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6화
“……!”
나디아가 숨을 삼키며 번쩍 고개를 들었다.
불타는 마을을 배경으로, 검은 군마가 우뚝 서 있었다. 검은 망토와 갑주까지 더해져, 마치 지옥에서 올라온 사신 같은 모습이었다.
철벅.
이내 검은 군마가 피 웅덩이를 밟으며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지척까지 다가온 군마 위에서 기수가 내려온다.
활을 쏜 자가 투구를 벗으며 말했다.
“늦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젊은 여자는 죽이지 말라고 그렇게나 말했는데, 명령을 무시하는 자들이 꼭 있더군요.”
“…….”
드러난 얼굴은 나디아 역시 익히 아는 자의 것이었다. 위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얼굴이 새파래진다.
그러자 이지호가 놀라지 말라는 듯 부드럽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안심하십시오. 지금부터는 제가 보호해 드리겠습니다.”
* * *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구나. 실제로 노렸던 것은 지스카르 경이 아닌 나였어. 내 성격상 구원군의 출발을 직접 확인할 걸 알고 꾸민 일이야.’
하지만 뒤늦은 깨달음이었다. 나디아가 초조하게 입술을 짓씹으며 생각에 잠겼다.
포로를 이송하는 마차는 창문이 없어 바깥의 상황을 살피는 것이 불가능했다.
마차의 진동이나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단서 삼아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었다.
‘이제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나디아가 제 손목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쇠고랑도, 밧줄도 매여 있지 않은 자유로운 손목이었다.
아무리 저항할 무력이 없다 해도 구속 하나 하지 않다니. 일반적인 포로 대우는 아니다.
‘공작 영애라는 신분 때문인가……. 아니, 아버지는 이미 나를 신뢰하지 않는걸.’
오히려 괘씸죄를 적용해서 더욱 잔혹하게 처형했으면 처형했지, 딸이라고 봐줄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가 불투명한 미래에 대해 상상하며 입술만 짓씹고 있을 때였다.
바깥에서 소란이 일더니, 갑작스레 문이 열렸다.
덜컹.
“레이디 나디아, 도착했습니다.”
문을 연 이는 무장한 상태의 병사였다. 나디아가 몸을 움츠리며 경계하듯 바깥을 살펴보았다.
“여긴…….”
“테니어 성입니다. 내리시지요.”
그녀는 머뭇거리면서도 하릴없이 마차에서 내려와야 했다.
그러나 바깥으로 나온 뒤에도 손발을 구속한다거나 하는 억압적인 대우는 없었다.
그를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검은 옷을 차려입은 여자 몇 명이 나디아에게 다가왔다.
‘뭐, 하는 사람들이지?’
여자 간수? 고문 기술자? 나디아가 그녀들의 신분을 가늠하며 긴장하고 있을 때였다.
“공작 영애, 여기서부터는 저희들이 모시겠습니다. 긴 여정이었을 텐데, 우선 몸을 씻으시겠습니까?”
“…….”
아무래도 검은 옷의 정체는 하녀복이었던 모양이다.
조금도 예상치 못한 대사에 나디아는 잠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금방 정신을 차린 나디아가 대답했다. 적진 한복판에서 한가하게 목욕이나 할 만큼 간이 크진 않다.
“간단하게…… 몸을 닦을 물수건만…….”
“피곤하신가 보군요. 그럼 세숫물과 물수건만 올려 보내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
나디아는 생각했다. 아무리 봐도 이건 포로가 아닌 공작 영애를 대하는 태도라고.
‘대체 무슨 꿍꿍이지?’
윈터펠 성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을 데려온 것도 아니고, 그녀는 기사단장 지스카르를 구하러 가던 길에 붙잡혔다.
누가 봐도 윈터펠 가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있던 모양새였다.
그런데 이렇게 너그러운 대우라니.
마침내 거처에 도착했을 때, 그녀의 머릿속은 더욱 혼란스럽게 되었다.
“이곳입니다.”
“…….”
