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1화 (121/142)

제121화

“그럼 회담장에 못 들어가는 사람들끼리 이야기나 나눌까요?”

“나야 좋지.”

그렇게 말한 두 사람은 곧장 자리를 옮겼다.

사용인들이 불을 피운 모닥불 주변, 간이 의자가 놓인 곳이었다.

따뜻하게 데운 물을 마시며 프레이가 물었다.

“후작 부인은 왕위 계승 문제가 이 회담장 안에서 대화로 해결될 가능성이 얼마나 된다고 보나?”

“그건 저 역시 묻고 싶은 주제네요. 전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0할.”

조금의 지체 없이 곧장 대답이 돌아온다. 나디아는 굉장히 놀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바쁘신 몸들이 한자리에 모인 이유는요?”

“다짜고짜 선전포고를 하면 모양새가 빠지지 않나? 서로 우리는 할 만큼 다 했다, 하고 명분을 쌓는 중이지.”

나디아는 방금 전보다 더욱 놀랐다. 못 본 사이 놀기만 했던 것은 아닌 모양이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물개 박수를 쳐야 했다.

“훌륭하세요. 말씀하신 그대롭니다.”

“외숙부 덕분이지.”

거기다 겸손을 알기까지. 하마터면 감동의 눈물을 흘릴 뻔했다.

그런데 나디아가 감격한 것과는 달리, 프레이의 표정은 어딘가 어두워 보였다.

본래 칭찬이라면 좋아서 죽는 사람 아니었던가? 그녀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표정이 어두우시네요. 마음에 걸리는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곧 또 전쟁이 일어나겠구나 싶어서. 악마족의 침략을 막아 낸 지 얼마나 지났다고……. 사람이 죽는 건 싫다. 동부의 피해를 온전히 복구하기도 전에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점이 슬플 뿐이야.”

“…….”

그리 말하는 프레이는 정말로 침울해 보였다.

한참 흙바닥 위만 바라보던 그가 쓴웃음과 함께 고개를 들었다.

“내가 너무 유약해서 실망했으려나? 리암이라면 지금쯤 오로지 승리만을 생각하고 있을 테지.”

그의 동생은 강인하고, 영리하고, 결단도 빨랐다.

냉정한 면이 있지만 어쨌거나 제 사람은 철저하게 챙긴다.

이만하면 모실 가치가 있는 주군 아닌가?

그러니 발라지트 공작이 제 아군으로 동생을 택한 것은 어찌 볼 때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리라.

시무룩해진 프레이가 어깨를 축 늘어트리려는 순간이었다.

“전 그게 전하의 장점이라고 생각하는걸요.”

“응?”

“어떻게 보면 그것이 전하께서 왕위를 이어받아야 하는 이유일 수도 있지요.”

“그, 그런가?”

“그리고 죄책감 가지실 필요 없어요. 언젠가는 반드시 일어났을 일이니까요. 그게 선왕 폐하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조금 앞당겨졌을 뿐이죠.”

“…….”

프레이는 한동안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잠시 후, 그가 입꼬리를 빙긋 끌어올리며 말했다.

“그리 평가해 주다니 참 고맙군. 후작 부인과 이야기를 하면 마음이 편해져. 윈터펠 후작은 좋은 아내를 둬서 참 좋겠어.”

“별말씀을.”

그가 풀이 죽어 있으면 곤란해지는 것도 한 이유이긴 하지만, 아주 마음에 없는 말도 아니었다.

제 아버지, 그러니까 발라지트 공작과 비슷한 사람이 왕이 된다고 생각해 보라.

‘그건 정말 끔찍한 일이지…….’

나디아는 남몰래 몸을 부르르 떨어야 했다.

그 이후로 이어진 대화는 현 시국과 관련 없는 이야기들뿐이었다.

키우는 개가 새끼를 다섯 마리나 낳았다든가, 외숙부의 잔소리가 날이 갈수록 심해진다든가, 서부의 음식도 먹다 보니 입맛에 맞는다든가.

