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6화
“…….”
그러자 그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한다. 저 반응만 봐도 답은 뻔했다.
“왜 그랬어요?”
“왜 그랬을 것 같나?”
“뻔하죠, 뭐. 혹시나 다른 가문 사람들이 제 출신 때문에 저를 배척할까 봐 미리 경고한 것 아니에요? 우리가 이렇게 귀하게 대접하고 있으니 발라지트의 첩자일까 경계하지 않아도 된다, 이런 의미?”
“……역시 그대의 눈은 속이지 못하겠군.”
글렌이 짧은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마이어 가문은 그리 큰 지역의 영주는 아니지만, 대대로 북부에 자리를 잡고 있었던 유서 깊은 가문이야.”
“그렇다는 건 북부에선 꽤나 마당발이라는 거네요.”
“그렇지. 오늘 그가 본 것은 알음알음 다른 가문으로도 퍼져 나갈 거다. 그리 된다면 회합의 장이 열렸을 때, 감히 그대를 무시할 이는 없어지겠지.”
“…….”
그러니까 자신이 어디 가서 홀대받지 않을까 걱정해서 일부러 과장되게 호들갑을 떨었다는 뜻이었다.
이럴 때마다 나디아는 글렌 윈터펠이라는 남자가 어떤 인간인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의외로 섬세하다니까. 참 좋은 남자야.’
생긴 것만 보면 차가운 북부 남자 그 자체인데 말이다. 예상 외로 세심한 부분까지 신경써 주는 면이 있었다.
명문가 출신에 외모도 훤칠하고 제 사람을 잘 챙기기까지 한다.
어떤 가문의 여식이라도 저런 남자가 구애한다면 쌍수를 들고 환영하리라.
나디아는 아주 잠깐, 그가 자신과 이혼한 후에 그의 구애를 받을 여자가 부러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아니. 내가 무슨 생각을…….’
벌써부터 이런 생각을 하다간 나중에 가서 정말 추한 모습을 보이게 될지도 모른다.
한순간 딴생각을 품을 걸 반성하기라도 하듯, 나디아가 머쓱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저한테는 미리 말해 주지 그랬어요? 당신이 세 칸짜리 계단 앞에서 에스코트해 주겠다고 손을 내밀었을 때 어디 아픈 줄 알았잖아요.”
“아, 그거는 계획에 없던 일인데.”
“네? 그럼…….”
“그대가 일전에 구두 신고서 계단 내려가기가 힘들다는 말을 했던 게 기억났거든.”
“…….”
나디아가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었다. 뭔가…… 무언가 아주 묘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마치 저 남자가 자신을 꼬여내는 듯한…….
‘이런 기분 벌써 몇 번이나 느끼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가 여러 번 되면 그건 더 이상 기분 탓이 될 수 없었다. 특히나 영지로 돌아온 이후에 더더욱 심해지는 것 같다.
갑자기 그의 행동이 바뀐 이유. 짚이는 바가 있었다.
“그럼 가까운 가신들에게만 사실을 털어놓는 건 어때요? 제가 후작님을 사랑한다고 한 건 거짓말이니 저를 불쌍하게 여길 필요는 없다고요.”
“……그것보다는 적당히 연기하는 게 나을 듯싶군.”
“네? 연기라면…….”
“뭐, 휴일에 나들이를 나간다든가, 공연을 본다든가……. 다른 이들이 봤을 때 사이가 좋아지고 있는 것처럼 말이야.”
나디아의 시선이 다시 비취 목걸이로 향했다. 갑자기 이 목걸이를 준 이유가…….
‘설마 그거 때문이었어?’
정말 그렇다면 글렌은 불필요한 선물을 한 셈이다. 아버지는 이미 딸이 배신자라는 걸 어렴풋이 눈치챘으니까.
그 말인즉 더 이상 비밀 유지에 공을 들일 이유가 없어졌다는 뜻이었다.
‘앞으로는 이럴 필요 없다고 얘기해 줘야 하나? 아니, 그래도 아직까지는 심증뿐인 것 같으니 굳이 내 쪽에서 확신시켜줄 필요는 없는 것 같기도 하고…….’
게다가 사심을 조금 더하자면…… 글렌의 다정한 태도가 꽤나 기꺼웠다.
만일 그의 태도가 한순간 변해 버린다면 좀 서운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만큼.
여러모로 복잡해하는 그녀의 속마음을 읽어내리기라도 한 듯, 글렌이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왜 그렇게 바라보는 거지? 할 말이라도 있나?”
“그냥…… 외모와 달리 참 다정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내가?”
“그럼 여기서 당연히 당신 얘기를 하는 거죠.”
“그렇게 여겨 준다니 정말 영광이군.”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더니, 영광이라고 대답하는 그의 입꼬리를 살짝 위를 향해 있었다.
나디아가 다음 말을 덧붙이기 전까지는 말이다.
“새로운 후작 부인이 될 여자는 참 좋겠어요.”
“……뭐?”
순간적으로 글렌의 몸이 살짝 휘청거리는 것 같았다.
착시인가? 나디아는 개의치 않고 칭찬을 이어나갔다.
“남편이 부유한 대영주에 잘생기고 다정하기까지 하니 얼마나 좋겠어요? 만인의 부러움을 살걸요.”
“만인의 부러움이라……. 글쎄,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은데.”
“그럴 리가요. 혼기에 찬 귀족 영양이라면 누구나 윈터펠 후작 부인 자리를 노릴 거예요. 자신감을 가져요.”
“…….”
잠시 그녀를 빤히 들여다보던 글렌은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내가…… 더 노력해 보지.”
“뭘요?”
“그대 말대로 ‘모든’ 귀족 영양이 후작 부인 자리를 노릴 만큼 말이야.”
