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6화
나디아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웬 낯선 천막 안에 누워 있었다.
“으으…….”
어쩌다가 이런 곳에서 눈을 뜨게 됐는지, 그 과정을 떠올리는 데에는 약간의 시간이 소요됐다.
‘아룬드에 구호 물품을 전해 주고자 직접 찾았고…… 거기서 글렌이 패퇴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아! 그 다음엔 갑자기 몬스터들이 쳐들어오는 바람에…….’
문득 정신을 잃기 직전에 글렌과 기사단의 모습을 보았던 게 떠올랐다. 아직 제가 살아 있는 걸 보면 그것이 환상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글렌이 어떻게 아룬드가 위험에 처했다는 걸 알게 됐는지도 몰라도, 지원군이 제때 도착한 것만은 천만다행이었다.
그가 조금만 늦었더라면 자신은 지금쯤 산 사람이 아니었으리라.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그녀의 머릿속에 문득 파비안의 얼굴이 떠올랐다.
막판엔 바리게이트고 뭐고 난전이 벌어졌던 터라, 다른 이들의 안위까지 확인할 여력이 없었다.
큰 부상을 입은 채 다시 전선에 투입되어야 했던 그의 모습을 떠올리니 덜컥 겁이 밀려왔다.
“아!”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 했던 나디아가 짧게 탄성을 내질렀다.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도로 침대 위에 누운 그녀의 귓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디아? 일어난 건가?”
다름 아닌 글렌의 것이었다.
옆을 보니 막 선잠에서 깨어난 듯 부스스한 얼굴의 글렌이 보인다. 침대맡 의자에 기대어 잠시 눈을 붙인 모양이었다.
나디아가 누운 채로 물었다.
“여기가…… 어디예요?”
“아룬드 성 근처의 공터에 막사를 쳤다. 본채 건물에서 부상자들을 돌보는 건 무리일 것 같더군.”
“그렇겠죠. 다 때려 부쉈으니까…….”
“그보다 몸은 괜찮은 건가?”
“큰 부상은 없는 것 같은데…… 근육통이 조금 심하네요. 일어나는 걸 조금 도와줄래요? 물이 마시고 싶어서요.”
그는 나디아를 부축해 그녀가 등받이 위에 몸을 기대도록 도와주었다.
그가 건네는 물잔을 들이켠 뒤, 나디아가 다급함이 묻어 나는 목소리로 물었다.
“다른 이들은 어떻게 됐어요? 참, 파비안 경은 무사한가요? 팔에 큰 부상을 입었을 텐데…….”
“파비안이라면 다행히도 목숨은 붙어 있다. 당분간 안정을 취해야겠지만.”
“다행이네요. 그럼 다른 기사들은요?”
“…….”
글렌의 표정에 먹구름이 끼는 순간이었다.
그녀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본성에서 데려온 기사들 중에선…… 세 명이 전사했다. 나머지는 크고 작은 부상을 입긴 했지만 무사해.”
“아…….”
차마 전사한 세 명의 이름을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한참 할 말을 고르던 나디아가 겨우 입을 열어 물었다.
“왜……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난 걸까요? 아직 그럴 시기가 아닌데…….”
분명 지난 생에도 같은 시기에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의 나디아는 그것이 북부가 알아서 처리할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신경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 당시 그녀는 아마 약혼자와 아버지의 수하들이 원정에서 무사히 돌아오길 기도하고 있었을 것이다.
만일 북부의 상황에도 좀 더 주의를 기울였다면 그들을 살릴 수 있었을까?
희생된 것은 평소 알고 지내던 본성의 기사들뿐만이 아니었다. 아룬드의 경비병들과, 평범한 마을 주민들까지 희생되어야 했다.
지난 생에, 조금만 더 외부에도 관심을 기울였더라면…….
그때, 글렌이 울상을 지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위로했다.
“악마족들의 대대적인 침공이 영향이 미쳤을 수도 있겠지. 그대가 미리 예상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 죄책감 갖지 마.”
“……그렇겠죠.”
살짝 맺힌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드는 그녀의 시야에 이상한 것이 포착됐다.
막 정신을 차렸을 때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저건 분명…….
“글렌, 설마 울었어요?”
“아니.”
대답은 곧장 돌아왔다. 너무 빨라서 이상할 만큼.
“눈가가 붉은데? 거기다 살짝 부어 있어요.”
“그럴 리가. 북부 사내는 쉽게 눈물을 보이지 않아.”
“그렇다면 오늘 그 어려운 모습을 보인 거군요.”
“정말 아니라니까.”
