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3화
나디아의 침묵을 다른 의미로 해석한 듯, 파비안의 눈빛이 세상 안쓰럽다는 듯 변했다.
“세상에…… 상심이 크신가 봅니다. 하긴, 정인과 함께하는 시간은 아무리 길어도 짧게 느껴지는 법이죠.”
아니야. 아냐. 그거 아니라고!
나디아의 마음 속 목소리가 그리 외쳤지만 안타깝게도 그에겐 가 닿지 못했다.
‘일시적인 현상일 뿐,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멀쩡해질걸. 별것 아니야.’
늘 함께하던 동료가 옆에서 사라졌다는 상실감. 거기에 더해 부상을 입진 않을까 하는 걱정이 더해져 더욱 우울하게 느껴지는 것뿐이다.
일에 치여 바쁘게 생활하면 조만간 잊힐 감정이었다.
그리 판단 내린 나디아가 발걸음을 돌리며 말했다.
“아, 아무튼 어서 들어가요. 찬바람을 맞으니까 더 울적해지는 것 같네.”
“네, 마님.”
그러나 하루, 이틀, 사흘…….
마침내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흐른 후에도 허한 감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 * *
“마님, 소시지를 만들었어요. 한번 맛보실래요?”
“마님, 동절기용 의복을 만들 옷감이 도착했는데 직접 확인해 보시는 게…….”
최전방 어딘가에는 한창 전투가 벌어지고 있겠지만, 직접 보지 않는 이상에야 현실감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전선을 지원하는 후방의 상황은 오늘도 평화롭기만 했다.
사용인들이 저장 식품을 만들기 위해 바쁘게 뛰어다녔고, 기술자들은 작업장 바깥으로 얼굴을 비출 줄 몰랐다.
그들을 관리하는 것은 나디아가 줄곧 해 왔던 일이었다.
즉, 그녀의 일상에는 변함이 없었다. 다만 바뀐 것은 나디아 본인이라는 뜻이다.
“…….”
“저…… 마님?”
“…….”
“마님? 후작 부인?”
아무리 불러도 마님에게선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저 턱을 괸 채 멍하게 지평선을 바라보고 있을 뿐.
급기야 하녀들이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나는 소시지를 옆에서 흔들어 댔지만 그럼에도 요지부동이었다.
하녀들이 눈짓으로 대화했다.
‘며칠 전부터 계속 저러시는데? 정말 어디 아프신 것 아냐?’
‘그러게. 정말 의원을 불러와야 하는 건지…….’
그런데 그때였다.
“후작 부인, 영주님에게서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막사 입구에서 들린 소리에 하녀들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곳엔 팔뚝에 푸른 깃발을 맨 전령이 서 있었다.
하녀들이 마님에게 전령의 도착을 알리기 위해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마님, 영주님께서…… 응? 어디 가셨지?”
마님이 앉아 있던 자리는 텅 빈 채였다.
의아해하며 주위를 둘러보자, 그녀들은 금방 마님의 행방을 찾을 수 있었다.
나디아는 전령에게서 직접 서신을 받아 들고 있는 중이었다.
“글렌이 직접 쓴 편지라고?”
“네, 마님이 걱정하고 계실지도 모른다고, 직접 안부를 전하셨습니다.”
“수고했다.”
나디아는 편히 편지를 읽기 위해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런데 막 밀봉을 뜯으려는 순간이었다. 주변에서 이상한 시선이 느껴진다.
“……다들 왜 그러니?”
“…….”
자신을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이 울먹해져 있었다. 마치 딱한 것을 보는 듯한 눈빛이다.
아니, 그보다.
“너희 언제부터 여기에 와 있었니?”
“아까 전부터요. 주방에서 소시지를 만들었다고 해서 가져왔는데…….”
“……소시지? 언제?”
“여기요.”
하녀들이 탁자 위에 올려놓았던 접시를 내밀었다. 노릇하게 구워진 소시지 하나가 번드르르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
그제야 막사 안에 가득 찬 냄새가 코에 들어온다. 왜 저걸 이제야 눈치챈 걸까?
