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5화
“뭐? 성벽 바깥에 남부군이 나타났다고?”
“예, 발라지트 가문의 깃발이 있습니다.”
수하로부터 처음 그런 보고를 들었을 때, 지스카르가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황당함이었다. 놀라움이 아니라 황당함이다.
‘이 시기에 이곳을 왜……?’
믿어지지 않았던 나머지 그는 성벽 위로 올라가서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했다.
지평선 너머로 모래 먼지가 올라오고 있었다. 적군이 몰려오고 있는 증거였다.
그가 신음과 함께 중얼거렸다.
“정말이군.”
“정찰병에 의하면 발라지트 공작가의 깃발이 보였다고 합니다. 공작가의 군대라면 정예병일 텐데, 이런 시기에 왜 여기로 향한 것일까요? 이곳은 딱히 요충지도 아닌데…….”
“그렇기에 오히려 허를 찌르려 한 것일 수도 있지. 방비가 덜 되어 있을 테니 약한 곳을 치자는 생각이었을지도.”
사실 어느 정도는 옳은 판단이었다. 병력의 대부분이 빠져나간 상태였고, 농성을 대비해 비축한 식량의 양이 많지도 않았다.
지평선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지스카르에게, 부관이 물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일단 버틴다.”
“저, 정말이십니까?”
부관의 눈이 커다래졌다. 평소 호전적인 지스카르의 성정을 생각하면 뜻밖의 답변이었던 것이다.
“이만한 병력이 여기까지 왔다는 건, 다른 곳에서는 그만큼 병력이 빠졌다는 뜻이지.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물길로 보급을 받으며 오래도록 버틴다. 괜히 저들의 뜻대로 성문을 열고 나가 싸울 필요는 없겠지.”
“아아, 그런 의미이셨군요.”
“다만 가까운 아군 진영에서 물자와 병력을 조금 지원받는 것이 좋겠군. 가까운 곳으로 연락을 보내도록.”
그리하여 그날 밤, 어둠을 틈타 전령들이 성을 빠져나갔다.
* * *
로더데일이 포위되었다는 소식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나디아에게로 먼저 전해졌다.
다른 이도 아닌 지스카르가 위험에 처했다는 소식에, 나디아는 의자를 박치고 일어날 만큼 놀라고 말았다.
“지스카르 경이 도움을 청했다고? 그게 무슨 말이냐?”
“자세한 사정은 이것을 봐 주십시오.”
전령이 내민 것은 지스카르가 작성한 서신이었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러했다.
적군이 갑자기 나타나 성문을 포위했다. 나서서 싸우는 대신 농성하며 시간을 끌려 한다.
물길을 통해 물자를 보급받으려 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적이 강 상류에 군선을 띄워 감시하고 있다.
대부분의 병력이 빠져나간 로더데일의 힘만으로는 오래 버틸 수 없을 것 같으니, 원군과 식량을 보내 달라.
나디아가 침착하게 물었다.
“적군의 지휘관이 누군지는 알고 있나?”
“발라지트 공작의 기사인 아르파드 경이라 합니다.”
“그래? 그럼 그자는 아닌 모양이지.”
“예?”
나디아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전령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그녀가 손을 절레절레 흔들며 답했다.
“혼잣말이었다. 신경 쓰지 마라.”
“아, 넵.”
나디아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펼쳐진 지도로 향했다.
지스카르가 머물고 있는 로더데일 성은 그리 중요한 장소가 아니었다. 왜 이곳을 향해 대군을 이동시켰는지 의아할 만큼.
남부군이 이곳을 노릴 가능성은 낮다고 판단했는데, 아무래도 그 점을 역이용당한 모양이다.
‘차라리 잘됐어. 공작가의 병력을 이곳에 묶어 놓아야겠다.’
나디아가 아드리안 경을 불러 물었다.
“경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로더데일 성은 강을 끼고 있으니……. 보급을 받으며 오래 버티는 것만이 목적이라면 물길을 통하는 것이 좋겠지요. 육지보다는 포위를 뚫는 게 편할 테니까요. 음, 그러기 위해서는 기습을 하는 게 좋겠는데…….”
그들의 경계가 느슨해진 틈을 타 최단 거리로 신속하게 움직여야 한다.
아드리안의 눈이 지도를 살폈다.
몰래 숨어들기에 멀지 않은 곳에 있으면서도, 군선이 정박할 수 있는 항구가 있는 마을…….
아드리안의 손가락이 강가 한편을 가리켰다.
“이곳이 좋겠군요.”
“좋아요. 경의 말대로 이곳에서 출발하는 걸로 하죠. 다른 사람도 아닌 지스카르 경이 위기에 처했으니 반드시 성공해야 해요.”
아드리안이 그녀가 내리려던 명을 대신 말해 주었다.
나디아는 가신들에게 세세한 계획을 명한 뒤, 본인의 막사로 돌아왔다.
그녀가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생각했다.
‘설마 내가 움직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제 임무는 후방을 지키고, 필요한 물자를 제때에 보내 주는 거라고 생각했다.
긴장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다른 이도 아닌 지스카르 경이 위기에 처했다는데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할 수 있어.’
그녀의 목표는 성벽을 둘러싼 적군을 섬멸시키는 것이 아니다. 물자와 병력을 실은 선박이 안전하게 출발하는지 확인하는 것뿐.
그 뒤의 수전은 아드리안 경이 맡을 것이다.
그뿐인데도 왜 이렇게 긴장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디아가 침대에 걸터앉은 채 숨을 고르자, 하녀 아이딘이 가까이 다가왔다.
전령을 만나러 갔다가 돌아온 마님이 한껏 긴장한 기색을 보이자 덜컥 걱정이 됐던 것이다.