“사용인들을 시켜서 거울을 가져오라 할까요?”
“…….”
그가 입을 다문 채 시선을 피한다.
방금 전까지 깊게 가라앉았던 기분이 조금쯤 나아지는 것 같았다. 글렌 같은 남자를 놀려먹는 건 꽤나 즐거운 일이었으니까.
잠시간의 침묵 후, 글렌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주 조금.”
“그래요, 조금이라고 쳐요. 근데 왜 울었어요?”
“…….”
그가 민망하다는 듯 얼굴을 연신 쓸어내린다. 나디아는 방금 전보다 조금 더 즐거워졌다.
“그대가…… 혹시라도 깨어나지 않을까 봐.”
“크게 다친 곳도 없는데 무슨 그런 걱정을…….”
손사래를 치던 그녀가 이내 ‘아’ 하고 탄성을 내지르며 물었다.
“설마 제가 며칠 내내 기절해 있기라도 했어요?”
“그건……. 하, 하루 정도.”
“…….”
시선을 피하는 걸 보니 그 역시 제 호들갑이 민망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이틀을 꼬박 지새웠는데 그건 당연한 거죠. 그렇게 안 봤는데 호들갑이 심하시네.”
“호들갑 떠는 게 아니야. 안색이 얼마나 창백하던지…….”
“네, 네. 알겠어요. 사람이 살다 보면 좀 울 수도 있죠.”
나디아는 그를 놀리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눈가를 발갛게 물들인 사람을 놀려먹는 게 조금 미안했던 것이다.
막사 입구의 휘장이 걷히고 누군가가 들어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영주님, 누구와 대화를…… 어라, 깨어나셨네.”
빠르게 걸어 들어온 이는 다름 아닌 요한 경이었다.
글렌과 함께 원정을 떠났던 이들 중 하나라, 그를 다시 보는 것은 거의 1년만이었다.
나디아가 반색하며 인사했다.
“정말 오래간만이네요, 요한 경. 다시 보게 돼서 기뻐요.”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보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근육통이 심한 것 빼곤 괜찮아요. 얕은 상처뿐이니 차차 치료될 거예요.”
머릿속에 한 가지 의문이 불쑥 고개를 내민 것은 바로 그때였다.
나디아는 궁금증을 참지 않고 곧장 물었다.
“그런데 아룬드의 사정은 어떻게 안 건가요? 본성에 들렀다 오기에는 시간이 부족했을 텐데…….”
“아, 그건 말이죠. 그 녀석 덕분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리 말한 요한이 서둘러 왔던 길을 되돌아 막사 바깥으로 나갔다.
다시 돌아온 그의 손에는 자그마한 흑룡이 들려 있었다.
“이 녀석이 회군하고 있던 저희에게 아룬드의 소식을 알려 주더군요.”
“키륵.”
“노아가요? 본성으로 보냈는데 어떻게 알고 거기로 간 건지…….”
“아마 본성으로 서신이 도착했다면 시간에 맞추지 못했을 겁니다. 하늘을 날 줄 아는 녀석이니 저희 쪽에 도움을 청하는 게 더 낫다고 판단했겠죠.”
나디아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용에게 거기까지 판단할 지능이 있다는 건가요? 놀랍네요.”
“얘, 마님이 놀라워하시는 것 같으니 그건 네가 설명해.”
말 못 하는 해츨링에게 해명을 요구하다니.
노아를 툭툭 건드리며 그리 말하는 요한의 행동에 그녀가 살짝 웃음을 터트렸다.
“용이 어떻게 말로 설명을 해요? 농담도…….”
“이 녀석, 말 되게 잘하던데요.”
“응?”
나디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지금 무슨 말을…….”
“굉장히 유창하더군. 완벽한 공용어를 구사했어.”
가신의 주장을 거든 것은 다름 아닌 글렌이었다.
그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웬 검은 물체가 하늘에서 날아오더니, 급한 일이니 당장 아룬드로 가야 한다고 했을 때는 얼마나 놀랐던지…….”
“맞습니다. 저는 제가 꿈을 꾸고 있는 줄 알았어요.”
“…….”
둘씩이나 같은 주장을 하니 귀 기울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시선이 노아에게로 돌아갔다. 요한의 손에 달랑 들린 해츨링은 필사적으로 시선을 피하는 중이었다.
“……정말이니?”
“뀨우.”
“울음소리가 평소에 내던 것과 다른데?”
“키, 키이잇.”
“…….”
급히 정정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어쩐지 새까만 비늘로 감싸인 머리에 식은땀이 맺혀 있는 듯했다.
