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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화 (107/142)

제107화

같은 북부 사람이라고 해서 늘 사이좋게 지내는 것은 아니었다.

영토를 접하고 있는 만큼, 그들 사이에서도 이런저런 다툼이 존재하긴 했다.

하지만 강대한 공동의 적 앞에서 그런 ‘사소한’ 다툼쯤은 의미를 잃는 법이다.

“북부가 몬스터 웨이브와 맞서 싸워 피를 흘릴 동안, 왕실과 남부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

“그들이 우리가 흘린 피를 기억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언제부터인가 그들은 북부의 희생을 당연히 여기고 있다.”

“육시랄 것들!”

식탁 한쪽에서 욕설이 터져 나왔다.

몬스터 토벌 과정에서 부친과 외조부를 모두 잃은 길포드 칼론의 목소리였다.

“그놈들이 수도에서 고상하게 지낼 수 있는 것도, 모두 우리가 헤라 강의 방어선을 지켜 주는 덕분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지원금이랍시고 푼돈을 던져 주면서 거들먹대는 꼴이란……!”

“남부 놈들이 우리에게 감사를 표한 적이 있기나 합니까? 우리가 언제까지 이런 모욕을 견뎌야 합니까?”

“왕실은 남부 놈들의 편입니다. 그러니 우리 북부인은 북부인끼리 단결해야 합니다!”

“옳소!”

여기저기서 분노에 찬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다.

북부가 왕국령에 편입된 이후, 왕실은 줄곧 북부의 병력을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는 예비 전력 취급했다.

그에 비해 북부가 흉년으로 고생할 때 도움의 손길을 내민 것은 누구였는가?

척박한 땅에서 함께 투쟁해 왔던 것은 누구였던가?

어느 쪽의 손을 잡아야 할지는 너무나도 명백했다.

달아오른 좌중을 훑어보던 글렌이 입을 열었다.

“앞으로 경들의 협조를 고대하지.”

분노에 찬 외침이 북부의 단결을 주장하는 목소리로 바뀌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누군가 술잔을 들어 올리며 이렇게 외쳤다.

“북부 연맹의 영광을 위하여!”

글렌이 그에 호응해 잔을 들어 주자 환호성이 더욱 커진다. 식당 안의 분위기가 벽난로 속처럼 달아올랐다.

사냥 대회의 전야제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 * *

“이번 사냥 대회, 분위기가 참 좋네요.”

사냥터 근처의 천막 아래 앉아, 나디아가 느른하게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사냥 대회의 분위기는 전에 없이 화기애애했다. 으레 있곤 하는 사소한 기싸움의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수십 년에 걸쳐 윈터펠의 가주를 보좌한 지스카르마저 인정할 정도였다.

“확실히 여태껏 제가 참석한 회합 자리 중 가장 화기애애한 것 같군요.”

“다른 사람과 친해지는 데에는 공동의 적을 만드는 것만큼 효과적인 방법이 또 없는 법이죠.”

“저도 동의합니다. 아 참, 그러고 보니 다른 가문에서 온 귀족들 중 마님께 무례를 저지르는 자는 없었습니까?”

“다들 깍듯하던걸요. 부담스러울 정도였답니다.”

그러자 지스카르가 안도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군요. 혹시 마님의 출신을 트집 잡아 불손하게 구는 자가 있을지 걱정했습니다.”

“글렌이 다 조치를 해 놓은 모양이죠.”

귀부인들의 티파티에 참석했을 때 더욱 뼈저리게 느꼈다. 자신이 왕비가 된다 하더라도 그런 대접은 못 받을 거라고.

“그런데 지스카르 경은 대회에 참여 안 하시나요?”

“저야 오늘은 마님의 호위를 맡았으니 말입니다.”

파비안이 대회에 참석하느라 오늘 하루만 호위 임무에서 해방된 덕택이었다.

다들 사냥 대회에 참석하고 싶어 했기에, 기사단 내에서 가장 연장자인 그가 양보한 것이다.