눈앞에 증거가 있으니 더 할 말이 있을 리 없었다. 나디아는 머쓱한 얼굴로 화제를 돌려야 했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정신을 빼놨나 보네. 아, 일단 글렌의 편지부터 읽어 봐야지.”
그러자 하녀들이 기다렸다는 듯 레터 오프너를 건네준다.
나디아는 막사 한구석에 앉아 편지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대부분 급보를 통해 이미 전해 들은 내용이지만 글렌의 시각으로 서술하는 이야기는 아주 새로웠다.
첫 승리를 거뒀을 때의 기쁨이라거나, 제 통제를 잘 따라 주고 있는 북부 봉신들에 대한 고마움이라거나.
하루빨리 이 내전을 끝내겠다는 다짐이라거나, 너무 쉽게 이기고 있는 것에 대한 의아함이라거나.
편지를 모두 읽은 나디아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마님이 미소를 짓자, 곁에서 지켜보던 하녀들이 달려들어 물었다.
“뭐라고 하셨어요? 네?”
“첫 번째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대. 그리고 이 모든 게 내 덕분이라네.”
편지를 읽어 내려가는 나디아의 얼굴은 조금 전과는 달리 생기로 빛나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다 죽어 가던 것과는 퍽 대조적이다.
그 차이를 못 알아챌 리 없는 하녀들이 웃으며 말했다.
“기분이 좀 나아지셨나요, 마님?”
“응, 확실히 그러네.”
“영주님의 편지 하나에 표정이 달라지셨어요. 마님은 영주님을 정말 좋아하시는군요.”
“그건…….”
곧장 그렇지 않다고 부정하려던 나디아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그만뒀다.
더 이상 부정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낯선 감정이라는 이유로 계속 외면하는 것은 옳지 않다.
생각해 보라. 그가 자신을 지켜 주겠다고 했을 때, 심장이 얼마나 세게 뛰던지 아직도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또 헤어져야 했을 때, 우울한 기분을 내색하지 않으려 얼마나 애썼는지도.
최전방의 소식이 한동안 전해지지 않았을 때, 얼마나 안절부절못하며 밤잠을 못 이뤘는지도.
첫 승전을 알리는 전서구가 날아왔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도.
“…….”
그 순간 나디아는 마침내 깨달았다.
‘내가 그를 좋아하는 거구나. 어쩌면 꽤 오래전부터.’
가랑비에 옷이 젖어들듯이, 아주 천천히.
너무나 조금씩 스며들었기에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언젠가 윈터펠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울적했던 이유는, 비단 주변인들에게 정이 들어 버렸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윈터펠을, 더 정확히는 글렌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았기에.
이제야 알겠다. 비로소 알게 되었다. 감정의 안개 속에 감춰져 있던 수수께끼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나디아는 그만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한동안 침묵하더니 혼자 웃음을 터트리는 마님을, 하녀들은 매우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아야 했다.
“마님, 어디 편찮으신가요……?”
“리사, 펜과 편지지를 가져다주렴.”
“예? 아, 넵. 알겠습니다.”
왜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는지 그 이유를 듣진 못했으나, 일단은 명령을 따르는 것이 우선이었다.
“영주님께 답신을 쓰시게요?”
“그래.”
나디아는 받침대 위에 종이를 올려놓고 간단한 문장을 휘갈겼다. 그러고는 제 목에 감겨 있던 목걸이를 끌러, 편지 봉투 안에 넣어 봉했다.
“리사, 실링 왁스도 가져와야지.”
“어머, 벌써 다 쓰신 거예요? 잠깐만요.”
장문의 답신을 쓸 거라고 예상했지, 설마 두어 문장만에 끝날 줄이야.
여유롭게 기다리고 있었던 리사는 황급히 서랍을 뒤져야 했다.
그녀가 실링 왁스를 가져가며 생각했다.
‘하긴, 원래 굳건한 신뢰가 있는 연인들 사이에는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은 법이지.’
