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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화 (111/142)

제111화

리암이 아직 근신하고 있는 데다, 발라지트 공작이 수도를 비운 상황을 틈타 겁쟁이 왕을 움직일 것.

지원 의사를 밝힌 영주들에게 각자의 전장을 지정하여 곧장 그리로 움직이게 할 것,

‘한데 모이면 개판이 돼.’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느라 제대로 움직이지도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느니 차라리 각자 맡을 전장을 정해 주는 것이 낫다. 그리하여 왕국군은 모두 다섯 갈래로 나뉘게 되었다.

글렌이 옛일을 회상하는 듯, 지친 얼굴로 말했다.

“이러면 칼라아이 원정 때와 같은 일은 좀 덜 일어나겠지.”

‘덜’ 일어날 거라고 했지, ‘안’ 일어난다고는 안 했다. 모두가 힘을 합쳐 외부의 적을 물리치는 일 같은 건 기대도 안 한다.

“고생이 많았나 봐요.”

“설명하자면 밤을 새워야 할 만큼 길지.”

쌓인 것이 많은 듯한 목소리였다.

옛일을 회상하는 듯 이를 가는 그를 바라보며, 나디아 역시 과거의 일을 회상했다.

‘과거에는 이 전쟁이 1년보다 조금 더 걸렸으니까……. 이번에는 어떻게 되려나?”

윈터펠의 참전이라는 변수가 어떤 나비효과를 불러올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더욱 빠르게 끝날 수도 있고, 어쩌면 더욱 시일이 걸릴 수도 있다.

‘어쨌든 하루아침에 뚝딱 끝날 일은 아니라는 거지.’

그 말인즉 지금 떠난 이들은 한참 시일이 흐른 후에야 되돌아온다는 것이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일인데 왜 이렇게 서운한 기분이 드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녀는 제 기분이 가라앉았다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 애써 밝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와 선후작님이 영지를 잘 지키고 있을 테니까 걱정 말고 잘 다녀와요.”

“그래야지. 돌아와서 해야 될 일도 있으니.”

“해야 될 일? 그게 뭔데요?”

“그건…….”

무어라 말하려던 글렌이 입을 다물었다.

“그건 비밀이다.”

“이 영지에서 당신이 해야 될 일을 제게 비밀로 붙이겠다고요?”

나디아의 눈이 살짝 가늘어진다. 윈터펠 내에서 일어나는 일만큼은 다 꿰고 있다고 자부하는 그녀다.

그런데 내가 모르는 일이 있어?

“그래, 때때론 이 영지 내에서도 그대가 전혀 짐작하지 못하는 일이 일어나는 법이야.”

“제 눈과 귀 역할을 하는 가신들이 어디에나 있답니다. 알려고 하면 다 아는 방법이 있으니 그냥 가르쳐 줘요.”

“글쎄, 이번만큼은 아무리 가신들을 닦달해도 답이 안 나올걸?”

“?”

그 후에도 몇 번이나 조르듯 매달렸지만, 글렌은 끝내 ‘해야 될 일’이 무엇인지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저 쑥스러운 듯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 * *

왕의 칙서는 수도로 향하고 있었던 발라지트 공작에게도 도착했다.

“국왕 폐하께서 웬일로 빠르게 움직이셨군요.”

“왕이 아니라 1왕자, 혹은 오르델 백작의 뜻이겠지.”

왕의 인장이 찍혀 있으나 왕의 뜻이 아닌 칙서의 내용은 이러했다.

남부에서 올라오는 군대는 1군단, 2군단, 혹은 5군단으로 흩어져 적을 상대한다. 단 한 가문만을 제외하고.

“에른스트는 후방에서 보급을 맡는다, 라고…….”

“너무 노골적인 견제 아닙니까?”

에이든이 사실상 발라지트 가문의 후계자라는 건 알 만한 이들이 모두 알고 있지 않던가?

한 가문의 후계자는 가주의 대리인이 다름없다. 그런 이를 후방에 처박아 두다니.

“아무래도 제가 공을 세우지 못하도록 견제하려는 의도가 아닌가 싶습니다. 제가 서신을 보내 폐하를 다시 설득해 보지요.”

“아니, 됐다. 폐하의 뜻이 아니냐? 차라리 잘됐군. 에이든, 너는 칙서에 적힌 대로 보급 부대를 맡도록 해라.”

“예?”

에이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공작가의 후계자가 비교적 안전한 후방으로 물러나 있다니. 트집 잡기 좋아하는 이들이 이때다 싶어 그의 자질을 깎아내릴 것이다.

“공작님, 하지만 그랬다간…….”

“안다. 네가 무슨 말을 할지. 공식적으로 공표만 하지 않았을 뿐, 너는 내 후계자나 다름없지. 그렇기에 네 안위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

“네 자리를 대체할 수 있는 이가 없잖으냐?”

공작에게는 조카가 여럿 있었지만, 그의 눈에 찰 만큼 뛰어난 자질을 보이는 것은 에이든뿐이었다.

어릴 적부터 그 자질을 알아보고 직접 키우다시피 한 아이다. 그에게 에이든은 아들이나 다름없었다.

“공작님의 뜻이 그러시다면…… 그에 따르겠습니다.”

말은 그렇게 해도 표정에는 여전히 탐탁지 않은 기색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공작의 뜻이 강건한 이상 어쩔 도리가 없었다.