마치 복잡한 현실을 피해 잠시 휴식을 취하려는 것처럼.

몇 시간 후, 회담장인 막사 안에서 누가 거친 발걸음으로 걸어 나왔다. 거친 고함 소리가 몇 번 울린 뒤의 일이었다.

프레이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끝난 건가?”

“결과는 그리 좋지 않은 모양이네요.”

“음, 아무래도.”

그 뒤를 이어 영주들이 연달아 걸어 나오는 걸 보니 정말 회담이 끝난 모양이다.

회담장의 나오는 이들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그건 바로 하나 같이 표정이 험악하다는 것이었다.

“후작 부인, 그럼 나는 외숙부에게 가 보겠다.”

“예, 다음에 봬요. 아마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 같지만요.”

“내 생각에도.”

글렌이 나타난 것은 대다수의 참석자들이 빠져나간 이후였다.

나디아는 벌떡 일어나 가까이 다가오는 그를 맞이했다.

“어땠어요?”

“물론 결렬이다.”

“그건 저도 예상하고 있어요. 문제는 그 과정이죠. 유언장을 조사하게 해 달라는 우리 요청에 무어라고 하던가요? 그건 반대할 명분이 없을 텐데요.”

“뭐라고 하긴. 갖은 핑계를 대며 말을 돌리더군. 정말 말도 안 되는 조건을 내걸면서 으름장을……!”

격하게 소리치려던 그가 진정하려는 듯 심호흡을 했다.

대체 저쪽에서 무슨 말을 했기에 글렌이 저토록 흥분하는 건지.

나디아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대체 무슨 조건이었는데요? 영지를 반납하기라도 하래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럼?”

“공작 영애의 신변을 내달라는 것이 첫 번째 조건이었다.”

“…….”

너무 어처구니가 없고 당황해서, 그녀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도리어 목소리를 높인 것은 다른 가신들이었다.

“대체 무슨 명분으로 한 가문의 안주인을 내놓으라는 요구를 하는 겁니까?”

“본래 발라지트 가문의 사람이니 돌려받는 게 맞다고 하더군.”

“결혼한 지 얼마나 지났는데 이제 와서 그런 소리를…….”

“마님은 우리 윈터펠의 일원입니다.”

다들 흥분해서 날뛰고 있는 와중, 파비안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게, 법적으로 따지자면 아이가 있어야 온전한 부부로 인정받긴 하…… 흐익! 죄, 죄송합니다, 후작님.”

주군의 날카로운 눈초리에 금방 입을 다물긴 했지만 말입니다.

지스카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 녀석이 눈치가 없는 건 맞지만 흘려들을 말은 아닙니다. 발라지트가 정말 정식으로 항의하고 나서면 명분 면에서는 저희가 밀릴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걸 알고서 내건 조건이겠지. 저들 딴에도 유언장 조사를 거부할 구실이 없으니, 교묘하게 잘못을 우리 쪽으로 돌리기 위해.”

“교활한 놈들.”

“하여간 잘 지내 보려 해도 도무지 그럴 수가…….”

가신들이 입을 모아 정적을 험담하고 있을 때였다.

겨우 충격을 갈무리한 나디아가 입을 열었다.

“전 가기 싫어요.”

“당연하지! 그럴 생각도 없다!”

당연한 것을 왜 굳이 말로 하냐는 듯한 어조였다.

글렌이 목소리를 높이며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 덕에 그녀는 반강제적으로 그와 시선을 마주쳐야 했다.

그가 나디아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대는 이제 윈터펠 후작가의 사람이야. 내가 지켜야 할 사람이지. 내 울타리 안의 사람이라고. 그네들이 내놓으랬다고 순순히 돌려줄 이유가 없잖아.”

“하지만 저를 감싼다고 다른 영주들이 반발할 수도…….”

