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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화 (119/142)

제119화

‘막상 닥치니까…… 느낌이 다르네?’

베개를 껴안은 손에 자연히 힘이 들어갔다. 눈앞에선 글렌이 주섬주섬 이불을 뒤척이고 있었다.

침대 왼쪽 끄트머리에 자리 잡은 그가 나디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안 잘 건가?”

“아, 그게…….”

나디아가 머뭇거리자 그가 일어나려 하며 말했다.

“역시, 불편한가 보군. 그럼 내가 소파에서…….”

“아니에요! 먼저 제안한 건 전데 당신을 소파로 내쫓을 수는 없죠.”

그녀는 그리 말하곤 침대 오른쪽 끄트머리로 올라왔다.

침대는 널따란 침실만큼이나 넓었다. 여행 중 사용했던 손님방의 침대보다도 더.

분명 그때보다 훨씬 나은 상황인데도 왜 이렇게 어색한 기분이 드는 것인지…….

‘아무래도 고백 들은 것 때문에 그런가 봐.’

예전에는 글렌을 그저 복수의 파트너로 봤을 뿐이다.

그러나 지금 그는 단순한 동업자가 아니었다. 제게 처음으로 구애한 이성인 것이다.

한 번 죽어 본 경험은 있어도 연애해 본 경험은 없는 그녀로선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하자고 해 놓고 이제 와서 무를 수도 없고…….’

명백한 자신의 실책이자 오판이었다. 그러니 어쩔 도리가 있나? 조금 불편해도 참는 수밖에.

목 끝까지 이불을 덮은 나디아가 인사했다.

“잘 자요.”

“그대도.”

글렌이 협탁 위의 촛불을 끄자 방 안에는 어둠이 찾아왔다.

‘차라리 이게 낫네.’

아무것도 안 보이니 곁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녀가 눈을 감은 채로 자기 자신을 세뇌했다.

‘나는 지금 혼자서 넓은 침대를 쓰는 중이다. 내 방의 침대를 혼자서 쓰는 중이다…….’

그러나 소용 없는 일이었다.

곁에서 이불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신경이 바싹 곤두섰기 때문이다.

“……!”

감았던 눈이 반사적으로 번쩍 뜨였다.

창밖에서 달빛이 새어 들어오는 탓에 침실 안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인다. 글렌의 옆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

실루엣만 보이는 그의 옆모습을 잠시 들여다보다가, 나디아는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새삼 콧대가 참 잘생겼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무슨 생각을……. 빨리 자자.’

하지만 정신이 말똥말똥한 상태에서 잠에 드는 것은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어째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정신이 맑아지기만 하는 것 같다.

심지어 며칠 전 들었던 글렌의 고백이 자꾸만 귓가에 울리는 것 같았다.

“그래, 그대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있는 거다.”

그의 목소리를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그러잖아도 없던 잠기운이 싹 달아나는 기분이었다.

나디아는 조금이라도 더 잠들기 편한 자세를 찾기 위해 연신 몸을 움직여야 했다.

그녀가 계속 이불을 뒤척거리기만 하자, 글렌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잠이 안 오는 건가?”

“아, 그게…… 낮에 살짝 낮잠을 잤더니…….”

물론 거짓말이다. 낮잠 같은 걸 잤을 리가.

그러자 글렌이 그녀를 향해 몸을 돌리며 말했다.

“그럼 피차 잠도 안 오는 김에 얘기나 하지.”

“당신도 잠이 안 와요?”

“그래.”

“낮잠을 잤나 봐요?”

“그게 아니라…… 좋아하는 여자 옆에 누워 있으니 잠이 오지 않는 거야.”

“…….”

잠시 나디아의 말문이 막혔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었던가?

방 안이 어두운 게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얼굴이 붉어진 게 훤히 드러났을 테니.

그녀가 살짝 투정 부리듯 대답했다.

“여태껏 쑥맥인 줄 알았는데 그런 것도 아니네요.”

“나는 지금 물불 가릴 때가 아니거든.”

“…….”

이 사람, 정말 진심이구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부끄러워진 그녀가 흠흠 헛기침을 하며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다른 주제로 얘기해요. 저랑 만나기 이전에 어떻게 살았다거나……. 그래, 어린 시절 얘기 해 줘요.”

“……어린 시절?”

그의 목소리에 당황스러운 기색이 묻어 나온다.

머뭇거리던 그가 이내 말을 이어 나갔다.

“글쎄, 외동아들인 만큼 후계자 교육을 엄격히 받고 자라서…… 그대가 흥미로워 할 만한 이야기는 없을 것 같은데.”

“후계자 교육?”

