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0화 (110/142)

제110화

“……내가 보고 싶을 거라고?”

“네, 좀 아쉽네요. 제가 뛰어난 기사였다면 따라갔을걸요.”

평범한 귀부인의 체력으로는 원정에 쫓아가 봤자 방해만 될 것이 뻔했으니 말이다. 무심코 그리 생각해 버린 나디아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방금 내가 무슨 말을 한 거지?’

사정이 된다면 따라갔을 거라니. 제 한 몸의 무력을 보태느니 이곳에서 영지를 돌보는 것이 백 배는 더 효과적이다.

그런데도 따라가고 싶다니. 이성적이지도, 효율적이지도 못한 결정이었다.

한순간이나마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에 놀란 나머지, 그녀는 얼음처럼 굳고 말았다.

글렌 역시 예상 밖의 말이라고 생각한 듯 깜짝 놀란 표정을 짓고 있다.

“진심인가?”

“그게…….”

그런데 그때였다.

“아니, 갑자기 왜들…… 읍! 으으읍!”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들려온 소음이 두 사람 사이에 흐르던 묘한 긴장감을 깨부순다. 두 사람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왕실이 보낸 전령이 사용인들에 의해 강제로 끌려 나가고 있었다. 집사장 고든이 무어라 소리치려는 그의 입을 틀어막고 있다.

글렌이 황당함을 숨기지 못하고 물었다.

“자네 지금 뭐 하는 건가?”

“아아, 두 분께서 중요한 얘기를 나누고 계시는 것 같아 저희는 이만 물러나려 합니다. 마저 이야기 나누시지요.”

“아니, 딱히 중요하다고 할 만한 이야기는 없…….”

“제가 볼 때는 곧 하실 것 같습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그러더니 식당 문을 닫고 재빠르게 사라져 버린다.

쾅!

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남은 두 사람은, 한동안 멍한 얼굴로 입구를 바라봐야 했다.

“갑자기 왜 저러는 걸까요, 고든은……?”

“글쎄. 우리가 왕실의 사람 앞에서 말실수라도 할까 봐 걱정됐나 보군.”

“아, 일리 있네요.”

마침 글렌에게 반드시 신신당부해야 할 이야기도 있던 차였다.

‘마침 고든이 사람들을 끌고 나가 줬으니, 이참에 얘기하는 게 좋겠다.’

나디아는 결심을 내린 즉시 입을 열었다.

“글렌, 당신이 해 줘야 하는 일이 있어요. 반드시, 까지는 아니어도 가급적 해내면 좋을 일이에요.”

“그대의 부탁이라면 들어줘야지.”

“만일 제 사촌 오라버니, 에이든이 위험에 처한 모습을 발견한다면 그를 구해 줘요. 에이든은 좀 더 오래 살아야 할 필요가 있어요.”

“…….”

글렌은 조금 놀라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곧 나디아가 왜 그런 부탁을 하는지 깨우쳤다.

“그건 발라지트 공작가의 후계 구도와 연관 있는 일인가?”

“어머, 어떻게 아셨어요?”

“알다시피 공작에게는 아들이 없다. 그렇다면 데릴사위와 딸을 혼인시키거나, 가까운 친척을 양자로 삼겠지. 하지만 수도원에 감금된 딸을 결혼시킬 수 있을 리가 없어.”

“그리고요?”

“공작가의 후계자가 되고 싶어 하는 방계는 차고 넘칠 것 아닌가? 에이든을 이용하여 서로 물어뜯게 하려는 계획인가 짐작했을 뿐이야.”

“대충은 맞네요.”

정확히는 에이든은 이지호의 영향력을 견제해 주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

하지만 이지호라는 인간에 대해서 정확히 모르는 글렌으로서는 예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이지호의 영향력을 왜 줄여야 하는지 설득력 있게 설명하는 것도 힘든 일이었기에, 나디아는 굳이 그의 말을 정정해 주지 않았다.

“제 사촌이 위험에 처한 것 같다 싶으면 가급적 그를 도와줘요. 물론 아군의 안전이 보장되는 선에서요. 절대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그를 보호할 필요는 없어요! 가장 중요한 건 당신의 신변이니까요.”

“명심하지.”

“그리고 한 가지 더 당부드릴 게 있는데요.”

“음?”

“에이든을 보호하는 것이 ‘가급적 해야 할 일’이었다면, 지금부터 제가 말하는 건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에요.”

* * *

마침 프레이는 수도에 기거하고 있던 차였다. 발라지트 공작이 남부로 내려갔다는 소식을 듣고, 발빠르게 수도에 들린 덕분이었다.

그의 눈길이 동쪽에서 올라온 보고를 초조하게 훑었다. 희망찬 소식은 그 어디에도 보이질 않는다.

“벌써 국경 인근의 성이 두 개나 점령당했다고 하네. 첫 번째 성이 점령된 지 얼마나 지났다고……. 정말 수도까지 당도하는 것 아닌가?”

프레이가 맞은편에 앉은 외숙부, 오르델 백작을 향해 말했다.

왕위 계승자가 신하에게 말을 높여서는 안 된다고 설득당한 이후, 그는 졸곧 외숙에게 말을 낮추고 있었다.

오르델 백작, 알렉산더가 답한다.

“걱정 마십시오. 악마족이 사막을 넘어온 것은 처음이 아닙니다. 이전에도 왕실의 충실한 검들이 침략을 막아 냈지 않습니까?”

“그야 그런 전례가 있긴 하지만…….”

