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3화 (113/142)

제113화

바벨 2세 14년, 2월.

악마 전쟁 발발.

바벨 2세 15년, 3월.

1년이란 시간을 끌었던 전쟁이 끝을 보다.

* * *

전쟁 발발로부터 1년이 흐른 후, 동부의 중심 도시 벨락서스.

한때 동부 지역에서 가장 번성한 도시였던 그곳은 악마족 군대의 주둔지로 전락한 지 오래였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만한 점은, 그것이 그들의 마지막 점령지라는 것?

그러니까 벨락서스를 탈환하기만 한다면 이 전쟁이 끝난다는 뜻이었다.

동부 각지에 흩어져 있었던 국왕의 봉신들은 벨락서스로 향하는 길목에서 합류하여 함께 진격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한데 모인 그들을 맞이한 것은,

“성 안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것 같소만?”

악마족이 아니라 이미 불타 버린 성의 모습이었다.

* * *

벨락서스로 무혈 입성한 영주들은 지옥이 되어 버린 도시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모든 게 불타 있었다. 성 내부뿐만이 아니라 외부의 농경지, 그리고 마을까지 전부. 살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성 안을 둘러보고 온 지스카르가 짧게 보고했다.

“시체가 보이지 않습니다. 아니, 일부 보이긴 하지만 이곳의 인구수를 생각해 보면 턱없이 적습니다.”

“그 말인즉 전부 포로로 끌고 갔다는 말이군.”

“그렇겠지요. 패색이 짙어지니 모두 파괴하고 떠난 모양입니다.”

“이…… 빌어먹을 놈들.”

황량해진 성 내부의 모습에서 도무지 눈길이 떼어지지 않았다.

비록 자신이 통치하던 성은 아니라지만, 다른 종족에 의해 인간의 문명이 도륙된 것이다.

조금만 일이 틀어졌더라면 북부 역시 이런 꼴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다른 영주들 역시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무혈 입성했다는 기쁨보다는 공포와 분노가 공기를 짓누르고 있었다.

하지만 충격적인 광경과는 별개로, 그들은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정해야 했다.

마지막 결전을 벌이러 왔는데 적이 이미 내빼고 없다니. 그 자리에서 임시 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가장 먼저 발언을 한 것은 다름 아닌 글렌이었다.

“다수의 포로를 끌고 갔으니 멀리 가지는 못했을 거다. 당장 뒤쫓아야 해.”

벨락서스의 본래 인구수를 고려해 볼 때, 못해도 수백, 많으면 수천 명의 인간이 붙잡혀 갔으리라.

이 자리에 모인 이들 중 마족들이 인간 포로를 어떻게 다루는지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을 구하지 않는다는 건 포로 전원의 죽음을 방관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놈들이 사막 지대로 건너가면 늦어 버린다. 글렌이 재차 다른 봉신들을 재촉했다.

“라파예트 자작의 첨병이 성의 불길을 발견한 게 나흘 전이었으니 한시가 급하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

“…….”

그러나 그의 말에 적극적으로 호응해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일부가 글렌에게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대다수는 입을 다문 채 딴청을 피울 뿐이었다.

글렌이 몹시 당황한 얼굴로 재차 입을 열어야 했다.

“왜 다들 말이 없는 건가?”

“후작님, 우리의 임무는 왕국의 국토를 수호하는 것이었습니다.”

덤덤하게 대답하는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이지호였다. 글렌의 시선이 그리로 향했다.

“그게 무슨 뜻이지?”

“벨락서스를 되찾은 시점에서 왕국군의 임무는 끝난 것이지요. 무혈입성이라니 잘됐군요.”

“……제정신으로 하는 말인가? 왕국의 국민들이 괴물들의 포로가 되었다. 마족들이 인간 포로를 어떻게 대하는지 모른다고 하진 않겠지. 그걸 알면서도 두고만 보라고?”