“그대도 알 만한 것들이다.”

나디아는 사실상 공작가의 후계자로 자란 에이든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엄격한 교육과 주변인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자란 어린아이라…… 떠오르는 바가 있었다.

“혹시 애늙은이라는 말을 자주 듣진 않았어요?”

“……정확하군. 어떻게 안 거지?”

“지인 중에 비슷한 사람이 있거든요.”

소년 시절의 그가 어떤 모습이었을지 저절로 떠오르는 듯했다.

지금처럼 냉랭한 인상에 이목구비만 앳된 어린아이였으리라. 꼬마 주제에 어른스러운 척을 하느라 꽤나 진땀을 뺏겠지.

“지금보다 훨씬 귀여웠겠네요.”

“……지금보다?”

“네, 지금보다.”

어둠 속에 잠긴 글렌의 표정이 살짝 미묘해졌다. 그 말인즉 지금도 귀엽다는 뜻 아닌가?

칭찬이라면 칭찬이었지만 글렌은 웃을 수 없었다.

‘젠장, 대체 뭐가 문제였던 거지?’

남성적인 매력을 어필하려 했던 지난날의 노력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그 무수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귀엽다는 말이나 듣다니.

어쩌면 전략을 조금 바꿔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그에게, 나디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계속해 줘요. 그럼 저도 제 어린 시절을 얘기해 줄게요.”

나디아는 글렌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알고 싶었다.

그리고 그건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 * *

기후가 혹독한 북부라지만 여름철만큼은 남부 못지않게 온화한 편이었다.

아니, 푹푹 찌는 듯한 더위의 남부에 비하면 오히려 더 쾌적하다고 표현해야 할 것이다.

그 때문에 북부인들은 여름만 되면 강가나 들판으로 달려 나가곤 했다. 다시 겨울이 찾아오면 몇 개월 동안은 실내에 칩거하다시피 해야 하니까.

짧은 여름을 즐기는 이들의 행렬에는 윈터펠 후작 부부도 포함되어 있었다.

호수에서 뱃놀이를 하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사용인들이 속닥거렸다.

“우리 마님과 영주님, 최근 들어 부쩍 가까워지신 것 같지?”

“확실히 함께 계시는 시간이 늘었어요.”

“그런데 그건 예전에도 마찬가지였지 않나? 매일 함께 붙어 다니셨잖아.”

“예전에는 같은 집무실을 쓴 거였잖아요. 제가 시중들면서 얘기를 좀 들어봤는데, 정말 일 얘기만 하셨다고요. 그럴 때마다 영주님의 무심함이 얼마나 야속하던지…….”

글렌이 들었다면 억울함에 뒷목을 잡을 만한 얘기였다. 그러나 그의 입장을 알아주는 이는 이 자리에서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사용인들이 잘 풀려서 다행이라며 뿌듯한 미소를 짓고 있을 때였다.

“흐윽.”

“……?”

어디선가 사람이 흐느끼는 듯한 소리가 들려온다.

이런 경사스러운 광경을 눈앞에 두고 웬 흐느낌?

사용인들이 의아해하며 고개를 돌렸을 때 발견한 건, 눈시울을 붉게 물들인 집사장 고든이었다.

“지, 집사장님……?”

“왜 갑자기 눈물을…….”

“감격스러워서 그러지.”

사랑을 쟁취하기 위한 나디아의 노력이 마침내 결실을 맺는 모습을 목격하니 감동이 북받쳐 오른다.

그간 무정하기만 한 영주님의 모습을 보며 얼마나 마음을 졸였던가?

차마 영주 부부의 개인 사정에 끼어들지도 못하고 한숨만 삼켰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고든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 내며 말을 이었다.

“드디어 마님의 소원이 이뤄지는 모습을 보는구나.”

“…….”

아니, 그렇다고 눈물을 흘리실 것까지는…….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누구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집사장은 사용인들을 관리하는 직책인 것이다.

조금 더 편한 직장 생활을 위해, 사용인들이 맞장구를 치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두 분이 침실을 같이 쓰시기도 하더라고요……! 매일은 아니지만 이만하면 장족의 발전이죠!”

“조만간 좋은 소식이 들려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집사장님.”

“슬슬 그래야지.”

어느새 눈물을 전부 닦아 낸 고든이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도 우리 본분에 맞는 준비를 해야겠구나.”

“예? 그게 무슨…….”

“본성에는 아주 오랫동안 어린아이가 없지 않았는가? 지금부터 아이가 자라기에 좋은 환경을 조성해 놓아야지.”

“…….”

“그래, 일단 아이용 가구부터 새로 주문해야겠군.”

