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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화 (108/142)

제108화

“일어날 수 있겠어요? 아니, 사람을 불러올게요. 조금만 기다려요.”

“잠깐―”

뒤에서 글렌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뒤돌아볼 틈은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치료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때마침 소란을 들은 이들이 몰려오고 있었기에, 그녀는 빠르게 글렌의 부상을 알릴 수 있었다.

“지스카르 경! 글렌이 부상을 입었어요!”

“예? 그분이 대체 어쩌다가……. 아, 이럴 때가 아니지요. 저희가 수습하겠습니다. 일단 마님은 물러나 계십시오. 얼굴색이 말이 아니군요.”

“아, 알겠어요…….”

제가 도움될 일은 없다는 걸 알기에, 나디아는 사람들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얌전히 물러나 있었다.

사냥터의 출발 지점으로 돌아온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천막 안으로 의원과 사용인들이 들락날락거린다. 그녀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초조하게 입술을 짓씹어야 했다.

“마님!”

“아! 깜짝이야.”

정신이 팔려 있었더니 누군가 제 지척까지 다가오는 것도 미처 알지 못했다. 나디아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돌렸다.

“파비안 경? 돌아온 거예요?”

“네, 은사슴을 잡았거든요.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나요? 왜 이렇게 어수선합니까?”

“글렌이 크게 다친 것 같아요.”

“예에?”

파비안의 눈이 접시만큼 휘둥그레졌다.

“맙소사, 사냥터에 갑자기 뭐가 나타난 겁니까? 오우거라도 나타났어요?”

“오우거는 아니지만 그만큼 큰 곰이 나타났어요. 다 나 때문이에요. 괜히 사냥터를 돌아다녀선…….”

그러자 파비안의 표정이 굉장히 미묘해졌다.

“곰이요? 동물인 곰?”

“네, 그 곰이요.”

“아니…… 겨우 곰을 상대하다가 다치실 리가 없는데…….”

“피가 엄청 많았단 말이에요. 옷의 색깔을 못 알아볼 만큼 흠뻑 젖어서는…….”

“…….”

그 말에 잠시 침묵하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 마님…… 혹시 그거 본인의 피가 맞긴 합니까?”

“응?”

그러고 보니 환부를 직접 보지는 못했다. 온통 피범벅이라 잘 구분이 안 됐던 것이다.

‘그러게. 그 피가 다 어디서 나온 거지……?’

나디아가 희미한 기억을 더듬고 있을 때였다.

“마님, 이제 들어오셔도 됩니다!”

천막의 입구가 열리더니, 지스카르가 고개를 내밀며 그리 말했다. 나디아는 생각을 멈추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미안해요, 파비안 경. 전 들어가 볼게요.”

“아아, 네. 어서 가 보세요.”

허겁지겁 안으로 들어가니 간이침대 위에 앉아 있는 글렌의 모습이 보였다. 이마에 감긴 붕대가 가장 먼저 눈에 띈다.

“……!”

외상 환자를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았던 그녀로서는 놀랄 수밖에.

나디아의 눈에는 마치 그가 너덜너덜한 넝마가 된 것처럼 보였다.

“머, 머리를 다친 거예요?”

“아니, 이마가 조금 찢어진 것뿐이야.”

글렌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나디아를 껴안고 함께 구를 때, 튀어나온 돌부리에 긁힌 것 같았다.

“정말 별것 아니야. 금방 나을 거다.”

“별것 아니긴요!”

“아니, 정말 별로 안 다-”

그때, 울컥한 나디아가 그의 목을 와락 껴안았다.

따뜻한 체온이 그렇게 포근할 수가 없었다. 글렌의 정신이 일순간 멍해졌다. 웬 호박이 제 발로 굴러들어오는가 싶다.

그가 서둘러 말을 이었다.

“……친 건 아니지만 조만간 회복이 될 거다.”

“제발, 다음부터는 다른 이를 구하려고 몸을 던지지 마요. 당신은 윈터펠의 영주잖아요. 그러고 보니 저번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죠? 그때 확실히 짚고 넘어갔어야 했는데……. 이러다간 몸이 남아나질 않겠어요.”

“저번에도, 라니?”

“몬스터 토벌에 나갔을 때요. 메두사가 저를 공격하려는 걸 몸으로 막았잖아요. 위험에 처한 사람을 보면 본능적으로 몸이 움직이기라도 하는 거예요?”

“그럴 리가.”

그 말에 글렌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고 말았다.

“내가 아무리 기사도를 중시한다 해도 모든 타인을 위해 몸을 던지는 건 아냐. 그대니까 구한 거지.”

나디아의 고개가 살짝 기울었다. 어째 뉘앙스가 조금 묘한데?

“다른 이가 아닌 나디아 윈터펠이니까 내 몸을 아끼지 않은 거라고.”

“그러니까…….”

“그대가 아닌 다른 사람한테 목숨을 걸지는 않을 테니 내 몸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

그녀의 얼굴이 살짝 달아오르는 순간이었다. 마치 그에게 자신이 아주 특별한 존재라는 의미로 들리지 않은가?

우리 두 사람은 그저 계약 부부일 뿐인데 말이다. 마치 진짜 가족이라도 되는 것처럼…….

나디아가 부끄러움에 입을 다물자, 막사 안에는 침묵이 찾아왔다.

침묵을 깬 것은 바깥에서 들려온 목소리였다.