적군 포로를 가두기에는 너무 호화로운 침실이었던 것이다. 추측하건대 이 성에서 가장 좋은 방이 아닐까 싶다.
심지어 미리 그녀가 올 것을 전해 들었는지, 먼지 한 톨 없이 청소된 상태였다.
“그럼 쉬십시오. 사람을 부르실 때엔 침대 옆의 설렁줄을 당겨 주시면 됩니다. 참, 실내복은 협탁 위에 준비되어 있답니다.”
하녀들은 그리 말하고는 바깥으로 나갔다.
철컥.
등 뒤로 자물쇠가 잠기는 소리가 들린다. 문고리를 당겨보니 아니나 다를까 열리지 않았다.
‘문을 잠갔다는 건, 내가 단순히 되돌아온 공작 영애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는 뜻인데…….’
창문은 열려 있었지만 이곳은 4층이었다. 여기서 뛰어내렸다간 그녀의 몸은 수수깡처럼 부서지게 될 것이다.
나디아는 하릴없이 물수건으로 몸을 닦은 뒤, 침대에 몸을 기대야 했다.
‘이불보를 묶어서 아래로 내려갈까? 아냐. 무사히 내려간다 쳐도 성문은 어떻게 통과할 건데? 그 후에 이동은 어떻게 할 거고?’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 봤지만 그럴듯한 탈출 방법은 없었다.
무리하게 탈출을 시도하다가 들통 나는 날에는 정말 감옥에 갇히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디아가 무릎을 끌어안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아무리 고민해 봐도 마땅한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긴장이 조금 풀리자 수마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글렌이 걱정을…… 설마 나를 인질 삼는 건…… 민폐를 끼칠 수는 없…….’
필사적으로 졸음과 싸웠으나 사고가 조금씩 끊기는 건 막을 수 없었다.
테니어 성으로 오는 동안 잠깐씩 눈을 붙인 게 전부였다. 수마가 밀려오는 게 너무나 당연한 상황이었다.
‘자면 안…… 돼…….’
필사적인 저항이 무색하게도,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디아가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아침 햇살이 들어오고 있는 창가였다.
“…….”
짹짹짹.
아침이라는 걸 알려주듯 창밖에서 새들이 지저귀고 있다.
침대에서 일어난 나디아가 방 안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무기가 될 만한 것은 없었다. 창밖의 1층엔 위병들이 지키고 서 있었으며-
철컹.
“잠겼군.”
유일한 출구는 단단히 닫힌 채였다.
한숨을 내쉰 나디아가 다시 침대로 돌아왔을 때였다.
똑똑.
“아가씨, 깨어나셨습니까?”
“……!”
뒤를 돌아보는 순간 방문이 살짝 열렸다. 그 틈 사이로 어제 본 하녀와 눈이 마주친다.
“어머, 일찍 깨어나셨군요. 문고리가 움직이는 것 같아서 설마 했더니……. 필요하신 게 있다면 설렁줄을 당기시지 그러셨어요.”
“하, 하하.”
사용인들을 부르려 한 게 아니라 탈출을 시도해 본 거란다. 나디아가 머쓱한 웃음으로 속내를 감췄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식사를 준비해 올게요.”
“아니, 그럴 필요는…….”
“필요 없기는요. 어제 저녁에 도착한 이후로 계속 주무셨잖아요. 금방 올게요.”
그러더니 나디아가 뭐라 말할 새도 없이 문을 닫고 사라진다. 물론 그 와중에도 문을 잠가 두는 건 잊지 않았다.
다시 돌아온 그녀는 커다란 트레이와 함께한 채였다. 아침 식사에 그릇을 몇 개나 동원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녀가 음식 덮개를 치워 내자, 그 아래로 아주 먹음직스러운 식사가 드러났다.
일개 포로이자 배신자가 먹기에는 지나치게 호화스러운 식사다.
“…….”
일반적이지 않은 상황에는 필히 그 이유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떨리는 눈으로 아침 식사를 내려다보던 나디아가 겨우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하문하세요.”