애써 딴청을 피우던 노아는 그새 작전을 바꿨는지, 요한의 손을 빠져나와 간이침대 위로 올라왔다.
“키륵.”
그러더니 비교적 하얀 배를 내보이며 꼬리를 살랑거리기 시작한다.
“이게 대체…….”
“그냥 봐달라는 것 같습니다, 마님.”
노아가 그 말을 긍정하기라도 하듯 나디아의 다리에 머리를 비비적거렸다.
그때, 요한이 웃으며 덧붙였다.
“발목에 편지도 있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말로 전했다는 건, 제 딴에는 엄청 급했다는 거겠죠.”
“뭐…… 그거 하나만큼은 이번에 빚을 졌군.”
“그냥 예쁘게 봐주십시오.”
“…….”
나디아의 시선이 여전히 배를 까뒤집고 있는 해츨링에게로 향했다.
호박 같은 눈동자가 반짝거리고 있다. 그 애교스러운 눈빛 앞에서, 그녀는 그만 픽 웃고 말았다.
나디아는 뿔이 돋아난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덕분에 살았어.”
* * *
동부 전역이 쑥대밭이 되긴 했으나 악마족 군대를 몰아낸 공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그런 상황인 만큼 더더욱 영웅을 만들어내야 했다.
이 전쟁에서 가장 화려한 전공을 세운 것이 누구인가?
“어서 오십시오, 지호 경.”
공작 저의 집사장이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인사했다.
대(大) 발라지트 가문의 가주를 지척에서 모신다는 이답게 프라이드가 높은 이였으니, 아무리 기사라 할지라도 이렇게까지 깍듯하게 구는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당연하다면 당연하기도 했다. 눈앞에 있는 이는 더 이상 주인이 후원하는 일개 기사가 아니었으니.
이 악마 전쟁의 가장 큰 수혜자가 있다면 바로 이지호일 것이다.
집사장이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가주님은 위층의 집무실에 계십니다. 참, 가주님께서 원정대의 무사 귀환을 축하하는 의미로 성대한 연회를 연다고 하셨는데 그 소식 들으셨습니까?”
“물론.”
“부디 참석하셔서 자리를 빛내 주십시오. 이번 전쟁의 첫째가는 영웅은 누가 뭐래도 지호 경 아니십니까?”
“…….”
추켜세워 주는 말에도 그의 표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수도로 돌아오는 길에서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말이었기 때문이다.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집사장은 눈치를 살피며 힐끗 곁눈질을 해야 했다.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이지호의 표정이 어두웠다. 집사장은 서둘러 그가 좋아할 만한 말을 꺼냈다.
“세인들이 최고의 기사는 이제 윈터펠 후작이 아니라 지호 경이라 한다더군요.”
“…….”
그러나 이지호의 표정은 점점 더 어두워지기만 했다. 집사장은 그제야 아차 하고 작게 혀를 찼다.
‘괜히 그자 얘기를 꺼냈구나.’
글렌과의 1:1 결투에서 패한 전적이 있는 그였다.
그런 이 앞에서 최강의 기사니 뭐니 하는 소리를 꺼냈으니 조롱으로 느껴지기만 할 것이다.
실수를 인정한 집사장은 조용히 입을 다무는 쪽을 택했다. 복도 안에 발걸음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그러나 집사장의 예상과는 달리, 이지호의 표정이 어두워진 이유는 따로 있었다.
‘왜 포로들을 구하러 가자느니 하는 헛소리를 하나 했더니…….’
처음엔 평생 온실 속에서 자라온 대귀족 특유의 위선이라고 생각했다.
후작가가 단독으로 추격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생각보다 훨씬 어리석은 자라고 비웃었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느낀 것은 그가 대패하여 겨우 목숨만 건졌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였다.
드디어 마무리되나 싶은 전쟁 끝에 전해진 패전 소식은 마른 들판에 불길이 번지듯 퍼져 나갔다.
그 어리석음과 무모함에 누가 경악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나 사람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았다.
어리석으면서도 무모한 선택이 어떤 마음에서 기원했는지.
모든 이들이 발을 뺄 때, 어느 가문만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길을 택했는지.
‘음흉한 자식.’
걸음을 옮기던 이지호가 결국 표정을 왈칵 일그러트렸다.
이번 전쟁에서 가장 화려한 공로를 세운 이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백 중 아흔은 자신을 가리킬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었다. 정작 사람들의 기억 속에 가장 인상 깊게 남아 있는 것은 다른 자일 테니.
그는 승리했으나 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