“어차피 유언장을 조사할 생각이 없으니 그따위 조건을 내건 거야. 그럼에도 만일 반발하는 자가 나온다면…….”

“…….”

“내가 직접 묵사발 내 버릴 테니 걱정 마라. 그대가 발라지트로 돌아갈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야. 아무런 걱정도 하지 마.”

“…….”

나디아가 동그래진 눈으로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리 말하는 얼굴은 전에 없이 진지했다.

무어라 대답을 해야 할 시점인 것 같은데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녀는 그저 입술만 달싹여야 했다.

황무지에 부는 찬바람 때문인지 입안이 바싹 말라 버린 것 같았다.

누군가 깃털로 쓸어내리기라도 하는 듯 손바닥이 간질간질했다. 아니, 간지러운 게 손바닥뿐일까?

생경한 느낌에 조용히 주먹을 말아 쥐는 그녀의 목울대가 꿀꺽 넘어갔다.

“글…….”

나디아가 뭐라도 말하기 위해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옆에서 휘익, 하고 휘파람 부는 소리가 들려왔다.

때아닌 소음에 두 사람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간다. 그곳엔 놀란 얼굴로 입을 살짝 벌리고 서 있는 가신들이 있었다.

“…….”

“…….”

“…….”

묘한 침묵이 흘렀다. 얼어붙은 황무지 위를 쓸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만이 요란하다.

짝.

침묵이 깨진 것은 누군가 손뼉을 쳤을 때였다.

짝, 짝짝.

짝짝짝.

누군가로부터 시작한 박수 소리는 이내 다른 가신들에게로 퍼져 나갔다. 다들 손을 모아서 손뼉을 마주치고 있다.

다른 가문에서 온 사람들이 이 광경을 보았다면 퍽이나 이상하게 생각했으리라.

“어, 그…… 뭐냐. 그러니까 말이죠…….”

“보기 좋으십니다. 근데 주변에 사람이 있다는 건 좀 고려해 주심이 어떤지…….”

“조용히 해.”

“옙.”

나지막하게 뇌까리는 목소리에 박수 소리가 뚝 멎는다. 그게 더 어색했다.

“크흠, 흠.”

나디아는 괜히 헛기침을 하며 몸을 돌려세워야 했다.

얼굴에 피가 몰리는 걸 숨기기 위해서였지만, 안타깝게도 귀까지 붉게 물든 터라 소용없었다.

“바, 바깥에 오래 서 있었더니 좀 추워서요. 이만 마차에 들어가 있을게요.”

“그래, 알겠다.”

이내 그녀가 마차 안으로 쪼르르 들어가 버린다.

마차 문이 완전히 닫히는 걸 확인한 글렌이 고개를 옆으로 굴렸다. 가신들이 서 있는 방향이었다.

노기와 짜증이 완연히 묻어 나는 눈빛이다. 제일 먼저 박수를 치기 시작했던 아드리안이 당황해 물었다.

“왜, 왜 그렇게 보시는 겁니까, 영주님?”

“몰라서 묻나?”

“아니, 그게…… 여, 여하튼!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습니까? 앞으로 어쩌실 겁니까? 협상은 결렬이잖아요.”

“어쩌긴 뭘 어째. 대화로 해결이 안 됐으니 무력으로 해결하는 수밖에.”

“그건 다행이군요. 무력으로 해결하는 건 우리 특기잖습니까.”

“제 말이요.”

글렌의 시선이 자리를 뜨고 있는 다른 봉신들에게로 가 닿았다.

황무지 위에서 밤을 지새울 수는 없는 노릇이라, 하나 같이 바삐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개중에선 발라지트 공작가의 문양이 새겨진 마차도 존재했다.

그는 그 안에 타고 있을 노인을 떠올렸다.

회담 중에는 묵묵히 말을 아끼기만 했던, 여우같은 늙은이.

‘이제는 정말 전쟁이군.’

발라지트 가문의 마차가 유유히 황무지 위를 내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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