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0화
“……?”
나디아의 사고가 일순간 정지됐다.
‘그게 그런 말이 되나?’
글렌은 평소와 같이 편한 모습이었다. 연회장이나 공적인 자리에 나갈 때처럼 옷을 차려입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그의 모습은 꽤…… 근사해 보였다. 얇은 셔츠를 걸치고 꽃을 손에 들었을 뿐인데.
그가 아무런 대답도 못 하는 나디아의 손에 꽃을 쥐여 주며 말했다.
“좋은 의미로 듣지. 그래도 이 꽃은 그대가 가지는 게 좋겠군. 본인은 모르는 것 같지만 그대에게도 보라색이 꽤 어울리거든.”
“…….”
꽃을 직접 쥐여 주느라 두 사람은 손을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검을 잡느라 생긴 굳은살이 손바닥 위로 느껴진다.
별것 아니라면 별것 아닌 스킨십이었지만 왜 손바닥이 간질거리는 감각이 느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어…… 음, 고, 고마워요. 이 꽃은 제 집무실에 잘 장식해 놓을게요.”
괜히 부끄러운 기분이 들어서, 나디아는 다른 곳을 바라보며 인사하고 말았다.
딱 기분 좋다고 느꼈던 초여름의 햇살이 갑작스레 덥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다. 머리에서 열이 나는 것 같았다.
나디아가 웃옷을 펄럭거리며 애써 다른 생각을 했다.
‘이러니까 꼭 여름휴가라도 온 기분이네.’
아니, 진짜 여름휴가인가?
본성 근처에 있는 호수인데도 이곳에서 뱃놀이를 하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간 이런저런 일로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기 때문이다.
글렌이 전쟁터를 전전했을 때는 혼자 안전한 곳에 있다는 게 미안해 부러 없는 일도 만들어 냈다.
그러므로 요즈음 누리는 여유는 그녀가 과거로 돌아온 이후, 처음으로 맞이하는 것이었다.
‘지금의 여유가 오래 이어졌으면 좋겠는데…….’
그리 생각한 나디아의 입가에서 일순간 씁쓸한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절대 그리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생에, 나디아가 죽음을 맞이했던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 * *
“영주님, 동부의 유민들이 북부로 밀려오고 있습니다.”
“유민들이 북부로?”
전쟁으로 쑥대밭이 된 동부보다는 낫겠지만, 그럼에도 북부가 살기 힘든 땅이라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굳이 고향을 등지고 다른 곳에 정착하려면 남부가 훨씬 더 매력적인 선택지란 뜻이었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글렌의 목소리에, 행정관 에드워드가 좀 더 상세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다 영주님이 후작가의 명성을 널리 떨친 덕분이지요. 윈터펠 후작은 인의를 아는 자이니 결코 어려운 이들을 외면하지 않으리라는 말이 퍼지고 있더군요.”
오직 윈터펠 후작가만이 포로들을 구하기 위해 적군을 추격했던 일을 말하고 있는 듯했다.
에드워드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동북부 지역의 개발을 권하고 싶습니다.”
“동북부 지역이라면 아룬드 인근을 말하는 건가?”
“네, 마침 지난 몬스터 웨이브로 반파되었던 성도 복구가 되었다고 합니다. 유민들이 몰리고 있으니 인력 걱정을 할 필요도 없을 테죠.”
“나쁘지 않군. 나디아, 그대의 생각은 어떠…… 나디아?”
무심코 나디아에게 시선을 돌렸던 글렌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녀가 완전히 넋 나간 얼굴로 달력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어디 아픈 건가?”
나디아는 제 이름이 몇 번 더 불린 후에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응? 왜 그래요, 글렌?”
“동북부 개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얘기를 하고 있었다.”
“동북부 개발? 그럼 아룬드 근처네요? 음, 나쁘지는 않은데…….”
나디아가 말끝을 흐리며 생각에 잠겼다.
아룬드 근방의 동북부 개발. 얘기만 들으면 나쁘지 않은 계획인 듯하다. 다만―
‘조만간 그럴 여유가 없어질걸?’
나디아 자신이 죽었던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말인즉, 왕의 죽음 역시 다가오고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왕의 죽음을 논할 수는 없는 일. 그녀가 시치미를 떼며 대답했다.
“저는 괜찮을 거 같네요. 에드워드, 구체적인 보고서가 완성되면 바로 전달해 줘.”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다른 영지에서 몬스터 사체에 대한 거래 요청도 쇄도하고 있습니다.”
악마족과의 전쟁을 치르며, 그들이 동족의 사체를 어떻게 활용하는지 알려진 이후 몬스터 사체에 대한 수요가 급등하게 되었다.
‘더 이상 우리만의 노하우가 아닌 게 된 건 아쉽지만…… 그래도 윈터펠은 몬스터가 가장 많이 출몰하는 지역이니까.’
이 척박한 영지에 특산품이 생겼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충분히 기뻐할 만한 일이었다.
“지금까지 했던 대로 웨인과 카타리나에게 중개를 맡기도록 해. 그나저나 이렇게 된 이상, 조만간 몬스터 토벌에 대한 왕실의 보조금이 없어지겠군.”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하여간 속 좁은 자들 같으니.”