“여기 있습니다, 마님.”
이내 편지 봉투가 봉해진다.
나디아가 바깥에 서 있던 전령을 불러들이며 웃었다.
글렌이 이 편지를 읽고 무슨 반응을 보일지, 직접 보지 못하는 것만이 아쉬웠다.
* * *
같은 시각.
헤라 강 아래의 테니어 성.
최소 수비 병력만 남은 성은 고즈넉하기 그지없었다. 노을만이 성벽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쨍그랑!
그 탓에 유리잔이 깨어지는 소리가 더욱 잘 울릴 수 있었다.
복도까지 새어 나온 소음에 사용인들이 의아해하며 방 안을 들여다보았다.
“괜찮으십니까, 지호 경?”
환청을 들은 건 아닌 모양인지, 돌바닥 위에 유리 잔의 잔해가 흩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무릎 꿇은 사내가 하나.
괴로운 듯 이마를 움켜쥔 채, 간신히 책상을 짚고 있는 이는 성주를 대신하여 성의 방어를 책임진 기사, 지호 경이었다.
“으으…….”
고개를 푹 숙인 그에게선 괴로운 듯한 신음이 연신 흘러나오고 있었다.
시종이 깜짝 놀라 다가갔다.
“모, 몸이 안 좋으신지요? 의원을 불러올까요?”
“아, 윽…….”
그에게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고통스러워하는 듯한 신음만 더 깊어질 뿐.
대부분의 병력이 떠난 지금, 성주 대리인마저 몸져눕는다면 보통 큰일이 아니다.
“의원을 불러와라! 지금 당장!”
시종이 기겁하며 그리 외쳤다. 다른 사용인들 역시 상황의 심각성을 이해한 듯, 발 빠르게 바깥으로 뛰어나간다.
“제, 제 말이 들리십니까?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곧 의원이…….”
“……마.”
“예?”
무어라 웅얼거리고 있는데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시종이 조금 더 허리를 숙여 그에게로 귀를 가져다 댔다. 그러자 비로소 희미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어온다.
이지호가 쥐어짜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필, 요…… 없으니…… 부르지, 마.”
생각났다.
지난 생에 벌어졌던 모든 일이.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이 엄습했다. 그는 연신 안부를 묻는 사용인들을 물린 뒤에도 한참이나 끙끙거려야 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하…….”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주변을 살펴볼 수 있을 만큼 두통이 가셨을 때는 이미 해가 진 후였다.
드륵.
커튼을 걷으니 완전히 깜깜해진 밤하늘이 보인다.
보름달과 별이 떠 있는 밤하늘은 참으로 고즈넉…… 하지는 못했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음 탓이었다.
‘무슨 일이지?’
이지호가 의아해하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깜깜한 밤하늘과 달리 창문 아래는 횃불이란 횃불은 모두 밝힌 것처럼 환했다.
밝은 불빛 사이로 우뚝 솟은 무언가가 존재감을 과시했는데, 바로 포르투나 가문의 깃발이었다.
포르투나 백작이 패잔병들과 함께 돌아온 모양이다. 그는 짧게 혀를 찬 뒤 곧장 아래로 향해야 했다.
바깥으로 나서자 부관이 뒤로 따라붙으며 묻는다.
“지호 경! 이제 몸은 괜찮으십니까?”
“지금은 문제없다. 바깥이 소란스럽던데 무슨 일이냐?”
“포르투나 백작님께서 잔병들을 수습해 데려오신 모양입니다.”
과연 예상했던 대로였다.
본관 입구를 나서니 대화를 나누고 있는 에이든과 포르투나 백작의 모습이 보인다.
사실 그건 대화라기보다는 한쪽의 일방적인 고함에 가까워 보였지만 말이다.
“못 이겨……! 이, 이건 못 이깁니다! 순식간에 박살 났단 말입니다! 제 병사들이 눈 깜박할 사이에 말발굽 아래서 박살 나는데……! 공작님께 원군을 더 요청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도저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