“이런 건 젊은이들에게 양보할 일이지요. 사냥 대회라면 질리도록 참여해 봤습니다.”

그리 말하는 지스카르를 바라보며, 나디아가 생각했다.

‘그렇게 말하는 것치곤 표정이 엄청 따분해 보이는데요…….’

선후작과 비슷한 나이대라고는 하나, 전혀 그 또래로 보이지 않을 만큼 정정한 그였다.

다들 사냥터를 누비는 와중에 혼자 자리를 지키는 것이 달가울 리가.

‘괜히 나 때문에 사람 잡아 두는 것 같아서 미안한데…….’

아쉬운 듯한 얼굴로 연신 사냥터 쪽을 쳐다보는 것이, 누가 봐도 참여하고 싶어 하는 얼굴이다. 용케도 막내에게 기회를 양보했구나 싶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갑자기 사냥이 하고 싶어졌어요. 지스카르 경, 제 호위니까 저를 따라오셔야겠네요.”

“예? 마님께서 사냥을 하시겠다고요?”

“두 달 전부터 글렌한테서 궁술을 배우고 있거든요.”

계속 앉아 있다 보니 몸이 굳는 것 같다며, 무심코 꺼낸 말에서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그 말에 반색한 글렌은 활이라도 익혀 보는 건 어떻겠느냐고 반문했고, 나디아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파비안이나 다른 기사들을 시킬 줄 알았는데 이게 웬걸.

연습을 시작한 첫날 연무장에 서 있던 것은 다름 아닌 글렌 본인이었다.

바쁠 테니 다른 이를 시키라는 말을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꽤 훌륭한 선생이긴 하지.’

그 결과 나디아는 움직이지 않는 목표물을 맞히는 데는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겼다.

문제는 사냥터 안에 움직이지 않는 목표물이 얼마나 있을까 하는 것인데…… 그녀는 참가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나디아가 말 위에 올라타자, 지스카르는 반색하는 듯하면서도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마님, 사냥터 깊숙한 곳에는 맹수가 돌아다닙니다.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더더욱 지스카르 경이 함께 가셔야겠네요.”

맹수라고 해 봐야 늑대 정도일 것이다. 마물도 썰어 버리는 이들이 맹수로부터 저 하나를 보호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결국 그는 못 이긴 척 마님의 뒤를 따라나서야 했다.

“이 영지에서 마님의 뜻대로 못할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서 가시죠.”

그리하여 두 사람은 사용인들과 함께 사냥터로 들어가게 되었다.

사냥터 입구쯤에는 토끼 같은 소동물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꽤 해볼 만했다는 뜻이다.

쐐액!

나디아의 화살이 지나가던 토끼의 몸통에 박힌다.

“어?”

제가 쏜 화살이 명중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멍하게 눈을 깜박이던 그녀는 잠시 후에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곧 그녀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잡았다! 잡았어요!”

“축하드립니다.”

지스카르가 등 뒤에서 함께 활시위를 잡아당겨 주고, 함께 올바른 방향을 겨냥해 준 덕분이었다.

사실상 그가 잡아 준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어쨌든 나디아는 기뻤다.

당장 제게 활을 가르쳐 준 사람, 그러니까 글렌에게 달려가 자랑하고 싶을 만큼.

“글렌은 어디 있을까요? 말해 주고 싶은데…….”

“글쎄요, 그분은 아마 더 안쪽에 계시지 않을까 합니다. 맹수들을 모아놓은 구역이 중심부에 있어서 말입니다.”

“그쪽으로 가는 건…….”

“그건 위험할 수 있으니 호위를 더 불러오거나, 영주님께서 나오실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을 듯합니다.”

“으음…….”

그런데 그때였다.

나디아가 포기하고 돌아가려는 순간, 가까운 곳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워낙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섞여 있는 탓에 무어라 하는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쪽으로 다가온다는 것 하나는 확실했다.

“방금 영주님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글렌이 오고 있을지도요. 제가 가 볼게요.”