“우리가 적군을 쫓아간다고 해서 그들이 순순히 포로를 내어놓는답니까? 필히 전투가 벌어질 테고 그 과정에서 또 희생자가 생기겠지요. 병사들 역시 우리 왕국의 국민들이 아닙니까? 싸움을 피하는 것 또한 목숨을 구하는 방법입니다.”

“지금 대체 무슨 말을…….”

“조심스럽지만 나 역시 지호 경의 의견에 동의하오.”

라파예트 자작 역시 이지호의 손을 들어주었다. 전혀 조심스럽지 않은 목소리였다.

그가 모여 있는 봉신들을 향해 말했다.

“우리들은 각자 다른 전장에서 싸우다가 합류한 지 얼마 되지 않았소. 서로 호흡이 맞기나 할지 의문이군. 그런 상황에서 저 무지막지한 놈들을 상대로 승률이 얼마나 될지…….”

“목숨을 구하려다가 목숨을 잃기만 할 수도 있지요. 병사들 역시 우리가 지켜야 하는 목숨 아닙니까?”

“…….”

글렌의 표정이 천천히 굳었다. 마음이 급하다 보니 표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 벨락서스 주민들의 목숨을 포기하자는 말인가?”

“어허, 말을 조심히 하시오! 마치 우리를 악역으로 몰고 싶어 하는 것 같구려.”

“후작님, 저희는 다만 구할 수 있는 목숨을 먼저 구하자는 것입니다. 아, 그래. 아직 이 성에도 살아 있는 이들이 남아 있을 수도 있지요. 가까이 있는 사람부터 구하는 게 효율적이지 않겠습니까?”

“그 말이 옳소. 성에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이들을 구하는 게 먼저지.”

“…….”

글렌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 말하는 속내가 뻔히 보였던 것이다.

‘굳이 더 손해를 보고 싶진 않다는 것이겠지.’

침략군이 물러난다고 해서 평화가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일시적으로 손을 잡았을 뿐, 그들은 본래 사사건건 으르렁대는 사이 아니었던가?

머지않은 미래에 서로가 서로에게 칼을 겨눠야 할 수도 있는 판이니, 병력을 잃을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싶지 않은 것이리라.

“그러니까 포기할 목숨은 포기하자는 거군.”

“안타깝지만 이성적으로 판단을 내려야지요.”

“도대체…… 사람의 목숨을 포기하자는 말을 어찌 그리 쉽게…….”

“정 탐탁지 않으시면 후작님께서 먼저 선봉대로 출발하시지요. 저희는 조금 정리를 한 후에 곧 뒤따라가겠습니다.”

“맞습니다. 추격을 주장하시는 분께서 먼저 모범을 보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

이죽거리는 얼굴에 주먹을 날리지 않기 위해 그는 평생 사용할 인내심을 전부 끌어 써야 했다.

저들 중 제때 뒤따라올 이가 아무도 없다는 데에, 글렌은 대대로 내려오는 가주의 검도 걸 수 있었다.

‘아니, 뒤늦게야 신경 쓰는 척 쫓아와서 명분을 챙기는 척은 하겠군. 우리가 전멸한 후에서야 말이지.’

두통이 이는 이유가 분노 때문인지 역겨움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노여움으로 굳어 버린 그를 뒤로한 채, 다른 봉신들이 먼저 발길을 돌렸다.

“자, 자. 그럼 저희는 이쯤에서 정리된 얘기로 알고 가 보겠습니다. 다들 어서 수색조를 꾸려서 생존자나 찾아봅시다.”

“성에 식량이 남아 있으려나? 일단 병사들을 좀 쉬게 하는 게 먼저인 듯싶은데.”

“그럴 리가 없지. 들고 갈 수 없는 거라면 뭐든 태웠을걸.”

글렌은 가만히 선 채 그들이 떠나가는 모습을 바라보기만 해야 했다.

포로들을 구하러 가야 한다는 데에 동조하는 이도 일부 있었지만, ‘일부’라는 게 문제였다. 남은 이들만의 병력으로는 계란으로 바위 치는 꼴이 되리라.

