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4화
산발이 된 머리칼과 더러워진 얼굴, 너덜너덜한 의복.
약 한 달 전, 자신만만해하며 병력을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던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에이든 앞에서 제 패배가 어쩔 수 없는 일임을 토로하던 그는, 다가오는 이지호를 발견하곤 표정을 굳혔다.
하지만 못 본 척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백작은 떨떠름하게 인사해야 했다.
“오…… 래간만이오, 지호 경.”
“그러게 말입니다. 자신하던 것에 비해 오래 걸리셨군요.”
패장에게 말이 곱게 나갈 리가.
비아냥거림이 어조에 묻어 나오자 백작의 눈초리가 치켜 올라갔다.
“지, 지금 내가 경의 말을 무시하더니 이 꼴이 되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거요?”
어떻게 알았지?
멍청한 놈이 눈치는 빠르구나 싶었다. 이지호가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백작이 버럭 고함을 지른다.
“이, 이번 대패에는 경의 책임도 있소! 경이 저번 회의에서 제안한 방법을 따랐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단 말이오! 어떻게 눈치챘는지 그놈들이 이미 방비를……!”
그 말에 지호는 그만 실소를 흘리고 말았다.
저번 회의에서 말했던 방법이라면, 기존의 장창보다 더 긴 장창을 만들어 적군의 기병 부대를 상대하라고 조언했던 것이리라.
‘내 조언 없이도 이길 수 있다고 큰소리치더니, 결국엔 따랐군.’
그 치졸함은 익히 알고 있던 것이기에 놀랍지도 않았다.
그리고 모든 기억을 되찾은 지금에 와선, 적군이 이쪽의 수를 미리 읽었다는 것 역시도 놀랍지 않다.
‘그녀는 나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으니까.’
나디아는 제 속을 읽고 있다. 그녀가 남편인 윈터펠 후작에게 조언을 한 것이겠지.
“그러니까 지금 패배의 책임이 제게 있다는 말씀입니까?”
“전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있다는 뜻이오!”
“제 조언 같은 것은 필요 없다더니 무슨 바람이 불은 겁니까? 소신을 지키셨다면 패배할 일도 없으셨을 텐데요.”
“지, 지금 그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잖소!”
이지호는 꽥꽥거리는 고함 소리를 무시하며 에이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대화는 말이 통하는 상대와 해야 하는 법이다.
“포르투나 백작님이 소싯적에 대단한 지휘관이었다는 건 압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과거의 일, 이번 패배에 대한 책임을 물어…….”
“에이든 경! 들을 필요 없습니다! 지호 경의 말을 따랐다가 오늘날 대패하게 된 것 아닙니까?”
이지호가 살짝 눈을 감았다가 떴다. 주먹을 날리고픈 충동을 제어하기 위함이었다.
한편, 두 사람 사이에 끼인 에이든은 몹시 난처한 얼굴이었다. 두 사람 모두 아군이라는 게 제일 문제였다.
“하아…….”
에이든의 입에서 짧은 한숨이 흘러나온다.
어느 쪽이 억지를 부리고 있는지는 명백했지만, 그로서는 포르투나 백작에게 면박을 줄 수가 없었다.
에이든은 지금 몸이 아픈 백부를 대신하여 남부 귀족들을 통솔하고 있는 입장이다.
그리고 포르투나 백작은 남부 대평원에 대대로 자리 잡은 영주로, 아군의 원로격에 해당되는 인물이었다.
여기서 새파랗게 젊은 이지호의 손을 들어 준다면 백작이 앙심을 품을 게 불 보듯 뻔한 일.
그로서는 아군 사이에 감정적 균열이 일어나는 선택지를 고를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이자는 위험해.’
에이든의 시선이 이지호에게로 가 닿았다.
겉으로는 과묵하고 충성스러운 기사를 연기하고 있기에 그의 본모습을 아는 건 아마 자신뿐이리라.
지금은 발라지트 가문의 충실한 가신 노릇을 하고 있다지만 언제 태도를 바꾸어 이쪽으로 검을 겨눌지 모르는 일이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일단은 이용하되, 더 이상 입지가 커지는 건 막는다.’
그리 판단한 에이든이 이지호에게 눈짓을 했다. 마치 네 쪽의 이해심이 더 크니 한 번만 참아 달라는 듯.
“에이든 경……!”
울컥한 이지호가 무어라 반박하려 했지만 에이든의 시선은 이미 포르투나 백작 쪽으로 돌아간 후였다.
“공의 뜻은 알겠으니 이만 돌아가서 쉬시오. 잔병을 수습하느라 수고가 많았소.”
“한 번만, 다시 한번 더 기회를 주신다면 이번의 패배를 만회해 보이겠습니다.”
이건 못 이긴다고 호들갑을 떨 때는 언제고, 그새 말을 바꾸는지.
무능한 아군은 유능한 적군보다 더 위험한 법이다.
에이든과 함께 사라지는 백작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지호가 거칠게 혀를 찼다.
“쯧.”
그리고 그는 손짓으로 부관을 불렀다. 부관이 뛰다시피 걸어와 그의 옆에 선다.
“명하실 일이 있습니까?”
“공작님께 연락을 할 일이 있다. 매우 신속해야 한다.”
* * *
나무 상자 안에 시퍼렇게 눈을 뜬 머리가 들어 있다. 바로 오늘 새벽까지 전투를 벌였던 포르투나 백작의 것이었다.