제 성과를 자랑하기 위해 나디아는 들뜬 마음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 풀숲을 헤치는 듯한 소리가 점차 가까워진다. 무언가 다가오고 있었다.

“글……!”

그러나 우거진 나무 사이를 헤치고 나타난 것은, 글렌은 둘째 치고 사람조차 아니었다.

곰이었다. 과장 좀 더해 집채만 한 곰.

“크워어어어!”

“……?”

아니, 이런 건 사냥터 중심부에나 있다면서요. 곰이 왜 여기서 나와?

박제 말고 살아 있는 곰은 처음이다. 나디아는 바싹 얼어붙고 말았다.

하필이면 신나서 혼자 말을 몰았기에, 지스카르는 저 뒤에서 자신을 따라오고 있는 상태였다.

“크르르르르-”

노란 눈의 짐승이 침을 뚝뚝 흘리며 나디아를 바라보았다.

그냥 지나가 줬으면 좋겠는데 어깨 부근에 화살이 두어 개 박혀 있다. 극도로 흥분한 상태임이 분명했다.

‘침착해, 침착. 맨몸도 아니고 말을 타고 있잖아. 도망칠 수 있어. 맹수와 만났을 때는…… 등을 보이면 안 된다고 한 것 같은데…….’

나디아가 곰과의 거리를 가늠하며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계산을 하고 있을 때였다.

“크우우!”

“……!”

침을 뚝뚝 흘리는 맹수가 그녀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나디아가 황급히 고삐를 당겨 공격을 피했다. 하지만 겁을 먹고 펄쩍펄쩍 뛰는 말 위에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아아악!”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흙바닥 위를 뒹굴어야 했다.

하늘과 땅이 뒤집히기라도 한 것처럼 눈앞이 핑핑 돈다. 누군가 머리에 손을 넣어 뇌를 흔드는 것 같았다.

“……!”

도망쳐야 한다는 위기감에 본능적으로 상체를 일으켰지만, 머리 위로 이미 짙은 그림자가 진 후였다.

“아.”

고개를 드니 저를 향해 앞발을 들어 올리고 있는 맹수의 모습이 보인다.

그녀가 눈을 감을 생각도 못한 채 그 모습을 바라보던 순간이었다.

누군가 제 허리를 낚아채는 것 같더니, 나디아는 본의 아니게 다시 흙바닥 위를 뒹굴어야 했다.

빙글빙글 도는 머리를 붙잡으며 눈을 떴을 때,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건 곰과 대치하고 있는 글렌의 모습이었다.

“그, 글렌!”

“어서 피해!”

그가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내며 크게 외친다.

‘내가 가까이 있어 봤자 방해만 될 뿐이야.’

그리 판단한 나디아는 두통도 잊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움이 되지는 못할망정 방해가 될 수는 없다.

그런데 반대편으로 몇 걸음 옮겼을 때였다.

“크허어엉!”

맹수의 단말마 소리에 그녀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 짧은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커다란 곰의 인영이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

쿵-!

마침내 맹수가 쓰러지자, 땅이 울릴 만큼 커다란 진동이 사냥터 안에 퍼져나갔다.

‘잡은 건가? 이렇게 빨리? 글렌은 어떻게 됐지?’

시선을 돌린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나디아는 창백하게 질린 채 가까이 다가갔다. 곰의 시체 너머로 피에 흠뻑 젖은 글렌의 모습이 보인다.

그녀의 얼굴에서 더욱 핏기가 빠져나갔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서, 설마 다친 거예요?”

“응?”

“세상에. 피가 이렇게 많이…….”

그의 옷은 본래 색깔을 알아볼 수조차 없을 만큼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글렌이 말했다.

“조금 긁힌 것뿐이다.”

“조금 긁히긴 뭐가! 이렇게 피가 많이 나는데…….”

가까이 다가간 나디아가 그의 뺨을 양손으로 쥐며 외쳤다. 그러자 그의 황금색 눈동자가 일순간 몽롱해진다.

그녀가 생각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정신이 혼미해지는 게 틀림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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