“혹시 이거…… 최후의 만찬인가?”
“예?”
“사형 전날만큼은 사형수도 좋은 곳에서 재우고 좋은 음식을 먹이잖나. 설마 그런 의미는 아니겠지?”
그러자 이름 모를 하녀는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처럼 웃음을 터트렸다.
“크읍,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제가 맡은 명령은 공작 영애를 극진하게 모시라는 것뿐이었으니까요.”
“누가? 왜 그런 명령을 했지? 아버지도 내 소식을 알고 계신 건가? 설마 그분이 여기에 와 계신 건…….”
“죄송합니다. 그 이상의 질문에 답해 드리는 건 제 소관이 아닌지라……. 어서 식사를 하세요. 음식이 식겠어요.”
“…….”
그리 말하는 하녀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녀의 눈빛에서 나디아는 바깥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을 가능성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일단…… 배는 채우자. 탈출도 힘이 있어야 하는 거지.’
반나절을 내리 굶었더니 배가 아플 지경이다. 나디아가 한숨과 함께 수저를 집어 들었다.
그런데 식사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음?’
그녀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금방 눈치챘다.
* * *
들고 있는 물건을 놓칠 만큼 놀란다는 것이 어떤 감정인지, 글렌은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딱히 알고 싶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쨍그랑!
들고 있던 잔이 흙바닥 위로 떨어져 산산조각났다. 아버지가 의식 불명 상태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손에 힘이 풀리지는 않았건만.
일순간 눈앞이 깜깜해지는 기분이었다. 글렌이 겨우 목소리를 짜내다시피 하며 되물었다.
“나디아가 포로로 붙잡혀……?”
“지스카르 경을 도우러 가는 과정에 잠시 배를 정박하셨던 모양입니다. 그곳에 적이 매복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그녀의 생사를 알 수 없다는 말이냐?”
“남부군이 포로들을 처형했다는 소식은 없습니다만…… 포로 협상을 하겠다는 소식도 없습니다. 현재로서는 테니어 성에 구금되어 있지 않을까 합니다.”
“…….”
그는 저도 모르게 이마를 감싸 쥐고 말았다.
‘침착하게 생각해라. 나디아가 처형당했을 확률은 적어.’
그녀는 이름 높은 기사가 아니라 일개 귀부인일 뿐이다.
그 말인즉, 나디아를 처형한다 해도 사기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하다는 뜻이었다.
도리어 힘없는 귀부인을 대하는 태도에 기사도도 모른다는 비난만 받게 되리라.
‘이런 경우엔 지금쯤 포로 협상에 대한 제안이 와야 하는데…….’
적장의 부인을 붙잡은 셈이니 그 기회를 놓칠 리가 없다. 아무 전언도 없이 테니어 성으로 돌아갔다는 게 이해되지 않을 만큼.
‘설마 나디아가 윈터펠 후작 부인인 걸 알아보지 못한 건가? 아니면 그녀가 발라지트 공작 영애이기 때문에?’
글렌이 초조한 듯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테니어의 성주가 누구였지?”
“본래 로하스 경이었습니다만, 얼마 전 전사하여 발라지트 공작의 가신인 이지호 경이 성주 대리직을 맡았다고 들었습니다. 더불어 그자가 매복해 있던 병사들을 지휘한 장본인이라 합니다.”
“그렇다면 나디아의 신분을 알아보지 못했을 리는 없겠군.”
그는 나디아의 얼굴을 알고 있는 사람 중 하나이니 말이다.
아니, 어쩌면 다행일지도 모른다. 어찌 됐건 나디아는 공작의 딸 아닌가?
공작가의 가신이 그녀를 함부로 대하거나, 멋대로 처형할 수는 없다.
그 말인즉 제가 그녀를 구하러 가기 전까지 나디아는 무사할 확률이 높다는 뜻이었다.
생각을 끝마친 글렌이 말했다.
“일단 테니어 성으로 사신을 보내라. 포로 협상을 할 의향이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