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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화 (114/142)

제114화

마족 군대를 추격했던 윈터펠 후작이 크게 패배하여 겨우 돌아왔다는 소식은 오래 지나지 않아 북부까지 들려오게 되었다.

소식을 전한 이는 급하게 이런 말을 덧붙였다.

“후작님께서는 큰 부상 없이 무탈하다고 합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마님.”

남편을 애타게 기다리던 후작 부인이 뒤로 넘어가는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나디아는 생각했다.

‘당연히 멀쩡하겠지. 애초에 제대로 붙을 생각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보는 눈이 많은 곳에서 속내를 드러낼 수는 없는 노릇이라, 그녀는 현기증이 도진 척 몸을 휘청거려야 했다.

가신들이 쓰려지려는 마님을 부축하며 한 마디씩 거들었다.

“아니, 아무리 포로들을 구하기 위해서라지만 어떻게 단독으로…….”

“어쩜 그리 무모한 행동을 하셨답니까? 살아남으신 게 천운입니다!”

“마님, 영주님께서 돌아오시거든 제발 단단히 한 소리 해 주십시오. 이번엔 운이 좋아 살아남으셨다지만 다음번에도 그러리라는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홀 안은 순식간에 가신들의 아우성으로 가득 차 버렸다.

그 심정이 이해는 된다. 만일 글렌이 자신과 합의 없이 이런 일을 저질렀다면 누구보다 그녀가 먼저 뒤로 넘어갔을 것이다.

‘미안. 전부 다 내가 시킨 일이란다.’

잔뜩 흥분한 주변 분위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나디아가 입을 열었다.

“후작님이 참 무모한 행동을 하셨구나.”

“마님께서 이야기하시면 분명 그분도 귀를 기울이실…….”

“하지만 의로운 행동이야.”

“…….”

“왕의 봉신이자 명예로운 기사라면 마땅히 행해야 했을 일이지. 나는 그분의 무모함을 탓하는 것보다, 자부심을 가지는 게 먼저 아닐까 해. 포로들을 구하고자 뛰어든 유일한 이가 우리 영주님이라는 뜻이잖나.”

“…….”

흥분한 가신들의 입이 딱 다물리는 순간이었다.

처음엔 영주님의 전사 소식을 전해 들었을지도 모른단 생각에 흥분해 길길이 날뛰었는데, 마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그랬다.

‘벨락서스 주민들을 외면하는 것은 기사도에 맞지 않은 행동이야.’

‘그 많고 많은 봉신들 중, 후작님을 제하면 아무도 포로들을 구하자고 목소리 높인 이가 없었단 말인가?’

달리 생각하면 도리어 자부심을 느껴야 할 일이었다.

단독으로 적군을 뒤쫓은 것이 어리석은 판단일 수는 있다. 누군가는 필히 글렌의 어리석음을 비웃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새겨질 것이다.

모두가 사익 앞에서 포로들을 구하려 하지 않을 때, 그들을 구하고자 불구덩이로 뛰어든 게 누구인지.

순식간에 조용해진 좌중을 둘러보며, 나디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한 번 이기고 지는 것은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야. 한 번의 승패보다 중요한 것은 고결한 신념을 지키는 일이지.”

“…….”

“글렌은 선택의 갈림길에서 보다 중요한 것을 택했을 뿐이야. 그러니 글렌이 돌아온다면 무모함을 원망하는 대신, 그런 분을 영주로 모시고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도록.”

몇몇 가신들이 부끄러운 듯 고개를 푹 숙였다.

영주님의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원망을 쏟아 낸 것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듯했다.

숙연해진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해, 나디아가 손뼉을 짝 치며 말했다.

“어쨌거나 이제 전쟁도 끝났구나.”

“우리 왕국군이 잘 막아 내어서 다행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에 충실해야지.”

그녀가 몸을 일으켜 바깥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나서니 곡물 포대가 수레에서 내려지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조심, 조심해서 내려!”