글렌은 덤덤하게 상자 안을 바라보다가 뚜껑을 닫으며 명했다.
“시신은 잘 수습해 뒀다가, 요청이 있으면 돌려주도록 해라.”
“예.”
위병이 허리를 꾸벅 숙인 뒤, 상자를 들고 나선다.
글렌은 간이침대 위에 걸터앉으며 생각했다.
‘이걸로 3연승인가…….’
연이은 승리의 요인은 윈터펠이 전쟁을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이리라.
그는 마치 머지않은 미래에 내전이 일어날 것을 내다본 사람처럼 힘을 키웠던 사람을 떠올려냈다. 바로 나디아였다.
만일 그녀가 북부로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오늘날처럼 손쉬운 승리가 가능했을까?
‘절대 아니겠지.’
그리 생각하면 그녀가 자신을 선택해 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는 지금쯤 후방에 있을 나디아의 모습을 그리고 있을 때였다.
“후작님, 마님에게서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뜬금없이 들려온 소식에 글렌은 제가 그리움에 사무쳐 환청이라도 들은 줄 알았다.
그것이 환청이 아님을 깨달은 건, 전령이 입구의 휘장을 걷고 안으로 들어왔을 때였다.
“후작님, 마님의 서신입니다.”
“나디아가?”
정말 그녀가 편지를 보냈다고? 그는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켜야 했다.
“설마 후방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잘 모르겠습니다. 다른 말씀은 없으셨습니다.”
보고 싶었던 이에게서 편지가 도착했음에도 그는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이런 시기에 시답잖게 안부나 물으려고 전령을 오가게 만들지는 않았으리라.
글렌이 조금 긴장하며 봉투를 뜯었을 때였다.
“……?”
안에서 익숙한 비취 목걸이가 하나 흘러내린다.
그는 그것의 정체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바로 자신이 드워프에게 의뢰하여 만든 목걸이였으니 말이다.
‘이걸 왜…….’
봉투 안에 든 것은 목걸이뿐만이 아니었다. 짧은 편지가 함께 동봉되어 있었다.
비취가 당신의 마음을 몰라 준다고 서운해하지 마세요.
무사히 돌아오는 날, 기꺼이 응할 테니.
그 뜻을 가늠하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아니, 직감적으로 떠올린 의미가 있긴 하지만 믿어지지 않았다. 본인에게서 직접 듣지 않고서야 믿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글렌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것…… 정말 나디아가 직접 쓴 것이냐?”
“예, 제가 직접 후작 부인에게서 전해 받은 것입니다. 문제가 있습니까?”
“아니, 됐다. 그만 나가 봐라.”
“아아, 넵.”
전령이 군말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홀로 남은 막사 안에서 그는 몇 번이고 다시 서신을 훑어봐야 했다. 특히 두 번째 문장을 말이다.
이건 마치…… 편지를 받는 이의 마음에 응하겠다는 뜻 같지 않은가?
믿기지 않아 몇 번을 다시 살펴보아도 나디아의 필체가 맞았다.
흥분과 설렘이 가라앉지 않아 그는 막사 안을 빙글빙글 돌아야 했다.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가, 책상을 짚었다가, 입구까지 걸어 나갔다가, 다시 침대로 돌아오는 것을 반복했다.
사정을 모르는 이가 보았다면 정신이 나갔다며 오해할 만한 장면이었다.
아니, 어쩌면 정말 정신이 나갔을지도 모른다. 만사를 제쳐두고 그녀에게 달려가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을 보면 말이다.
지금 당장이라도 나디아에게 돌아가서 이 편지의 뜻을 물어보고 싶다. 그녀와 자신의 마음이 같은지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실낱같이 남은 이성과 총사령관으로서의 책임감이 그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글렌이 도무지 가라앉지 않는 가슴을 붙든 채 호흡을 고르고 있을 때였다.
“영주님. 휴식 중에 죄송합니다만, 잠시 시간되시겠습니까?”
막사 바깥에서 들린 목소리는 부기사단장인 요한의 것이었다.
그가 어지간한 일로 휴식을 방해할 리 없다는 걸 알기에 글렌은 곧장 출입을 허락했다.
일단 눈앞의 적을 정리해야 나디아에게 돌아갈 수 있을 것 아닌가?
“무슨 일이냐?”
“다름이 아니라 포르투나 백작의 군대에 심어 놓았던 첩자가 돌아와서 말입니다.”
요한이 그리 말하며 글렌 앞으로 다가섰다.
“말해 봐라.”
“죽은 포르투나 백작의 빈자리를 대신할 이는 후작님께서도 잘 아시는 인물이 될 것 같습니다. 사실상 이지호 경으로 내정되었다고 하더군요.”
“놀라울 것 없는 인사군. 사실 여태껏 그가 전면에 나서지 않은 게 이상하지.”
“이방인이라는 출신이 발목을 잡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남부 귀족들은 우리보다 훨씬 보수적인 면이 있으니 말입니다.”
“흐음.”
글렌이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과묵하고, 그래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통 알 수 없는 자…….’
한 가지 확실한 게 있다면 그가 나디아에게 흑심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느낌이 좋지 않다. 그리고 전장에서 육감은 때때로 큰 위기를 피하는 데에 도움을 주기 마련이다.
‘일단 나디아에게 경고를 해 두는 게 좋겠군.’
결정을 내린 글렌이 서랍 안에서 종이와 깃펜을 꺼내 들었다.
그날 저녁, 그의 서신을 품은 전령이 북쪽을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