회의가 파한 뒤, 에이든은 본인의 처소로 돌아가는 대신 야외의 간이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백부님이 아껴 주시는 건 좋은 일이지만…… 나도 이제 어엿이 가정을 꾸린 성인인데 아직 어린아이 취급을 하시다니…….’

이래서야 먼 훗날 작위를 물려받는다고 해도 자신을 인정할 사람이 있을까 걱정이었다.

나오는 게 한숨뿐이다. 에이든이 어깨가 축 늘어졌다.

“하아…….”

“웬 한숨이십니까?”

“응?”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눈앞에 컵이 들이밀어져 있었다.

컵을 든 팔을 따라 시선을 올리니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지호 경.”

“날씨도 추운데 바깥에서 앉아 계시면 병 걸립니다.”

그가 내민 컵에 든 것은 따뜻하게 데운 물이었다.

에이든이 넙죽 컵을 받아 들었다. 그러잖아도 슬슬 한기가 들던 차였다.

“이건 고맙게 받지.”

그러자 이지호가 제 컵을 홀짝거리며 옆에 앉는다.

에이든은 그를 만류하지 않았다. 비슷한 나이 대 덕분에 그간 꽤 가까워졌던 것이다.

두 사람은 나란히 앉은 채 한동안 따뜻한 물을 마시기만 했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에이든 쪽이었다.

“그러고 보니 경은 어느 군단 소속이었지? 2군단이었나?”

“예, 점령된 성을 탈환하는 역할이지요. 반드시 북부 놈들보다 먼저 승전보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하하하, 아닌 것 같으면서도 승부욕이 강하단 말이야.”

이지호가 컵을 홀짝이며 생각했다.

‘3군단에는 그자가 있으니까.’

글렌 윈터펠. 북부에서 윈터펠이 가지는 영향력을 생각해 볼 때, 그가 군단장이 되는 건 기정사실이리라.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자에겐 지고 싶지 않았다.

칼라아이 원정 때처럼, 그자의 공적을 빛내 주는 들러리 역할을 하는 건 절대 사양이다.

“평야에서의 회전은 북부군의 특기인 반면, 공성은 어렵지. 어떻게 북부 놈들보다 먼저 승전보를 울릴 생각인가? 경의 생각을 들어 보고 싶군.”

“간단합니다. 탄탈 성은 강을 끼고 있지요.”

이지호가 주변에서 굴러다니는 나뭇가지를 하나 주워 들었다. 그러고는 흙바닥 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탄탈 성과 그 주변의 지형이었다. 심하게 도식화된 모습이었지만 대강 알아볼 정도는 되었다.

“……그림 실력이 대단하군.”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아무튼 성 주변의 지형은 이렇습니다. 여기서 강 상류의 둑을 터트리고, 하류에 방벽을 쌓으면…….”

그가 흙바닥 위에 줄을 죽죽 그었다. 성을 향해 쏟아지는 강물을 표현한 듯했다.

“상류 쪽의 지형이 더 높으니 탄탈 성은 물에 잠기게 됩니다. 마침 겨울인 것도 잘됐군요.”

“…….”

에이든은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턱을 괸 채 바닥에 그려진 그림을 보고 있을 뿐.

이윽고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좋은 생각이네. 좋은 생각이 맞긴 한데…….”

“문제가 있다면 지적해 주십시오. 감사히 듣지요.”

“아직 성내에 우리 왕국민들이 많이 남아 있어. 그들까지 수해의 피해를 입지 않겠는가? 게다가 이렇게 되면 주변의 경작지도 얼음물에 잠기게 될 터인데…… 피해를 복구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거야.”

“네, 아마 그렇게 되겠지요.”

“…….”

대답은 그게 끝이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뒷말이 들려오지 않는다.

에이든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상대를 바라보았다. 이지호는 무엇이 문제냐는 듯 눈만 깜박이고 있었다.

“아니…… 원래 이곳은 우리의 영토이고, 우리 왕국의 백성들 아닌가? 시일이 더 걸리더라도 다른 방법을 쓰는 게…….”

“약간의 희생은 어쩔 수 없지요. 전시인걸요.”

물론 민간의 희생이 적은 다른 방식이 존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바라는 것이 단순한 승리뿐이었다면 좀 더 돌아서 가는 길을 고민해 봤을 수도 있겠지.

문득 그는 지금쯤 윈터펠 영지에 있을 나디아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녀가 발라지트를 배신했다고 하던 공작의 주장도 떠올렸다.

그 말대로 정말 나디아가 아버지를 배신한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어째서? 대체 무엇을 위해?

설마 정말 그자와 사랑에라도 빠진 걸까?

“…….”

설마. 그럴 리가.

‘쓸데없는 생각을.’

이지호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나디아가 정말 윈터펠에 협력하고 있는지, 만일 그렇다면 그 동기가 무엇인지, 남북 사이에 승패가 갈리는 날에 알게 되리라.

지금은 눈앞의 전투에 집중해야 될 때였다. 첫 승전보를 전하는 것은 3군단의 윈터펠 후작이 아닌 자신이어야 했다.

그러니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택했을 뿐.

그는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에이든을 향해 반문했다. 정말 무엇이 잘못된 건지 모르는 사람처럼.

“왜 그러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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