“어, 어? 쓰러진다!”

지금 나디아가 와 있는 장소는 영지의 동쪽 외곽에 위치한 자그마한 성이었다.

척박한 북동쪽에 치우쳐 있는 곳이라 농경지가 적고, 그나마도 비옥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매년 봄철이면 연례행사라는 듯 춘궁기가 찾아왔는데, 오늘 나디아가 이런 오지까지 찾아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구호 물품을 전하고 영지민들을 다독이기 위하여.

성주 역할을 맡고 있는 기사, 유클리드가 말했다.

“마님 덕분에 올해는 굶어 죽는 이들이 없을 수도 있겠습니다.”

“없을 수도 있겠습니다, 가 아니라 없게 만들 거예요.”

“그거 참 믿음직스럽군요. 마님께서 말하신 것 중에 이뤄지지 않은 것은 없었으니 말입니다.”

예컨대 글렌이 돌아오기 전까지 창고의 규모를 두 배로 늘리겠다고 했던 것이라든가.

“곡물 중 일부는 마을 사람들에게 공급하고, 남은 것은 잘 보관해 두도록. 나는 그동안 치료소를 다녀오지.”

“예, 후작 부인.”

끙끙 앓고 있는 환자들에게 약을 공급해 주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마을의 치료소로 향하려는 그녀의 발길을 누군가의 다급한 목소리가 막아섰다.

“마님, 큰일 났습니다! 마님!”

“응?”

고개를 돌리니 붉은 깃발을 매단 남자가 허겁지겁 뛰어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글렌이 패퇴했다는 소식은 이미 전해졌는데…….’

이동 중 사고가 일어날 것을 염려해 전령을 두세 명씩 보내곤 하는데, 아마 함께 출발한 전령들 중 한 명이 아닐까 싶었다.

“영주님에 대한 소식이라면 이미 들었다만.”

“그, 그게 아닙니다! 몬스터 떼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뭐?!”

나디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몬스터 떼가 왜 갑자기…….”

“게이트가 열린 듯합니다.”

몬스터 웨이브는 대략 5~7년을 주기로 일어나는 자연재해다. 재작년에 한 번 소탕했으니 글렌이 돌아올 때까지는 무사할 거라고 생각했건만.

‘이번 전쟁의 영향인가? 아니, 지금 원인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아.’

그녀가 마주한 문제는 생존과 영지민들의 보호였다. 나디아는 서둘러 정신을 차리곤 말을 이었다.

“수는 얼마나 되지?”

“약 5백 마리 정도로 추산됩니다.”

“5백…….”

머리가 아득해지는 순간이었다.

몬스터 5백 마리. 기사단과 정예병이 있을 때라면 모를까, 이 자그마한 성에서 5백이나 되는 몬스터의 습격을 견뎌내는 건 무리였다.

경비병들과 마을 남자들을 전부 긁어모아도 백 명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와서 도망친다고 해도 몬스터들을 따돌리는 건 불가능해.’

그렇다면 답은 한 가지뿐이다.

나디아가 몸을 돌리며 외쳤다.

“빈센트 경!”

“예!”

그는 남은 기사들 중 가장 뛰어난 기수였다.

“성이 완전히 포위되기 직전에 빠져나가세요. 본성으로 가서 지원군을 요청해요.”

빈센트는 짧게 대답한 뒤, 거의 구르듯이 어딘가로 뛰어갔다. 아마 마구간으로 향한 것이리라.

이제 그가 성공적으로 지원군을 불러오기까지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버티는 수밖에.

머릿속으로 본성까지의 거리를 가늠하며, 나디아가 입술을 짓씹었다.

‘만일 지원군이 제때 도착하지 않는다면…… 아냐. 그런 생각 하지 말자. 지금은 방어하는 데만 집중해야 해.’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허술하지만 돌로 쌓은 성벽이 있고, 몬스터들에겐 효율적인 공성 계책이 무엇인지 생각할 지능이 없다는 것이다.