에드워드가 차마 마님의 앞이라 험한 말을 못 하겠다는 듯 입술을 비쭉 내민다.
글렌 역시 불만이 많은지 표정이 그리 밝지는 못했다.
남부와 북부 사이에 쌓인 감정의 골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나디아가 생각했다.
‘왕이 그렇게 죽지 않았어도 언젠가는 전쟁이 일어났겠구나.’
그렇다는 말인즉 왕의 생사와 무관하게 제 죽음 역시 예정된 수순이었다는 소리다. 나디아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곧 밝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박수를 짝짝 치며 주변의 분위기를 환기했다.
“자, 자. 어차피 보조금 까짓거, 얼마 되지도 않는 액수였잖아요. 그보다는 안정적인 수입원이 생기는 게 더 좋은 일이지요.”
“물론 그렇긴 하지만…….”
“다음 안건으로 넘어갈까요? 전란으로 고아들이 많아졌잖아요. 해서 고아원과 구빈원을 증축하고 싶은데…….”
나디아의 말이 이어지자 집무실 안의 분위기는 점차 밝아졌다.
가신들이 각자의 의견을 꺼내기 시작하며 잠시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왁자지껄하게 바뀌기 시작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자리에서 논의되었던 수많은 안건들이 모두 밀리게 된 건 얼마 후의 일이었다.
동부로 시찰을 나갔던 왕이 타지의 음식을 잘못 먹고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탓이었다.
* * *
바벨 2세 15년, 8월.
왕의 유언장이 공개되다.
2왕자 리암이 후계자로 지목되다.
외숙부 오르델 백작의 영지를 방문했던 1왕자 프레이가 유언장의 진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다.
바벨 2세 15년, 9월.
리암이 수도로 돌아와 왕세자 책봉식을 치르다.
같은 달.
북부 연맹이 공식적으로 유언장의 진실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다.
공식적인 조사를 요구하나 거부당하다.
바벨 2세 15년, 10월.
각지의 봉신들이 한데 모여 회담을 열다.
* * *
각 가문의 문양을 새긴 마차들이 얼어붙은 대지 위를 내달리고 있었다. 다음 왕위 계승자를 협의하는 회담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회담에 참석하는 영주들의 이름값이 무색하게도, 임시 회의장은 황무지의 한복판에 임시로 세워졌다.
살얼음 위를 걷는 듯한 시국인 만큼, 그 누구도 서로의 영토에 들어가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최소한의 호위를 제외한 병력은 따라오지 못했다.
회담장 주변을 지키고 있는 것은 소수의 왕실 위병들과 영주들이 데려온 호위뿐이었다.
왕실 위병들 중 하나가 글렌에게 다가와 물었다.
“실례지만 신분을 확인하겠습니다. 윈터펠 후작님이십니까?”
“그렇다.”
“그렇다면 옆의 레이디께서는……?”
“내 아내다.”
그러자 그의 표정이 단번에 아리송하게 변했다.
“회담장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각 가문의 가주 한 사람뿐입니다.”
“알고 있다. 하지만 동행인을 데려오지 말라는 말은 들은 적이 없다만.”
선뜻 납득이 가지 않는 대답이었지만 글렌에겐 그를 납득시켜야 할 의무가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위병이 글렌을 안내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음…… 그럼 부인께서는 회담장 바깥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후작님께서는 이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다른 분들은 거의 다 도착해 있습니다.”
“나디아, 다녀오겠다.”
“다녀와요.”
나디아가 멀어져가는 남편의 등에 손을 흔들었다.
글렌의 모습이 완전히 천막 안으로 사라지자, 파비안이 입을 열어 말했다.
“마님, 날씨도 추운데 마차 안에 들어가 계십시오. 저희가 음식을 준비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럼 부탁할게요.”
가을이라고는 하나 황무지 위에서는 벌써부터 찬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나디아는 겉옷의 옷깃을 여미며 몸을 돌려세웠다.
그런데 그녀가 막 마차 안으로 들어서려는 순간이었다.
“후작 부인! 윈터펠 후작 부인!”
익숙한 목소리다. 뒤를 돌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아는 얼굴이 손을 흔들며 뛰어오고 있었다.
1왕자 프레이였다. 환한 금발이 겨울 햇살 아래서도 금괴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첫 감상은 이러했다.
‘뛰지 마세요, 전하!’
왕족의 체통을 생각해 걸어 다니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솟구쳤지만 나디아는 지적을 포기했다.
너무 반갑다는 듯 방글방글 웃고 있는 사람에게 차마 잔소리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뭐, 왕족에게 친근한 매력이 있는 것도 나쁘진 않지.’
나디아가 살짝 무릎을 굽히며 인사했다.
“전하께서도 오셨군요.”
“숙부님을 따라왔지. 그런데 회담장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더라고?”
“그야 봉신들끼리만 모여서 의견을 나누는 자리니까요. 그보다 오르델 백작님은……?”
“이미 회담장 안에 들어가 있다. 한참 전에 도착했거든. 워낙…… 약속 시간에 1초라도 늦는 걸 싫어하는 분이라.”
그리 말하는 프레이의 얼굴에 진저리치는 듯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나디아가 생각했다.
‘오르델 백작이 후계자 교육을 잘 시키고 있는가 보구나.’
그가 조카와 정반대인 성격이라 천만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