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7화
나디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제가 신문받을 거라고 생각했다.
왜 지스카르 경을 구하러 가는 군대에 동행하고 있었던 것이냐, 아버지를 배신했다는 것이 진실이냐, 등등…….
저쪽에서 의구심을 품을 만한 것이 셀 수도 없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 그녀의 몸에 손가락 하나 대는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시중을 들어주는 하녀들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그렇다고 마냥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욱 초조해지기만 했다.
바깥 상황은 어떻게 돌아가는지, 지금쯤 제가 붙잡혔다는 걸 글렌이 알고도 남았을 텐데 그는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그 누구 하나 말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참다못한 나디아가 먼저 입을 열어야 했다.
“이곳의 성주를 만나게 해 줘. 아니, 만나야 해.”
그녀는 기억을 뒤져 이 성의 주인이 칼리언 로하스라는 이름의 기사라는 걸 기억해 냈다.
안타깝게도 안면이 있던 사람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성주님이요? 음, 지금은 바쁘실 텐데…….”
“차 한잔 마실 시간도 못 내시진 않겠지. 한번 말씀드려 보렴.”
“일단은 알겠습니다. 말씀드려 볼게요.”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디아는 성주가 제 청을 들어줄지 확신하지 못했다.
윈터펠 후작 부인이자 발라지트 공작 영애인 사람을 포로로 잡아와서 얼굴 한 번 비추지 않다니.
이건 굳이 대면해서 골치 아픈 일 만들기 싫다는 의사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가 정말 자신의 거처를 찾아왔을 때, 나디아는 적잖이 놀라고 말았다.
그리고 성주의 정체가 제가 알던 사람이 아니라는 것에 한 번 더 놀라게 되었다.
“……지호 경?”
동시에 줄곧 의아하게 생각했던 의문점이 답을 찾아가는 것 같았다.
“테니어의 성주는 다른 사람이었을 텐데…….”
“로하스 경이라면 얼마 전 전사했습니다. 그의 아들이 너무 어린 탓에 제가 내전이 끝날 때까지만 임시로 성주 대리직을 맡게 되었지요.”
“아, 그랬군요.”
그러고 보니 그런 소식을 들었던 것 같기도 했다.
이내 그가 나디아의 맞은편에 착석했고, 하녀들은 차를 내준 뒤에 바깥으로 물러났다.
나디아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왜 지금까지 절 찾아오지 않으셨어요? 성주 대리가 지호 경이시라니 더 궁금하네요. 우리가 모르는 사이도 아니잖아요.”
“……이런저런 일로 바빴습니다. 일부러 피한 건 아닙니다.”
나디아의 눈이 의심스럽다는 듯 가늘어졌지만 그녀는 더 캐묻지 않기로 했다. 정말 궁금한 것은 따로 있었으니까.
“뭐…… 좋아요. 그건 그렇다 치죠.”
“그럼 이번에는 제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저를, 정확히는 테니어의 성주를 만나고 싶다는 청을 한 이유가 뭡니까? 미리 말씀드리지만 풀어 달라는 부탁은 안 받을 겁니다. 아무리 공작 영애의 부탁이라도 그건 못 들어줍니다.”
“가능성 없는 부탁은 할 생각 없어요. 협상 자체가 안 될 테니까. 궁금한 것이 하나 있어서 그래요.”
“궁금한 것?”
“네, 혹시 저를 잡아올 때 후작가의 주방장을 함께 데려왔나요? 본성에 있는 그를 납치하긴 꽤 힘들었을 텐데.”
“……?”
질문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잠시 그 의미를 헤아리던 그가 대답했다.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왜 그런 질문을 하시는지 저야말로 묻고 싶군요.”
“그럼 당신은 기억하는 건가요?”
“예?”
“나의 죽음과, 당신과의 파혼에 대해서요.”
“…….”
그의 표정이 한순간에 얼음처럼 굳는다. 긍정의 대답이나 다름없었다.
