게 벽난로 안을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무어라 원망의 말을 하기도 전에, 이지호가 그녀를 끌어당겨 의자에 착석시켰다.
“여하튼 마침 잘 오셨습니다. 해 주셔야 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
“뭐라고요?”
글렌의 편지를 홀라당 태워 버리고선 한다는 말이 ‘해 줘야 될 일이 있다’라고?
어처구니없어 하는 나디아 앞에 그가 편지지와 필기구를 내려놓았다.
“윈터펠 후작가 앞으로 자필 편지를 하나 써 주시지요.”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오는 길이 라파예트 자작을 마주치셨다니 얘기가 쉽겠군요. 그가 당신에게 어떤 태도를 보이던가요?”
“……겉으로는 웃고 있어도 탐탁지 않아 하는 것 같더군요.”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작님부터가 나디아 양을 배신자로 생각하고 있단 말입니다. 제가 변호해주는 것도 오래 못 갈 겁니다.”
“그래서 저더러 뭘 어쩌라는 건가요?”
“윈터펠 후작 앞으로 남부에 머물겠다는 편지를 쓰십시오.”
“뭐?”
“의심의 시선으로부터 당신을 보호하려면 이 정도 증거쯤은 필요합니다. 후작가로 돌아갈 생각이 없으며, 친정에 계속 머무를 거라고 뜻을 밝히세요. 그러니 그쪽의 도움은 필요 없다, 라고…….”
“…….”
나디아가 이를 악물며 그를 노려보았다.
“싫어요.”
“하아…….”
한숨을 내쉬고 있지만 그런 대답이 나올 줄 알았다는 기색이다. 이지호가 그녀를 타이르듯이 말을 이었다.
“그러시면 나디아 양을 변호하는 제 입장이 곤란해집니다. 공작님과 다른 가신들이 합심해서 신문을 주장한다면 정말 감옥에 갇히는 수가 생긴단 말입니다. 그래도 좋으십니까?”
“차라리 그게 낫죠. 당신은 내가 내 아버지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고 있으면서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내키지 않으셔도 그러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단 말입니다. 눈 가리고 아웅이라도 좋습니다. 그분께 설설 기는 시늉이라도 하십시오.”
“정 제 안전이 걱정되시거든 후작가로 절 돌려보내 줘요. 당신이 태운 그 편지, 글렌이 날 찾는 내용이었을 거 아녜요?”
“아닙니다.”
그가 딱 잘라 말했다.
“아이가 없으면 온전한 부부가 아니라는 것, 알고 계시잖습니까? 거기다 나디아 양은 그자가 증오하는 발라지트 공작의 딸입니다. 왜 윈터펠 후작이 당신을 찾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
그 말에 잠시 침묵하던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 글자씩 짓씹는 듯한 어조였다.
“글렌이…… 날 찾지 않을 거라고요?”
“예, 나디아 양에 대해 언급된 내용은 없었습니다. 그럴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뻔한 거짓말을 하는 그의 표정은 태연했다.
나디아가 그 뻔뻔한 얼굴을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았으나 헛된 수고였다.
그가 보인 행동은 나디아의 앞으로 종이와 필기구를 내미는 것뿐이었다.
“당신의 안전을 위해서입니다. 부디 이해해 주십시오.”
“…….”
“정말 어쩔 수 없습니다. 나디아 양께서도 배신자라는 이유로 죽고 싶은 것은 아닐 것 아닙니까?”
“그렇게 내 안위가 걱정되면 차라리 돌려보내 주지 그래요?”
“죄송합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왜요? 당신 말마따나 날 좋아해서?”
“……네, 그렇습니다.”
그녀는 다시 한번 실감했다. 이지호라는 인간은 시간을 거슬러 온 후에도 바뀌지 않았다.
입으로는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의사는 조금도 고려해 주지 않는다.
발라지트 공작과의 거래를 받아들인 것처럼, 사랑하는 이의 의견보다는 자신의 판단을 우선할 뿐이다.
그가 매섭게 자신을 노려보는 나디아의 손에 필기구를 쥐여 주며 말했다.
“우선 살아남으셔야지요. 그게 우선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