“악마족들은 하나의 지휘 체계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부족 사회라고 할까요? 그 때문에 장거리 원정을 이어 나가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아, 그러고 보니 수업 시간에 배운 기억이 나. 같은 종족인데도 서로를 원수처럼 대한다지?”

“예,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는 것과 같은 이치지요. 불협화음이 나기 마련입니다.”

이번 침략도 아마 내부의 불만을 바깥으로 돌리기 위한 임시방편이리라.

사실 알렉산더는 지금 이 상황을 그리 심각하게 보고 있지 않았다.

동쪽 국경으로부터 수도까지는 한참 거리가 남아 있지 않은가?

그는 내분의 위험이 존재하는 군대를 막는 건 그리 힘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외조카의 다음 물음이 들려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근데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 아닌가?”

“예?”

“각지의 영주들을 불러 모아서 함께 싸우게 하면…… 우리라고 서로 잘 협력할 것 같지는 않은데? 결국 같은 조건인 거 아닌가?”

“…….”

오르델 백작의 말문이 막히는 순간이었다. 너무나 옳은 말이었던 것이다.

‘이런 걸 보면 상황 파악을 아주 못하는 건 아니란 말이지…….’

조카에 대해 마음을 비웠던 경험이 있어서 그런가?

프레이가 조금만 머리를 굴릴 줄 아는 것 같아 보여도 감동의 물결이 밀려오는 듯했다.

“무, 물론 전하의 말씀도 일리는 있습니다만…… 적군은 먼 거리를 원정 온 상태이고, 저희는 우리의 영토 내에서 싸우는 상황 아닙니까? 저희가 훨씬 유리하다는 건 변치 않습니다.”

“언제나 변수가 생기기 마련이니 불안한 거지.”

프레이가 탁자 위로 축 늘어진 채 물었다.

“북부에서는 별다른 소식이 없는가?”

“아직 답신은 없습니다만 지금쯤 왕실의 전령이 당도했겠지요. 북부는 왕국의 위기를 외면하지 않을 겁니다. 여차해서 중부가 뚫리는 순간 그들의 본거지까지 위협받을 테니 말입니다.”

“이 기회에 후작 부인을 다시 만나고 싶군…….”

“그보다 전하, 자세를 바로잡는 것이 좋겠습니다. 왕족의 체통을 지키셔야지요.”

“…….”

하여간 저 잔소리쟁이. 가까운 혈육일진데 성격은 왜 이리 판이하게 다른지 모를 일이었다.

프레이가 한숨을 내쉬며 상체를 일으켰다.

‘후작 부인과 또 얘기를 나눌 수 있었으면 실컷 욕이라도 할 텐데…….’

하늘이 그런 그의 소원을 들어주기라도 한 것일까? 때마침 바깥에서 반가운 소식이 도착했다.

“전하, 윈터펠에서 전령이 도착했습니다.”

“오!”

최근에 보기 힘든 희소식이었다. 너무 들뜬 나머지 시종을 시킬 생각도 못한 채, 프레이는 본인이 직접 걸어가 서신을 받아 들고 말았다.

알렉산더가 앓는 소리를 낸다.

“제발 왕족의 체통을…….”

“아아, 지금은 아주 급한 위기 상황이라고. 왕국의 본토가 침략당한 상황 아닌가? 위급할 때는 체통을 벗어던지는 융통성이 있어야지.”

말은 또 번지르르하게 잘해선.

외숙의 불만스러운 눈초리를 무시하며, 프레이가 서신의 봉합을 뜯어냈다.

서신은 모두 두 종류였다. 하나는 윈터펠 후작에게서 온 것,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후작 부인인 나디아에게서 온 것이었다.

‘왜 따로 보낸 거지?’

의아해하며 편지를 읽어 내려간 그는 곧 그 답을 알 수 있었다.

글렌의 편지는 윈터펠의 공식적인 입장을 담은 것이었다. 왕실의 요청에 기꺼이 응하겠다는 답을 담고 있다.

“윈터펠 후작의 서신은 왕국의 수호에 흔쾌히 참여하겠다는 내용이야. 그게 끝. 짧고 간단해서 좋군.”

그에 비해 나디아의 서신은 좀 더 길었다. 아니, 사실대로 말하자면 몇 배는 더 길었다.

프레이가 기나긴 편지를 천천히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으음, 어디 보자…….”

서문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러했다. 전하께서 반드시 해 주셔야 할 역할이 있으니 부디 제 부탁을 들어주세요.

‘당연히 그래 줘야지.’

후작 부인에게는 여러모로 빚이 많은 만큼, 프레이는 그녀에게 은혜를 갚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본론을 읽기도 전에 마음을 정한 그가 다음 문단으로 눈동자를 굴렸다.

* * *

“다행히도 수도에서의 일은 잘 풀리고 있는 모양이에요.”

프레이가 보낸 답신을 확인한 직후, 나디아가 꺼낸 말이었다.

글렌이 그녀의 말을 받았다.

“1왕자가 그대의 말에 잘 따라 주고 있는 모양이군.”

“정말 다행이네요.”

그런 의미에서 프레이는 딱 나디아가 찾던 인재였다.

섣불리 움직여서 대형 사고를 치지도 않고,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으면 주변에 물어볼 줄 안다. 그리고 조언을 들으면 잘 따른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남은 선택지가 프레이뿐이라는 사실에 절망했던 것이 무색해질 정도였다.

나디아가 왕실의 전언을 글렌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당신도 읽어 봐요.”

그녀가 프레이에게 부탁한 것은 두 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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