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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화 (112/142)

제112화

나디아가 여태껏 열심히 돈을 벌어들인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윈터펠이 악마족과의 전쟁에서 발을 빼는 불상사를 막기 위함이었다.

재정적인 이유로 지원하지 못했던 과거에서, 윈터펠은 무형적인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잃어야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정작 출전을 한다니 기분이 싱숭생숭한 건 어째서인지.

“으으음…….”

나디아가 집무실의 창밖을 내다보며 낮은 신음을 흘렸다. 오늘따라 유독 장부의 숫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 기분이다.

‘왜 이러지?’

만에 하나라도 글렌이 심각한 부상을 입는다면, 앞으로의 계획이 망가져 버리기 때문에?

지금까지 했던 노력이 모두 물거품이 될 수도 있으니까?

한참 고민하던 그녀는 비로소 깨달았다.

‘너무 정이 들어 버렸어…….’

글렌은 자신의 개입으로 인해 원래라면 치르지 않았을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만일 그가 심한 부상을 입거나, 만에 하나 목숨을 잃기라도 한다면…… 상상하기조차 싫었다.

나디아가 혼자서 끙끙거리며 창가를 서성이고 있을 때였다. 보다 못한 하녀들이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

“왜 그러세요, 마님? 불편한 점이라도 있으신가요?”

“그야 출정이 코앞이니 걱정이 되어서 그러지.”

“어머, 괜한 걱정을……. 나약한 남부 사내들이라면 모를까, 우리 기사단은 몇 해에 한 번씩은 몬스터 떼를 상대하는걸요.”

“그러니 걱정하실 필요 없답니다. 영주님은 물론이고, 기사분들까지 몸 성히 돌아오실 거예요.”

“사람은 쉽게 죽어. 아무리 훈련받은 몸이래도 눈먼 화살 하나에 죽는 게 사람 목숨이잖니?”

그리 말한 나디아의 입에서 다시 깊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지켜보는 이들이 절로 눈치를 볼 만큼 깊고 깊은 한숨이었다.

하녀들은 눈동자를 도록 굴리며 무언의 대화를 나눠야 했다.

‘이 바보, 그걸 위로라고 해? 마님이 영주님을 얼마나 사랑하시는데 그걸로 위로가 되겠어?’

‘그, 그럼 뭐라고 말해?’

‘원래 마음이 복잡할 때는 단순한 일을 해야지.’

리사가 큼큼 목소리를 가다듬곤 입을 열었다.

“마님, 정 그러시면 행운의 징표라도 만들어 보시는 건 어때요?”

“……내일이 출정인데?”

“시간이 없으니 검집에 매다는 술실 정도가 괜찮겠네요. 두꺼운 실로 매듭을 만드는 건데 하루면 충분해요.”

“하지만…… 내 손재주가 어떤지는 다들 잘 알고 있잖아.”

“괜찮아요. 원래 이런 건 정성이 중요한 거니까.”

고민 끝에 나디아는 하녀들과 둘러앉아 장식을 만들기로 했다. 어차피 일도 손에 잡히지 않는 차였다.

“이거를 이쪽으로…… 네, 거기서 매듭을 지으시고요. 나비 모양으로 만드시면 돼요.”

“이렇게?”

“네, 그렇게요. 어때요, 마님? 하실 만하죠?”

“사람들이 왜 미신에 의존하는지 알겠어. 마음이 좀 편해지는 것 같네.”

이런 물건은 만들 때 만드는 이의 염원을 담아야 효과가 있다고 했다. 믿거나 말거나 하는 미신이었으나 나디아의 표정은 진지했다.

부디 무사히 돌아와 주길.

장식의 매듭 하나하나에 그녀의 소망이 알알이 담겼다.

“자, 이제 완성이에요. 휘리릭 만든 것치곤 그럴듯하죠?”

하녀들이 말했던 대로 결과물은 금방 나왔다. 물론 결과물의 완성도는 별개의 문제다.

어린아이가 장난삼아 만든 듯 얼기설기 어설픈 장식품. 이걸 선물이랍시고 글렌 앞에 내밀기 민망해질 정도였다.

“…….”

나디아는 제 손에 들린 것과 리사의 손에 들린 장식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제작법을 보여 주겠다고 견본품으로 대강 만든 것인데, 어째 제 것보다 훨씬 훌륭해 보인다.