무언가 결심한 듯한 고든이 비장한 얼굴로 몸을 돌려세웠다. 그러고는 본성을 향해 척척 걸어가기 시작한다.

“…….”

“…….”

남겨진 사용인들은 멍하게 그 뒷모습을 바라보아야 했다.

* * *

한편, 같은 시각.

배에 기대 누운 채 호숫가를 바라보던 나디아가 놀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어? 고든이 돌아가 버렸는데요?”

집사장이 돌아가자 나머지 사용인들도 그 뒤를 따른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그녀의 표정이 더욱 심각해졌다.

“어? 다른 하녀들까지……. 이러면 안 되는데…….”

글렌과 자신이 잘 지내고 있다는 소문을 퍼트려 줘야 할 목격자들이 단체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기껏 호수에 배까지 띄웠는데!’

이러면 굳이 시간을 내서 연극을 하는 보람이 없어지지 않은가?

발을 동동 구르는 그녀에게 글렌이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쨌든 우리가 함께 여가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봤으니 됐지. 알음알음 말이 퍼져 나갈 거다.”

“그래도…….”

두 사람이 굳이 호수에서 뱃놀이를 하는 것은 주변의 시선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첫째, 마님의 능력만 이용해먹는 무정한 영주님이라는 평을 피하기 위해.

그리고 둘째, 후사를 목 빠져라 기다리는 선후작을 달래 주기 위해.

어쨌거나 영주 부부가 나들이를 위해 바깥으로 나섰다는 소식이 알려지긴 할 테니, 처음의 목표는 달성한 셈이다.

글렌이 다시 입을 열어 물었다.

“그나저나 목적은 달성했으니 돌아갈 건가?”

“당신은 어떤데요? 좀 더 있고 싶어요?”

“난 아무래도 상관없어. 그대의 뜻에 따르지.”

“으음…….”

윈터펠의 날씨가 가장 온화해지는 초여름답게, 햇빛은 딱 기분 좋을 만큼 따뜻했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거기다 눈앞에는 에메랄드빛 호수가 펼쳐져 있기까지.

좀 더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리라.

“이왕 나온 김에 좀 더 놀다가 들어가요. 이렇게 날씨 좋은 날은 드물잖아요.”

“뜻대로.”

글렌이 손짓을 하자, 뱃사공이 배를 반대편으로 몰기 시작했다. 호수를 한 바퀴 돌 생각인 듯하다.

햇빛을 반사하는 수면이 유리알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넋 나간 듯 한참이나 바라보던 나디아가 이내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저 멀리서 시선을 잡아끄는 무언가가 보였던 것이다.

바로 호숫가에 피어 있는 보라색 수초였다. 수국와 연꽃을 반씩 섞어 놓은 듯한 모습이다.

나디아가 그곳을 가리키며 물었다.

“글렌, 저 꽃 이름이 뭔지 알아요? 되게 예쁘네요.”

“글쎄, 잘 모르겠지만 가져다줄 수는 있다.”

“네?”

뜬금없는 제안에 나디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저 꽃을 화병에 장식해 놓으면 꽤 예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겸사겸사 글렌의 평판에도 도움이 되겠고.’

부인에게 직접 꽃을 꺾어 주는 남편이라니 꽤 로맨틱하지 않은가? 측근 하녀들에게 말해 주면 좋아하며 말을 옮길 것이다.

글렌이 다시 한번 손짓하자, 뱃사공이 배를 호수 가장자리로 몰았다.

이름 모를 보라색 꽃은 순식간에 글렌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가 꽃을 나디아에게 내밀며 묻는다.

“가까이서 보니 어때?”

“이름을 모르는 게 아쉬울 만큼 예쁘네요. 그리고…….”

꿀꺽, 하고 그녀의 목울대가 넘어갔다. 꽃을 쥐고 있는 손의 주인에게 시선이 간 것이다.

얇은 여름옷을 입고, 단추를 몇 개 풀어낸 글렌의 모습은 꽤나 근사했다.

쏟아지는 여름의 햇빛 때문인가? 늘 보던 은발이 평소보다 반짝이고 있는 것 같았다.

목이 타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나디아는 괜히 다시 한번 더 침을 삼켜야 했다.

“지금 저한테 미남계 쓰고 있는 거예요?”

“미남계?”

“몰랐는데 보라색이 꽤 잘 받네요. 그 꽃, 제게 줄 게 아니라 당신이 가져야겠는데요?”

“글쎄……. 나는 평소와 같은 모습인데 그럼에도 내가 미남계를 쓰고 있다는 말을 한다는 건…….”

글렌이 살짝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 외양이 꽤 마음에 든다는 말로 해석해도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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