“기억하는 거군요.”
“어, 어떻게…….”
“발라지트 공작가의 사용인들은 단 한 번도 제 취향이나 의사를 물은 적이 없어요. 식사에 올라가는 음식뿐만 아니라, 옷, 장신구, 가구까지……. 모든 것이 아버지와 카레인에게 맞춰졌죠. 제가 북부로 향하기 전까지, 그 누구도 제 입맛을 묻지 않았어요.”
“…….”
“전생에서도 비슷했죠. 당신을 제외하면 제 의사를 물어본 사람이 없었거든요. 그러니 후작가의 주방장을 납치해 온 게 아니라면 당신이 지난 생을 기억하고 있다는 말 밖에는 더 되나요? 게다가 수도에서 나한테 이상한 말을 하기도 했잖아요.”
“…….”
그의 표정이 낭패감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나디아가 실소를 흘리며 말을 이었다.
“언제부터였어요?”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수도에 있을 때는 정말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기억하고 있으면서 일부러 떠본 것이 아니에요.”
“좋아요. 그건 믿을게요. 그럼 나를 포로로 붙잡아 왔으면서 방치하고만 있는 이유는? 응? 그건 어째서일까요?”
“…….”
이지호는 한참 동안 그녀의 시선을 마주치지 못했다. 이내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
나디아는 그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바짝 긴장하여 몸을 움츠리고 말았다.
털썩!
그러나 한껏 긴장한 것이 무색하게도, 그의 이어진 행동은 바닥 위에 무릎을 꿇는 것이었다.
“당신에게 용서를 빌고 싶어서 그랬습니다. 그런데 쉽사리 용기가 나지 않아서…… 다 제 잘못입니다.”
“……하.”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인 그의 모습에, 나디아는 그만 실소를 감출 수가 없었다.
“용서를 빈다는 말인즉 제게 잘못한 것이 있다는 뜻이네요. 그럼 카레인이 말한 게 전부 사실이었어요?”
“그 여자가 뭐라고 말했습니까?”
“내게 누명을 씌우고 자살로 위장해서 죽인 거요. 다 당신과 합의한 거라던데.”
“…….”
그가 할 말이 없다는 듯 다시 시선을 내리깐다.
그 반응을 보아하니 대답을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나디아가 조소하며 말을 이었다.
“사실 카레인이 말하기 전에도 반쯤은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당신이 나와 파혼하려 할지도 모른다고.”
그러자 이지호가 깜짝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놀란 얼굴을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설마 죽이기까지 할 줄은 몰랐지만 말이죠.”
“어, 어떻게…….”
“몸이 안 좋다는 핑계로 내 방문을 받아 주지도 않았잖아요. 한두 번이 아니었죠. 한순간에 태도가 바뀌었는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도 못할 리 있겠어요?”
“…….”
그가 할 말이 없다는 듯 입을 다문다. 대답은 한참 후에서야 흘러나왔다.
“왜 그랬는지는…… 묻지 않으십니까?”
“안 물어봐도 알 것 같아서요. 아버지가 나를 버리고 카레인과 약혼하면 부귀를 약속해주겠다고 했겠죠. 당신은 욕심 때문에 그 손을 덥썩 잡았을 테고. 당신 목적이 출세잖아. 아니에요?”
“……맞습니다. 다 제 욕심 때문입니다.”
나디아가 이쯤 돼서 뺨이라도 올려쳐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상상지도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지, 지금 우는 거예요? 왜 울어요?”
제 앞에 무릎 꿇은 이지호의 눈에서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나디아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모두 제 잘못입니다. 욕심에 눈이 멀어서 어리석은 선택을…….”
“아니, 이게 대체…… 일단 눈물부터 그치고 얘기해요.”
“제가 실수를 한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죽은 이후, 저는 진심으로 제 실수를 만회하고자 했습니다. 시간을 되돌려서라도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도록…….”