이름도 모르는 포로들보다는 제 병사들이 더욱 중요한 법이다. 결국 모두가 뿔뿔이 흩어지고 회의는 파하게 되었다.

글렌이 절망스러운 표정을 쓸어내리고 있던 그때, 지스카르가 조심스레 다가와 입을 열었다.

“영주님, 어쩔 수 없습니다. 이만 들어가시지요.”

“……예상하긴 했지만 정말…… 대단하군. 한 데 모이자마자 이런 일이 생기다니.”

이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길 간절히 바랐건만, 이왕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이 구역질나는 상황을 최대한 이용하는 수밖에.

“영주님, 이만 막사로 돌아가셔서 휴식을…….”

“지스카르 경, 곧장 추격할 준비를 하게.”

“……예?”

지스카르의 입이 떡 벌어지는 순간이었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글렌을 목소리를 들은 가신들의 눈이 전부 휘둥그레져 있었다.

“쪼, 쫓아가시겠다고요? 단독으로?”

“그래.”

“안 됩니다! 분한 마음은 알겠지만 그건 안 됩니다. 제 발로 저승길에 걸어가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단 내 말을 들어 보게.”

그가 손짓을 해서 가신들을 가까이 다가오게 했다.

“쫓아가는 척만 하고, 적과 가벼운 교전을 한 뒤 그냥 돌아올 생각이다. 그 후엔 우리가 패잔병 꼴로 돌아왔다는 소문을 퍼트려라. 겨우 목숨만 건져서 돌아온 척하는 거지.”

“……!”

지스카르의 입이 조금 전보다 더욱 벌어졌다. 하지만 충격적인 것과는 별개로, 그는 곧장 주군이 뜻하는 바를 이해할 수 있었다.

윈터펠은 모두가 사익을 앞세워 귀족의 의무를 저버릴 때, 유일하게 사람의 목숨을 우선시한 가문이 되는 것이다.

물론 그 의도를 단번에 이해하지 못한 이도 존재하긴 했다.

“그러니까 지금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겁니까? 무슨 일인데 다들 말을 안…… 읍! 으읍!”

잠시 일었던 소란이 곧장 조용해진다.

겨우 정신을 차린 가신들이 입을 열었다.

“좋은…… 의견이긴 합니다. 차후 윈터펠의 큰 자산이 되겠군요. 하지만 그전에 영지로 전령을 보내 이 소식을 알리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맞습니다. 마님께서 우리가 단독으로 마족 군대를 뒤쫓았다는 걸 안다면 아마 기절하실지도 모릅니다.”

“그건 걱정 마라. 그럴 일 없으니.”

“그럴 일이 없긴요! 마님이 얼마나 영주님을 사랑하시는데 제 발로 불구덩이에 걸어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으면 밤낮으로 대성통곡을…….”

“그게 아니라, 이미 알고 있다는 거다.”

“……예?”

“나디아도 이미 알고 있다고. 그러니까 굳이 알릴 필요 없어.”

그에게 이런 결정을 권한 것이 나디아 본인이었으니 말이다.

“지금까지의 기록을 살펴보면, 악마족 군대는 불리하다 싶으면 뭐든지 파괴하고 철군해요. 가져가지 못하는 건 전부 부수고, 살아 있는 것들은 포로로 끌고 가죠.”

“다 함께 추격하여 포로들을 구하자고 의견이 모아질 리가 없단 말이죠? 그럼 그런 상황이 왔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독으로 쫓아가는 거예요. 아니, 쫓아가는 척만 하는 거예요.”

“그건 천금으로도 살 수 없는 윈터펠의 재산이 될 테니까요.”

윈터펠이 홀로 마족 군대를 뒤쫓았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면, 나디아는 그 자리에 쓰러져서 오열하는 대신 방으로 돌아가 쾌재를 부를 것이다.

그러니 그녀에 대해서는 걱정할 것이 없었다.

글렌이 재차 입을 열어 말했다.

“알아들었으면 어서 추격할 준비를 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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