“……?”
여기서 뭘 더 노력하겠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왕실의 간섭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만큼 강성한 세력의 주인이 되겠다는 것인가?
그의 말뜻을 해석하고자 머리를 굴리는 그녀의 앞에, 서류철 하나가 들이밀어졌다.
“그리고 이건 곧 열릴 사냥대회에 참석한 가문의 목록이다. 구실만 사냥대회일 뿐이지, 사실상 북부 귀족 회합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초상화를 첨부했으니 얼굴과 이름 정도는 외워 두는 게 편할 거야.”
“그 정도야 기본이죠.”
나디아가 서류철을 받아들며 빙긋 웃었다.
* * *
두 달 후.
사냥대회를 가장한 북부의 회합은 윈터펠령에서 열리게 되었다.
초대장을 받은 대다수의 영주들은 식솔들과 함께 참가할 것을 알려왔고, 그 결과 후작가의 본성은 각지에서 몰려온 이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후작 부인께서 모습을 드러내실지…….”
“부인께서 회합 자리에 참가하시는 건 처음이네요.”
“그야 그분이 결혼하고 처음 열리는 회합이 오늘이니까.”
사냥대회의 전야제에 참석한 이들의 최대 관심사는 새로운 후작 부인에 대한 것이었다.
정적 가문에서 온 안주인은 과연 어떤 사람일 것인가?
또 후작가에서 그녀의 위치는 어떻게 되는가?
그 답을 알기 위해 모두가 노버트 마이어의 입만 바라보고 있었다.
“윈터펠과 후작 부인의 관계라……. 그걸 설명하자면 후작가와 거래하는 한 상인의 말을 인용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 듯싶습니다.”
가장 최근에 후작가를 방문한 것이 바로 그였으니 말이다.
“그자가 대체 무어라고 했기에…….”
“후작가의 권력 서열이 어떻게 되는 줄 아느냐?”
“?”
“1위가 후작 부인, 2위가 선후작님이며, 현재의 영주님은 3위에 불과하다!”
“…….”
잠자코 듣고 있던 이들의 표정에 미심쩍은 기색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과장이 너무 심하군. 선후작님이야 그렇다 쳐도, 어떻게 후작 부인이 최고 권력자가 될 수가…….’
‘우리가 한 번도 후작 부인을 뵌 적 없다고 허풍을 떠는 게 아닌가?’
자신을 향한 시선을 눈치챈 노버트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믿기 싫으면 마십시오, 참고로 이런 말을 한 자는 북부 상인 연합회의 웨인입니다. 그자의 수완이 얼마나 좋은지는 다들 아시겠지요.”
“하지만…….”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입니다.”
상인 웨인이라면 북부 귀족들 사이에서도 모르는 이가 없을 만큼 부유한 이였다.
그의 눈이라면 믿을 만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후작가의 서열 1위가 발라지트 공작의 딸이라는 건 쉬이 받아들이기 힘든 말이다.
쉬이 납득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집사의 목소리가 들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후작님과 후작 부인 드십니다.”
호스트의 등장을 알리는 목소리에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표했다.
갈색머리 여자와 팔짱을 낀 글렌이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저 사람이 발라지트 공작의 딸이구나.’
‘……공작과 전혀 안 닮았는데?’
발라지트 공작을 직접 본 적이 있는 몇몇 사람들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는 중에도 두 사람은 상석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이윽고 시종들이 빼 주는 의자에 착석한 글렌이 입을 연다.
“다들 초대에 응해 주어서 고맙군. 작위를 물려받은 이후 처음 열리는 회합인데, 내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될 뻔했어.”
“그러니 더더욱 없는 시간을 내서라도 참석해야지요.”
그리 말한 것은 가까이에 있던 롬바르도 남작이었다. 글렌의 시선이 그리로 돌아갔다.
“지난 칼라아이 원정 이후로 처음인 것 같은데, 내 기억이 맞는가?”
“영지의 사정이 좋지 못해 그간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흔쾌히 곡물을 지원해 주셔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윈터펠은 오십년 전, 바람그늘 평원에 대흉년이 들었을 때 기꺼이 밀을 내주었던 롬바르도의 의리를 잊지 않았다. 그 당시 보여 준 신의에 대한 마땅한 대가이지.”
말을 끝마친 글렌의 시선이 그 옆자리를 향했다.
“오르비에토 백작, 그대도 와 주었군.”
“마땅히 해야 할 일이지요. 도리어 초대에 감사드립니다.”
“그대의 가문은 백여년 전, 윈터펠과 함께 마지막 순간까지 헤라 강 방어선을 지켜 주었지. 오르비에토가 초대받지 못한다면 그 어떤 가문이 초대될 수 있겠는가?”
“황송합니다.”
“칼리스토 경, 귀문(貴門)의 시조는 윈터펠의 초대 가주와 어릴 적부터 돈독한 친분을 쌓았다지. 그처럼 양 가문의 우애가 오래도록 지속될 수 있다면 좋겠군.”
“파르마 경, 그대의 가문이 칼라아이 원정에서 보여 주었던 의리는…….”
“말로 경.”
“아라베스 경.”
그는 각 가문을 대표하여 모인 이들을 하나씩 호명했다.
아나톨레, 칼리스토, 아인, 오르비에토, 마이어, 다닐로바, 말로, 아라베스, 칼론, 롬바르도, 파르마.
그의 목소리는 가장 말석에 앉은 이의 가문과 윈터펠의 인연을 언급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이 척박하고 메마른 땅 위에서, 우리 북부인들은 함께 싸워왔다. 추위와 굶주림, 그리고 마물들의 공격으로부터 왕국을 지키는 방파제가 되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