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7화
본성으로 귀환한 나디아는 두 가지 행사를 준비해야 했다.
첫째는 악마 전쟁과 아룬드에서 죽은 이들을 애도하는 추모식.
그리고 둘째는 영주의 무사 귀환을 축하하는 성대한 파티.
죽은 이에 대한 슬픔을 잊기 위해서라도 귀환 연회는 성대하게 열려야 한다.
커다란 규모의 파티를 준비하기 위해, 사용인들은 새벽부터 바쁘게 뛰어다니며 식재료를 옮겨야 했다.
그리고 똑같은 유니폼을 입은 채 뛰어다니는 사용인들 사이로 눈에 띄는 존재가 하나 있었다.
바로 실내복 위에 앞치마를 걸친 나디아였다.
“양고기, 야채, 돼지고기, 버섯, 닭고기 순서예요.”
“이, 렇게……?”
“네, 꼬치에 찔리지 않게 조심하세요.”
그녀가 하는 일은 바로 하녀들 틈에 끼여 함께 음식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왜냐?
‘그냥 해 보고 싶으니까.’
이 영지에서 그녀가 무엇을 하든 가로막을 이는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나디아는 매우 손쉽게 사용인들 틈에 자리 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깨달았다.
‘나는 손으로 하는 건 다 못 하는구나…….’
글렌에게 줬던 장식을 만들 때 진작 알아챘어야 했는데.
어쨌거나 하녀들의 도움을 받은 음식은 그럭저럭 식당에 올릴 만한 것이 되긴 했다.
식탁 위에 번드르르하게 차려진 모습을 보고 있다니 성취감 같은 게 느껴지기도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파티가 시작되자 나디아는 술과 함께 제가 만든 음식을 맛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오늘의 두 번째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는데, 그건 바로―
‘술이 많이 약해졌구나.’
겨우 한 잔을 비웠을 뿐인데도 온몸의 체온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졸음이 밀려오는 것이 술기운 때문인지, 새벽부터 음식 준비에 동참한 피로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마님, 이게 더 맛있…… 어? 주무세요?”
“으, 응?”
가까이 다가온 누군가의 목소리에 꾸벅꾸벅 졸던 나디아가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음식을 담은 접시와 함께 술잔이 들이밀어져 있다. 식기를 잡은 손의 주인은 다름 아닌 파비안이었다.
“파…… 비안 경?”
“아니,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취하셨네.”
파비안의 목소리에 주변의 이목이 그리로 쏠리기 시작했다.
이미 눈이 풀려 버린 나디아의 모습에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마님…… 혹시 시작하기 전에 혼자서 다른 파티 다녀오셨나요?”
“우리 계속 같이 있었거든요.”
“아니, 겨우 한 잔 비우셨는데 어떻게…….”
“하암…….”
나디아가 입을 가리고 하품을 했다. 눈꺼풀이 추를 매단 듯 무겁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기사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마님, 무리해서 자리를 지키실 필요는 없습니다.”
“음, 아무래도 먼저 들어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졸리면 들어가서 주무십시오.”
“그러는 게 좋겠어요.”
더 이상 술에 취했다간 가신들 앞에서 무슨 추태를 보일지 무서웠다.
그런데 나디아가 막 파비안의 부축을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였다.
그녀의 몸을 지탱해 주던 팔이 한순간에 떨어져 나가 버렸다.
‘어라?’
호위 기사의 부축에만 의존하고 있던 나디아는 바닥을 향해 휘청거릴 수밖에 없었다.
‘설마 파비안 경이 날 내팽개친 건가?’
하지만 곧장 누군가의 손길이 휘청거리는 그녀의 몸을 받아 준다.
나디아는 고개를 들어 그가 누군지 확인했다. 글렌이었다.
“파비안, 데려다주는 건 내가 하지.”
“아, 네…….”
파비안이 몹시 떨떠름한 얼굴로 떨어져 나갔다.
떫은 표정의 가신을 무시하며, 글렌이 나디아에게 물었다.
“걸을 수 있겠나?”
“당연하죠. 아까 휘청거린 건 기대고 있던 손이 갑자기 없어져서 그런 것뿐이에요.”
“이렇게 술에 약한 줄 알았더라면 권유하지 않았을 것을.”
“저도 오늘 처음 알았네요.”
두 사람이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며 왁자지껄한 식당을 빠져나왔다.
차가운 밤공기가 얼굴에 닿자 잠기운이 조금 달아나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니, 달아나 버렸다.
“…….”
이걸 어쩐다?
이제 와서 다시 파티장으로 되돌아가자고 하기는 민망하다. 결국 그녀는 하릴없이 가던 길을 그대로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막 성의 뒤뜰을 지나가고 있던 때였다.
“어?”
어디선가 새어나온 불빛에 그녀는 발걸음을 멈춰 세워야 했다.
“잊은 거라도 있나?”
“아니, 그게…….”
나디아가 멍한 얼굴로 뒤뜰 한편을 가리켰다.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는 장소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건 불빛이 아니라 달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꽃봉오리였다.
1년에 딱 하루만 핀다는 천년나무의 꽃봉오리.
‘벌써 저 꽃이 필 때가 됐구나.’
생각해 보니 딱 그 시기이긴 했다. 시간 한 번 참 빠르게 간다. 나디아가 감탄하며 입을 열었다.