“리사.”

“네, 마님.”

“미안한데 네가 만든 그 술실 말이야, 달리 줄 사람이 있어?”

리사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물론 없죠. 만드는 법을 알려 드리려고 만든 거였는데요.”

“잘됐네. 그럼 차라리 그걸 글렌에게 주는 게…….”

“네? 안 돼요! 이런 건 정성이 무엇보다 중요한 건데! 만든 이의 소원이 담기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구요!”

“그래도 이런 게 영주의 검에 달려 있으면 영주의 위신이 깎이지 않겠니?”

“감히 마님의 작품을 손가락질하는 자가 있을 리가요.”

나디아가 시무룩한 태도를 보이자, 다른 하녀들까지 나서서 그녀의 솜씨를 추켜올리기 시작했다.

“괜찮아요. 처음 만드신 것치곤 아주 훌륭한걸요.”

“맞아요. 게다가 원래 이런 건 살짝 어설프게 만들어야 하는 법이에요. 너무 반듯하면 하녀들에게 시켰다고 오해받을 수도 있거든요.”

“으음, 그래?”

계속되는 하녀들의 칭찬에 나디아는 조금 자신감을 되찾았다.

‘그래, 설마 정성껏 직접 만든 물건을 거절하겠어? 그렇게 경우가 없는 사람도 아니고.’

하지만 부풀어 오른 자신감은 채 하루도 가지 못했다.

출정 당일, 일찍 일어난 글렌을 찾아가긴 했는데, 어째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제 앞에 서서 우물쭈물하는 나디아를 보며, 글렌이 의아한 듯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일이지? 안 좋은 일이라도 있나?”

“그게…….”

나디아가 등 뒤로 숨겼던 손을 슬쩍 내밀었다. 받는 이의 망토 색과 맞추어, 푸른 실로 엮은 장식이었다.

어설픈 술실의 모양새에 그녀의 얼굴이 새삼 붉어졌다. 근사한 상자에 담아서 전하기라도 할 것을.

“이거, 전장에 나가는 사람에게 직접 만든 장식을 주면 행운이 깃든다고…….”

“…….”

“좀 못생겼지만 그래도 받아 주세요. 바깥에 내걸기 민망하시면 짐 속에 숨겨 두셔도 되고요. 다 미신이라지만…… 그래도 기분상의 문제잖아요?”

“설마 직접 만든 건가?”

“물론이죠. 모양새를 봐요. 이런 손재주로 어떻게 영주성의 사용인이 되겠어요?”

“아니, 아니. 그런 뜻이 아니었다. 다만…… 그러잖아도 바쁠 텐데 괜히 신경 쓰게 한 건 아닐까 해서…….”

“왠지 어제부터 일이 손에 안 잡혔거든요. 집중도 안 되는데 앉아 있기만 하느니 다른 일을 하는 게 낫죠. 그보다 안 받아 주실 거예요?”

“그럴 리가.”

글렌이 조심스레 양손으로 장식을 건네받았다.

장식의 완성도에 비해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손길이라서, 지켜보는 나디아가 조금 부끄러워질 정도였다.

한참 동안 선물을 들여다보던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나를 걱정해 준 거라고 제멋대로 해석해도 되나?”

“당연히 그런 뜻이죠. 아는 사람이 전장에 나선다니 걱정되는 건 당연하잖아요.”

그러고는 장식을 쥐고 있는 그의 양손을 꼭 붙잡았다.

“꼭 몸 건강하게 돌아와요.”

“…….”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얼굴이 그리도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글렌은 저도 모르게 그녀의 어깨를 끌어당겨 품안에 안았다.

“글렌?”

“잠시만.”

나디아는 조금 놀란 것 같은 눈치였지만 그를 밀어내진 않았다. 아마 친애의 표시라고 생각하는 듯싶었다.

“반드시 생채기 하나 없이 돌아오겠다고 약속하지.”

“그 말 꼭 지키세요.”

마음 같아선 한참 동안 끌어안고 싶었으나 안 될 말이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한 채 몸을 떨어트리는 그의 시야에 문득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바로 회랑의 기둥 뒤에 비쭉 튀어나와 있는 검은 물체였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물체’는 아니었다.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도마뱀?’