“뭐?”
나디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의 얼굴에 납득의 빛이 떠오른다.
시간을 되돌리는 일이 이유 없이 일어나진 않았을 테니, 누군가의 개입이 존재했으리라는 건 조금만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
적어도 나디아 본인은 그에 개입하지 않았다. 그러니 남은 정답은 이지호뿐이었다.
“시간을 되돌린다니, 만일 그런 방법이 없었다면 어쩌려고 했어요? 동화책 속에서나 나올 법한 얘기를…….”
“제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부터가 초자연적인 힘이 있다는 증거니까요.”
비현실적인 이야기지만 직접 겪은 입장에서 부인할 수도 없었다.
나디아는 짧은 신음과 함께 이마를 짚어야 했다.
“그렇다면 제게 전생의 기억을 준 것도 당신이겠군요. 한데 시간을 되돌린 건 당신인데 왜 먼저 기억을 찾은 건 제 쪽인가요?”
“……당신에게 선택권을 주고 싶었습니다. 제가 지독하게 증오스러울 테니, 원한다면 저와의 약혼을 거절하고 새로운 인생을 살아갔으면 해서…….”
그 말은 상당히 신빙성이 있었다. 나디아가 시간을 거슬러 왔다는 걸 처음 깨달은 날은 약혼 소식을 처음 전해 듣는 날이었으니까.
허나 그렇다고 해서 그의 말에 어폐가 없다는 건 아니었다.
“그럼 이제 와서 저를 붙잡아 온 이유는 뭔데요? 제가 새로운 인생을 살았으면 좋겠다면서요. 앞뒤가 안 맞잖아요.”
“그건…….”
검은 눈동자가 위태롭게 떨리고 있었다. 마음속에 든 말을 꺼낼지 말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눈물 젖은 눈으로 나디아를 올려다보며 고백했다.
“당신에게…… 용서받고 싶습니다. 그리고 다시 되돌아가고 싶습니다.”
“……뭘 되돌아간다는 거예요? 설마 제가 생각하는 뜻은 아니겠죠?”
“당신을 좋아합니다. 생각해 보면 첫 만남 때부터 반했던 것 같습니다.”
“…….”
나디아는 정말로, 완전하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되돌아가자고? 설마 둘 사이가 나쁘지 않았던 그때로? 배신 이전의 관계로 돌아가자는 것인가?
그 순간 그녀가 전 약혼자의 뺨을 때리지 않은 건, 자신이 포로 처지이며 제 생사여탈권이 그의 손에 달려 있다는 걸 간신히 상기한 덕분이었다.
그녀는 한참 동안 침묵해야 했다. 화를 삭일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지금 당신이 하는 말, 앞뒤가 하나도 안 맞는다고요. 제게 선택권을 주고 싶었으면 제가 알아서 살아가게 내버려 뒀어야죠. 전생에도 안 한 사랑 고백을 이제 와서 하는 이유가 뭔가요?”
“그러니까 그건…….”
“아, 막상 정말로 시간을 되돌리니 욕심이 나던가요?”
“…….”
“이전에는 과거로 되돌아가기만 하면 더 바랄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닥치니 마음이 바뀌었어요? 제가 살아 움직이고 있으니 더한 욕심이 샘솟던가요?”
“…….”
그러자 그는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침묵은 때로 많은 말을 전하기도 하는 법이다.
나디아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눈앞에 보이니 욕심이 생겼다, 라……. 그래, 그것이 사람이지.’
눈앞에 간절히 원했던 것이 놓여 있으면 탐하게 되는 것이 사람의 본능.
과거에 그가 주군이 내민 ‘대가’ 앞에서 잘못된 선택을 했던 것처럼 말이다.
‘한편으로는 참 일관적이라서 좋네.’
그리고 그건 이지호라는 인간이 시간을 거슬러 온 후에도 바뀌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