“글렌, 잠시만 저거 보고 가요. 천년나무요. 벌써 꽃봉오리가 맺혔네.”
가까이 다가가니 유리 세공품 같은 꽃봉오리의 모습이 더욱 잘 보인다.
올해도 잊지 않고 꽃구경을 하러 나온다면 천년나무의 만개한 꽃을 보는 건 세 번째가 되는 셈이다.
“벌써 꽃봉오리가 맺히다니, 시간 참 빠르네요.”
“그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지.”
“올해도 구경나올 수 있다면 벌써 세 번째 보는 셈이에요.”
“……올해도?”
의아해하는 글렌의 목소리에 나디아가 그리로 시선을 옮겼다.
“저 매년 하녀들이랑 꽃 보러 왔는데요.”
“뭐?”
“기억 안 나세요? 그레이스 부인의 음모를 밝혀내던 날이 저 꽃이 피던 날이었잖아요. 꽃구경을 나간 것뿐인데 제가 성을 탈출하려 했다고 누명을 씌우려 했다고요.”
“아…….”
그제야 글렌의 입에서 작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고모의 배신과 아버지의 건강에 온 신경이 쏠린 나머지 자세한 건 잊어버린 듯했다.
그가 머쓱한 얼굴로 말을 잇는다.
“그 다음 해에도 봤을 줄은 몰랐다.”
“제 측근 하녀들이 졸랐거든요. 야밤에는 함부로 돌아다닐 수 없으니, 제 핑계를 대서 구경하고 싶었던 거겠죠. 천년나무의 꽃에 대고 소원을 빌면 사랑이 이뤄진다나?”
나디아는 그녀들이 귀엽다는 듯 작게 웃었다.
“그 애들은 제가 정말 후작님을 사랑하는 줄 알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하녀들과 함께 구경 나왔을 때 소원을 빌었나?”
그리 묻는 글렌의 표정은 어딘가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네, 빌었어요.”
“무, 무슨 소원을……? 나한테 한 고백은 거짓말이라면서.”
“제 복수가 성공하게 해 달라고 빌까, 했더니 사랑에 관련된 소원이 아니면 들어주지 않는다고 했어요. 그래서 당신의 행복을 빌어 줬어요.”
“내 행복?”
“언젠가 후작님의 사랑이 이뤄지길 바란다고요. 저와 이혼하고 나면 새로운 분과 결혼하실 거잖아요.”
그렇게 말하는 나디아의 얼굴은 어딘가 씁쓸했다.
대귀족 가문의 가주로서 후계가 필요할 테니 언젠가는 새로운 후작 부인이 들어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글렌도, 다른 가신들도 모두 그녀를 후작 부인이라 부르겠지.
잠시 침묵하던 나디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윈터펠에서 겪었던 일들은 평생 잊지 못할 거예요. 이건 빈말이 아니랍니다.”
“…….”
나름 감동을 주려 한 말인데 어째 반응이 없다.
믿지 않는 건가? 서운해진 나디아가 그의 표정을 힐끔 살피려 할 때였다.
글렌의 말이 이어졌다. 어딘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다.
“한데 그 소원 말이다.”
“예?”
“좀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은데.”
“……?”
“내 사랑이 이뤄지려면 이혼 못 해. 그대는 평생 이곳에서 살아야 해.”
“뭐라고요?”
“내가 사랑하는 여자와 행복을 이루려면 그대는 평생 나와 함께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시간이 소요됐다.
나디아는 술기운 때문에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필사적으로 굴려야 했다.
자신과 이혼을 하지 않으면 글렌은 평생 저와 부부로 지내야 한다.
‘그런데 그게 사랑이 이뤄지는 방법이라고?’
어.
어어?
어어어……?
나디아의 고개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옆으로 돌아갔다.
언제부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는지, 고개를 돌리자마자 그와 시선이 마주친다. 그렇게나 진중한 표정을 짓고 있는 글렌은 처음이었다.
아무리 연애 경험이 없는 그녀라지만 이 정도 신호를 못 알아들을 만큼 바보는 아니다.
“설마 지금…… 지금 저한테…….”
“그래, 그대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있는 거다.”
글렌은 언젠가 나디아에게서 들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아니, 대체 언제부터…….”
“아주 오래전부터 줄곧 그대를 마음에 품고 있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마음을 숨겨 왔던 것은…… 내 섣부른 선택이 상대를 불편하게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자신이 개선식에서 나디아의 고백을 불쾌하게 여겼던 것처럼, 혹시나 제 마음이 그녀를 불편하게 만들까 봐.
그렇게 두려운 일만큼은 절대 겪고 싶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그대가 웃는 모습만 보면 가슴이 뛰었다. 보기만 해도 행복했…….”
“자, 잠깐만요!”
이건 너무 직설적이지 않은가?
빙빙 돌려서 말하는 것을 싫어하는 그녀라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부끄러움에 치맛자락을 움켜쥘 수밖에 없었다.
그의 고백을 들으니 지금까지 조금 과하다고 생각했던 일화들이 하나씩 이해되는 듯했다.
‘역시 예전에 비취는 나를 빗대었던 것이 맞구나……. 그럼 그때의 일도, 또 그때 일까지…….’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렇게나 열렬히 구애의 신호를 보냈는데, 왜 지금까지 눈치채지 못했을까?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는 그녀를 대신하여, 글렌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제발, 그리 쉽게 이혼하자는 말을 입에 담지는 말아 줬으면 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