“후작님이 사냥터에서 부상을 입으셨다고? 대,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마물이라도 나온 거냐?”

목소리로 추측컨대 회합에 참석한 영주, 아라베스 자작인 것인 듯하다.

하인의 대답이 이어진다.

“곰을 상대하다가 다치셨다고 들었습니다.”

“뭐? 곰?”

“예, 곰 인형 할 때 그 곰 맞습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하는 거냐? 후작님이 고작 맹수 따위를 상대하다가 부상을 입었을 리가 없지 않으냐! 서, 설마 암살자라도 나타난 건가? 그래서 함구령이…….”

무슨 오해를 한 것인지, 그의 목소리가 줄어들었다.

“…….”

“…….”

이쯤 되니 나디아도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낄 수밖에 없었다.

다들 반응이 똑같았던 것이다. 곰 때문에 다쳤다고 했을 때, 파비안도 비슷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가?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어 물었다.

“글렌.”

“응?”

“그러고 보니 어디를 어떻게 얼마나 다친 거예요?”

“아, 그건…….”

글렌이 잠시 눈동자를 굴리다가 말을 이었다.

“오러를 급히 끌어 올려 내상을 조금 입은 것뿐이야.”

“어머, 내상이라면 외상보다 더 심한 것 아니에요?”

“일반적으로는 그렇지.”

“몸조리에 더 신경 쓸수록 회복도 빨라지는 거죠?”

“그래.”

어떻게 집채만 한 곰을 순식간에 처리했나 했더니, 오러를 사용한 거였구나.

이 분야에 대해 문외한인 나디아는 그렇게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설마 한 영지의 영주가 이 나이 먹고 꾀병을 부리겠어?’

―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본성으로 돌아가면 당분간은 쉬어요. 몸에 좋은 거나 먹으면서 휴식을 취하는 게 좋겠네요.”

원기 회복에 좋은 음식이 뭐가 있을까…….

골똘히 고민하는 그녀의 표정이 점점 진지해져 갔다.

그런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이 하나 있었다. 바로 글렌의 것이었다.

그가 나디아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열 살 때도 안 하던 짓을 이 나이 먹고 하는군.’

설마 성인이 된 지 몇 년이나 지난 시기에 꾀병을 부리게 될 줄이야.

조금 민망하긴 했지만, 이내 그는 애써 자괴감을 억눌렀다.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노력하는 건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다.

그렇게 회합의 장이 무르익어 갔다.

* * *

비슷한 시기.

북부 영주들이 회합의 장을 연다는 소식에 발라지트 공작 역시 간만에 영지로 돌아갔다.

영지로 돌아간 그는 곧장 사냥 대회를 명분으로 각지의 영주들의 초대했다. 북부의 결집에 맞서, 남부 영주들과 회동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 남부에 자리 잡은 귀족들 대부분이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다들 소식을 들었겠지만, 북부놈들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 하오.”

“으음, 한데 모여서 반란이라도 꾸미는 건 아닐지 걱정입니다.”

“불과 백 년 전까지만 해도 북부는 야만인들의 땅 아니었소이까? 약속을 우습게 아는 족속들이니 이제 와서 다른 마음을 품는대도 놀랄 일은 아니지요.”

다들 이미 전해 들은 바가 있는 듯, 새삼스레 놀라워하는 반응은 없었다.

그래 봤자 자신들에게 상대가 될 리 없다는 오만함만이 엿보일 뿐.

그때, 자리에 모여 있던 영주들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공작님, 한 가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말해 보게.”

“공작님의 따님이신 나디아 양이 북부 영주들의 회합 자리에 항상 동행하고 있다 하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

그 말에 공작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진다. 하지만 질문을 던진 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공작 영애께서 그쪽으로 회유되었다는 소문이 진실입니까?”

“…….”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첩자라는 명목으로 나디아의 결혼을 허한 것은 다름 아닌 발라지트 공작 본인이었던 것이다.

드높은 자존심상 제 입으로 제 실책을 인정하는 것이 쉬울 리가.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최대한 대수롭지 않다는 태도를 보이는 것뿐이었다.

“쯧, 그 아이가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알 수가 없군.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내 통제를 벗어났다는 것이지. 이 배은망덕한 것 같으니.”

아무렇지도 않다는 태도였으나 그 말의 뜻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긍정을 뜻하는 대답에 장내가 단번에 소란스러워졌다.

“공작 영애가 왜 아버지를 배신한단 말입니까? 그게 무슨 이득이 된다고요?”

“차라리 지금이라도 본색을 드러내 줘서 다행이지. 추후에 거짓 정보로 우리를 혼란시키는 것보다는.”

“제가 궁금한 것은 윈터펠이 공작 영애에게 무슨 이득을 제시했기에 그쪽으로 붙었느냐는 것입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공작 영애가 직접 보고 판단한 결과, 북부의 전력이 우리가 예상한 것 이상이었을 가능성도 있지 않습니까? 승률이 더 높다고 판단했기에 윈터펠을 편드는 게 낫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지요.”

“만일 정말 그렇다면 대책을 세워야 하는 것 아니오?”

그에 반대하는 의견 역시 만만치 않았다.

“어쩌면 그저 단순히 결혼했으니 한 배를 탔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소.”

이성적인 이유를 내세워 맞서기보다는, 적의 전력이 그만큼 강대하다는 걸 인정하기 싫은 마음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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