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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화 (122/142)

제122화

공작가의 위세에 걸맞을 만큼 널따란 마차 안. 텅 비다시피 한 공간을 거친 기침 소리가 대신 메우고 있었다.

“쿨럭! 쿨럭!”

기침 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발라지트 공작이었다.

옅은 기침을 내뱉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폐를 토하기라도 할 것처럼 몸을 들썩이기 시작했다.

“커흑!”

“백부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조카, 에이든이 급히 다가가 그를 부축했다.

에이든은 마차의 창문을 열어젖히며 외쳤다.

“말을 멈춰 세워라!”

그러자 덜컹거리던 마차가 곧장 우뚝 멈춰 선다. 동시에 숨을 헐떡거리던 공작도 조금 안정을 찾았다.

“괜찮으십니까?”

“머리가 지끈거리는 건 조금 낫구나.”

“그러게 건강도 좋지 않으신데…… 제가 긴 여정은 무리라고 말씀드렸잖습니까? 특히나 이런 날씨에는 말입니다.”

마치 혼을 내는 듯한 말투였다. 만일 가신들 중 한 명이 제 앞에서 저런 태도를 보였다면 무례를 벌했으리라.

하지만 그 속에 담긴 걱정을 알기에, 그는 웃으며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내가 대리인을 보낸다면 내 건강에 이상이 있다는 걸 눈치챘을 것이다.”

“까짓거 알아차리라 하십시오. 그보다 중요한 건 백부님의 건강 아닙…… 하아, 제가 이런 말을 한들 들으실 분이 아니지요.”

“잘 알고 있구나.”

“……잠시 쉬어 가시겠습니까?”

공작이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에이든의 숙부의 등허리에 푹신한 쿠션을 깔아 두곤 바깥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하인을 향해 말했다.

“잠시 쉬었다가 간다. 너는 공작님께 따뜻하게 데운 물을 가져다 드려라.”

“예, 도련님.”

에이든은 마차 안으로 의원이 들어가는 모습을 확인한 후에야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주변의 바위에 걸터앉아 한숨을 내쉬고 있으니, 말발굽 소리가 다가오는 것이 들렸다.

고개를 위로 들어 올리니 이지호가 말을 탄 채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가 말 위에서 뛰어내리며 물었다.

“많이 안 좋으십니까?”

“기침이 멎질 않아. 하아…… 그래서 내가 직접 나서실 필요 없다고 몇 번이나 간언했는데…….”

“공적인 일에는 약간 강박적인 성향이 있으시잖습니까. 하지만 저도 이런 형식적인 회담에 왜 직접 나서셨는지는 의문입니다. 어차피 성과도 없을 텐데요.”

“아, 그건 정정하지. 성과가 없는 것은 아니었어.”

“……?”

이 회담에서 성과가 있었다고? 어리둥절해하는 이지호를 향해 에이든이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내 사촌 누이가 가문을 배신한 건 확실해진 모양이야.”

“그게 무슨…….”

“유언장을 조사하게 해 달라는 저쪽 요청에 우리가 세 가지 조건을 걸었거든. 그중 첫 번째가 공작 영애의 신변을 넘겨 달라는 거였는데 말이 나오자마자 그자의 표정이 굳더군.”

그자. 대명사였지만 그는 그것이 가리키는 인물이 누구인지 단번에 눈치챌 수 있었다.

“만일 공작 영애의 신변을 인도받는다면…… 어쩌실 생각입니까?”

“글쎄, 그것까진 잘 모르겠군. 아마 숙부님께서 결정하시겠지.”

“……목숨으로 죄를 물으실까요?”

“잘은 몰라도 그렇게까지 할 것 같진 않은데. 왜, 관심 있나?”

“…….”

그러자 이지호의 표정이 순식간에 돌처럼 굳어 버렸다. 가볍게 물었던 에이든이 무안해질 만큼 경직된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백부님의 결정에 관심이 있느냐는 뜻이었는데.”

“아.”

그제야 제가 생각한 뜻이 아님을 깨달은 그가 짧게 탄성을 내질렀다. 난처함으로 얼굴이 붉어진다.

어색해진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해, 에이든이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괜찮네. 그럴 수도 있지. 한참 혼담이 들어오는 시기라 오해했나 보군.”

“……감사합니다.”

그때, 멀리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사용인들이 모닥불을 끄거나 꺼냈던 짐을 다시 마차로 싣고 있었다.

“백부님이 출발을 지시하셨나 보군. 우리도 이만 돌아가지.”

“예.”

* * *

바벨 2세 15년, 11월.

수도에서 새 왕의 즉위식이 치러지다.

일부 봉신이 반발하나 왕실은 답하지 않다.

왕실은 오르델 백작에게 왕제인 프레이의 신변을 넘길 것을 요구하다.

정해진 시일까지 요구에 응하지 않는다면 선전포고의 가능성을 시사하다.

* * *

12월 31일, 한 해의 마지막.

내일이면 나디아의 나이는 스물넷이 된다. 스물세 살의 나이로 죽었던 그녀로서는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없었다.

눈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며, 나디아가 천천히 생각에 잠겼다.

‘앞으로 일어날 일은 내가 겪어 보지 못한 것들이야.’

그건 어떤 고난과 위기가 닥치든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해결해야 된다는 뜻이다.

지금까지 미래에 일어날 일을 안다는 점을 적극 활용했던 그녀로서는 긴장될 수밖에.

초조하게 창밖을 바라보던 나디아의 어깨 위로 무언가가 내려앉은 건 바로 그때였다.

“……?”