“유클리드 경, 종을 울려요. 성 바깥에 있는 영지민들을 모두 안으로 불러 모은 뒤에 성문을 단단히 막으세요.”

“예.”

그나마 구호 물품을 가져온 덕에 식량과 약품이 넉넉한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나디아가 걸음을 옮기며 명령을 이어 나갔다.

“싸울 수 있는 남자들은 따로 모아서 무구를 나눠 줘요.”

“마님, 이곳은 본성이 아닙니다. 나뭇가지 정도라면 하나씩 쥐여 줄 수도 있겠습니다만.”

“하, 걱정했던 대로네요. 그럼 급한 대로 농기구나 부지깽이라도 들도록 해요. 여자와 아이들에겐 목창을 만들거나 기름을 끓이는 일을 시키고요. 아 참, 성벽 앞에 흙을 쌓고 던질 만한 돌을 모아요!”

“별채의 벽을 허물어도 되겠습니까?”

바깥에서 물자를 가져올 시간이 없으니 벽돌이라도 던지겠다는 뜻이었다.

나디아는 흔쾌히 허락했다. 일단 살아남는 게 먼저 아닌가?

“허락하죠. 무기가 될 수 있는 거라면 얼마나 값어치 있는 것이든 간에 다 이용하도록 하세요.”

말을 끝낸 나디아는 곧장 망루 위로 뛰어 올라갔다. 상황을 제 눈으로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성 바깥에 있던 영지민들이 허둥지둥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들 너머의 저 지평선에, 뿌연 먼지가 피어오르고 있다.

“…….”

가슴이 선득해지는 광경이었다. 나디아는 저도 모르게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말았다.

* * *

망루에서 내려오니 내성 안으로 영지민들이 밀려들고 있었다.

울음소리와 비명 소리가 어우러진 광장은 그야말로 혼돈의 도가니였다.

본성에서 데려온 기사들이 사람들을 다독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일사분란하게 대응해도 모자랄 판에 이래서야 성을 내어 주고 만다.

나디아가 보좌관을 향해 명령했다.

“조금만 버티면 본성에서 지원군이 온다는 걸 알려라. 희망이 있다는 걸 인지하면 다들 차분히 명령에 따를 거다.”

“예!”

그건 영지민들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지만, 나디아 자신을 향한 위로이기도 했다.

‘이틀, 아니, 사흘만 버티면 돼. 성벽도 끼고 있고, 소수지만 기사들도 데려왔잖아. 다 함께 힘을 합치면 시간을 끄는 것 정도는…….’

그런데 그때였다.

혼란스러운 광장을 둘러보던 도중, 여기 있어서는 안 되는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바로 본성으로 보냈던 빈센트였다.

당연하게도 나디아는 뒤로 넘어갈 듯 놀랐다.

“빈센트 경, 왜 여기 있어요? 설마 아직 출발하지 않은 건가요? 한시가 급한 상황인데……!”

가까이 다가온 그가 속삭이듯 보고했다.

“이미 포위되었습니다. 저 한 몸이 죽는 것은 두렵지 않으나, 본성으로 지원 요청이 전해지지 못했다는 것을 마님께 알려야 할 것 같아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

그 순간 나디아가 몸을 휘청거리지 않은 것은 오로지 동요하는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는 일념 덕분이었다.

가장 윗사람인 제가 패닉에 빠지는 모습을 보였다간 혼란이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가리라.

그녀가 오기로 꼿꼿이 선 채 생각했다.

‘지원군이 없이 5백이나 되는 몬스터 무리를 물리칠 수 있을 리가 없어. 고작해야 버티는 게 한계야. 이들 대부분은 일반 농민인걸.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그럴듯한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리 신묘한 계책이라도 어느 정도 전투력이 뒷받침되어줄 때 빛을 발하는 법이다.

‘정말 여기서 끝나는 건…….’

숫제 그런 생각마저 들 때였다. 무언가가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감각에 나디아는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키르륵.”

“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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