황금색 눈동자가 탐탁지 않은 듯 그를 빤히 노려보고 있다. 바닥을 탁탁 내려치는 꼬리가 불편한 심기를 보여 주는 듯하다.

저 망할 파충류가 또 무슨 방해를 하려고…….

왜 분위기가 좋을 때마다 끼어들지 못해 안달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경계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노아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를 떠나 버렸다.

작은 날개를 파닥거리는 뒷모습이 점차 멀어진다.

글렌은 깜짝 놀란 눈으로 점점 작아지는 뒷모습을 바라보아야 했다.

‘……웬일이지?’

사사건건 방해하지 못해 안달인 녀석이 웬일로 자리를 떠나 줬는지 모를 일이었다.

글렌이 깜짝 놀란 얼굴로 노아가 있던 자리를 응시하자, 나디아가 의아한 듯 고개를 들었다.

“왜 그래요? 뒤에 누구 있어요?”

“아니, 잘못 본 모양이군.”

새끼 용의 뚱한 표정을 떠올린 그가 픽 실소를 흘리고 말았다. 어쩌면 녀석과 조만간 화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디아가 의미 모를 웃음을 흘리는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이만 돌아가요. 지금쯤 다들 영주님을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 * *

사방에서 찬바람이 몰아닥쳤다. 마치 살이 에이는 것만 같다. 북부의 겨울은 그만큼 혹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군 속도를 늦추는 일은 없었다. 한시가 급한 상황인 것이다.

‘마물 따위가 인간의 영토를 짓밟게 둘 수는 없지.’

아드리안이 겉옷을 더욱 여미며 고개를 빼들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불만을 토로하는 이 하나 없이 꿋꿋하게 버티고 있다.

‘역시나.’

북부인으로서의 자부심이 느껴지는 장면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아드리안이 문제의 장면을 발견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말을 몰고 있는 글렌이 자꾸만 아래쪽을 힐끔거리고 있는 모습을 말이다.

왜 저러시지? 아드리안은 걱정 반, 그리고 궁금증 반이 섞인 심정으로 주군에게 다가갔다.

“영주님, 불편하신 점이라도 있으십니까?”

그는 지척까지 다가간 후에서야 글렌이 계속 힐끔거리고 있던 게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건 바로 검집에 매달린 장식이었다. 푸른 실로 얼기설기 매듭지은 장식.

명검에 매달려 있기엔 지나치게 조잡한 물건이다. 글렌의 눈에도 볼품없으니 자꾸만 힐끔거리고 있었던 것이리라.

당최 어떤 놈이 저따위 하등품을 영주의 검에 매달 생각을 했는지. 아드리안의 목소리가 단번에 높아졌다.

“아니, 저 파란 실타래는 대체 뭡니까? 누가 저런 물건을 영주님께 드렸단 말입니까? 어서 떼어 버리십쇼. 대영주 체면이…….”

“나디아가 만들어 준 물건이다.”

“역시 예사롭지 않다 싶더니 마님의 작품이었군요. 자유분방한 매듭이 참 예술적입니다. 이런 예술품을 왜 검집에 매달고 다니시는 겁니까? 품속에, 아니, 금고 안에 고이 보관해 두셔야지요.”

“…….”

주군이 어이없다는 듯한 눈빛이 느껴졌지만 그는 깔끔하게 무시했다.

“왜 그러십니까?”

“……됐다. 말을 말자.”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정작 손은 아드리안의 말대로 장식을 떼어 낸다. 그러고는 품속에 곱게 집어넣었다.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대형 참사 아닌가? 며칠 밤 정도는 밤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리라.

“정말 마님께서 만든 물건이 맞긴 한가 봅니다. 가보보다 더 조심스레 다루시는 걸 보니.”

“시끄럽다.”

짧게 대답한 글렌이 외투 자락을 여미며 힐긋 뒤를 돌아보았다.

본성의 성벽은 어느새 보이지도 않을 만큼 멀어진 지 오래였다. 눈보라에 가려져 보이지도 않는 저 너머에, 그의 고향과 가족이 있다.

언제 다시 저곳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아직은 요원한 일이었다.

하지만 오래 기다리게 하진 않을 것이다.

조만간 다시 보게 될 날을 고대하며, 그는 먼 길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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