그녀의 의아한 시선이 뒤를 향했다. 웬 담요가 어깨 위를 덮고 있었다.

“글렌? 이게 뭐예요?”

“추워 보여서 말이야. 입술이 파랗더군.”

“아.”

창문을 꽁꽁 닫아 두었다지만 북부의 찬바람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다른 생각에 빠진 탓에 창틈 사이로 바람이 새어 들어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뒤늦게 느끼지 못했던 추위가 몰려왔다.

“그나저나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지? 심각한 표정이던데.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는 문제라면 도와주겠다.”

“그건…….”

지난 생에서 죽었던 날이 지났는데도 살아 있는 게 신기해서, 라고는 말할 수가 없었다.

“조만간 일어날 싸움에서 승리한다면 제 복수도 끝을 맺는 거니까요. 긴 여정 끝에 목적지가 보인다고 생각하니까…… 감회가 새롭네요.”

그리고 그 순간, 글렌과의 계약 역시 끝을 맺게 되리라. 더 이상 그와 결혼을 유지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리 생각하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고마워요.”

“응?”

“내가 무슨 이유로 가족에게 복수하려 하는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묻지 않고 지지해 줬잖아요.”

“아니, 고맙다는 말은 내가 해야지. 그러지 않았다면 지금쯤 영지 꼴이 말이 아니었을 테니.”

글렌이 어깨 위의 담요를 여며 주며 말을 이었다.

“지난 3년 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내가 아니라 그대 덕분이야. 그대를 만난 건 내 인생 최대의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

“아, 오해할까 봐 덧붙이자면 비단 가문의 번영에 관한 문제는 아니야. 그저, 나디아 윈터펠이라는 사람을 만나게 된 것만으로…… 내게는 행운이었다.”

고백이나 다를 바 없는 말에 그녀의 뺨이 살짝 달아올랐다. 천년나무 아래에서 그가 했던 말들이 귓가에 울리는 듯하다.

‘내가 그의 고백을 받아 주기만 하면…… 난 계속 윈터펠에 머물 수 있겠지.’

3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건 그녀의 생애를 통틀어 가장 활기차고 즐겁게 보냈던 시간이기도 했다.

그런 시간을 함께 보냈던 사람들과 장소를 떠난다는 건 분명 미련이 남는 일이리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거짓으로 마음을 받아 줄 수는…….’

사실 모르겠다. 자기 자신의 마음인데도 알 수가 없었다.

글렌은 지난 3년 동안 자신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사람이었다.

함께 머리를 맞댄 채 의논하고, 고민하고, 때때로는 의견이 충돌하여 긴 토론을 벌이기도 하고…….

글렌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는 것과는 별개로, 그와 진짜 부부가 되는 문제에 대해서는 쉽게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건 여태껏 나디아가 맞닥뜨리지 못했던 종류의 고민이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가 정해 주는 상대와 정략결혼을 하게 되리라 생각했지, 누군가의 고백을 받고 그에 대해 제 마음을 정해야 할 상황이 온다는 건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정말 모르겠어. 어떻게 해야 되는지.’

그녀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자, 글렌이 이해한다는 듯 웃으며 물었다.

“혹시 지금 달리 할 일이 있나?”

“아뇨. 그런 건 없는데 그건 왜…….”

“다름이 아니라 1층에서 송년회가 열리고 있거든. 본성의 사람들이 모두 모이는 자리인데, 혹시 참석할 생각이 있나 하여 물어봤다.”

“음…….”

그리 왁자지껄한 자리를 좋아하지 않는 편이지만, 나디아는 올해만큼은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어쩌면 내년부터는 기회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탓이다.

“좋아요. 마침 저녁 식사를 하기 전이거든요.”

그녀가 긍정적인 답을 하자, 글렌이 에스코트하겠다는 듯 오른손을 내민다. 나디아는 그의 손을 잡은 채 발걸음을 옮겼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스물세 살의 마지막 날을 보내고, 겪어 보지 못한 스물네 살의 첫날을 맞이하기 위해.

* * *

신년을 맞이한 지 보름째 되던 날.

북부 동맹이 발라지트 공작을 비난하여 들고 일어서다.

일부 봉신들이 그에 동조하다.

* * *

지평선 근처에서 흙먼지가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윈터펠의 병사들이 북부 연합군과 합류하기 위해 움직이는 모습이었다.

멀리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나디아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영지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또 떠나게 되었네.”

그 말에 대답한 건 바로 파비안이었다. 어딘가 당황스러워하는 목소리다.

“영주님이요?”

“네, 동부로 출전했다가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았잖아요.”

“어, 그거…… 벌써 몇 개월이나 지난 것 같은데요…….”

이번에는 나디아가 당황해할 차례였다.

“몇 개월?”

“네, 귀환 축하 파티를 연 지가 언제인데요?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그, 그런가?”

생각해 보면 아룬드에서 재회한 이후, 벌써 반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갔다.

그런데도 함께 있었던 시간이 왜 이렇게 짧게 느껴지는 것인지…….

혼란에 잠긴 나디아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파비안이 안타깝다는 눈빛과 함께 입을 열었다.

“하긴, 원래 정인과 함께하는 시간은 짧게 느껴지기 마련이죠.”

“정인이라니! 나는…….”

곧장 반박하려 했던 그녀의 말소리가 멎었다. 의아해하는 파비안의 눈빛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다른 사람들에게 나는 글렌을 열렬하게 짝사랑하고 있다는 설정이었지…….’

하지만 그건 단지 연기일 뿐인데…… 왜 글렌과 떨어지게 되어 슬프다는 감정이 느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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