“마님, 괜찮으세요?”
“응?”
“전령이 전한 소식이 그리 좋지 않던가요? 서, 설마 패전이라든가…….”
“아냐. 그런 거.”
나디아가 불안해하는 하녀를 향해 손사래를 쳤다.
“그런데 잠시 어디를 다녀와야 할 것 같아. 넌 데려갈 수 없을 것 같으니 여기서 기다리렴.”
“네에? 마님은 계속 후방을 지키는 것 아니었어요? 대체 어디를…….”
“그건 비밀이란다.”
긴장감을 잊기 위해 그녀는 부러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여야 했다.
이틀 후, 나디아가 지원군과 함께 진지를 떠나갔다.
글렌의 서신이 도착한 것은 그녀가 떠난 직후의 일이었다.
* * *
어둠을 틈타 인부들이 물자를 선박 안으로 옮기고 있었다.
어디 하나 잘못된 점은 없는지, 나디아는 숨을 죽인 채 그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살펴보아야 했다.
잠시 후, 병사 하나가 다가와 그녀에게 속삭인다.
“후작 부인, 준비가 모두 끝났습니다.”
“수고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달이 어느새 높은 위치에 떠올라 있었다.
그때, 아드리안이 다가와 말했다.
“마님, 저는 달이 머리 꼭대기에 뜨면 출발할 생각입니다. 날이 깊었는데 이만 돌아가시지요. 여기서부터는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경이 출발하는 것까지만 확인하고 돌아갈게요. 그것까지는 제 두 눈으로 확인해야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정 그러시다면야 뭐…… 제가 말릴 수는 없겠지요.”
시간이 흐를수록 긴장이 차오르고 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나디아는 깊게 심호흡을 해야 했다.
부디 지스카르 경을 구할 수 있길.
시간은 한없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다가도, 쏜살같이 흐르는 것 같기도 했다. 순식간에 출발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후작 부인, 아드리안 경이 곧 출발합니다.”
배웅이라도 해 줄 생각에 그녀가 겉옷을 여미며 항구로 나섰다.
한밤중의 항구는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동을 위한 최소한의 등불만이 길을 밝히고 있을 뿐이었다.
나디아가 모든 준비를 마친 아드리안에게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잘해 낼 거라고 믿어요, 아드리안 경.”
“반드시 마님의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막 손을 맞잡고 악수를 나누려는 순간이었다.
피익!
등 뒤에서 바람 가르는 소리가 울리더니 빛나는 무언가가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저건……?’
나디아가 눈을 커다랗게 뜨며 그것의 정체를 알아내고자 했다. 그건 마치 도깨비불처럼 공중을 붕붕 떠다니고 있는 불꽃이었다.
허공을 가로지른 불꽃이 나디아가 올라타려던 선박에 박힌다. 그제야 그녀는 그것이 불화살임을 깨달았다.
“……!”
선득한 감각이 뒷목을 훑고 지나간다. 동시에 등 뒤에서 커다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와아아아아아!
“습격이다! 적의 습격이다!”
땡땡땡땡!
적군의 함성과 함께 종이 미친 듯이 울리기 시작했다.
아드리안이 나디아의 팔을 잡아끌며 말했다.
“마님! 피하셔야 합니다!”
“아, 알겠어요.”
상황이 정확히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한 가지 분명한 건 계획이 적에게 발각되었다는 점이었다.
나디아가 곧장 발걸음을 돌려 마구간으로 달려갔다. 말을 타고 달아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잠시 후, 어디선가 나타난 한 무리의 적군이 좁은 길목을 가로막았다.
“젠장.”
아드리안이 그녀의 팔을 놓아 주며 말했다.
“돌아서 가는 길은 아십니까?”
“네, 기억나요.”
“잘됐군요. 먼저 가십시오. 여기는 제가 막겠습니다.”
“…….”
나디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하지만 여기서 혼자 갈 수는 없다고 머뭇거리는 건 의미가 없으리라.
도리어 아드리안이 벌어 준 시간을 헛되이 낭비하는 행위였다.
“……나중에 봐요. 꼭이요.”
그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나디아는 발걸음을 돌렸다.
다행인 점은 마을의 뒷골목이 거미줄처럼 넓고 세세하게 퍼져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가 가는 길은 아직 적군이 들어차지 않았다.
채앵, 챙!
저 멀리서 쇠붙이가 부딪히는 소리, 비명 소리가 들려온다. 그녀는 구역질을 참으며 마구간으로 달음박질쳤다.
“허억…… 헉!”
마을에 불을 지른 듯 사방에서 매캐한 연기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뺨이 열기로 후끈했다. 숨을 쉬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콜록, 콜록!”
나디아가 기침을 하며 필사적으로 다리를 놀렸다.
마침내 목적지가 시야에 들어온다. 다행히도 그녀의 말은 마구간 안에 잘 매여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아악!”
누군가 머리카락을 잡아채는 느낌에 나디아는 휘청거리며 바닥 위로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간신히 고개를 들어 자신을 붙잡은 이의 정체를 확인했다. 그건 적군의 옷을 입은 병사였다.
“죽어!”
흥분하여 제정신이 아닌 듯한 적병이 나디아를 향해 창을 내질렀다. 아니, 내지르려고 했다.
가슴 사이로 화살촉이 고개를 내밀지만 않았어도 나디아는 창에 꿰였을 것이다.
“쿨럭.”
적병의 입에서 터져 나온 핏물이 그녀의 뺨에도 튀었다. 이내 그의 몸이 땅 위로 허물어진다.
나디아는 앉은 채로 뒷걸음치며 생각했다. 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사, 살았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적병의 등에 꽂힌 화살은 아군의 것이 아니었다.
검은 화살깃. 그건 남부군의 표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