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5화 (105/142)

제105화

후작가의 창고가 하나뿐일 리는 없으니, 다른 곳의 상황도 이곳과 마찬가지이리라.

‘레이나 지역의 흑토가 이토록 생산력이 좋았다니…….’

입을 떡 벌린 채로 감탄하는 그에게, 글렌이 입을 열어 말했다.

“서신을 통해서도 밝혔지만, 우리 윈터펠은 마이어 가문에 겨울을 넘길 수 있을 만큼의 곡물을 제공할 의향이 있다.”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후작 각하. 선뜻 곡물을 빌려주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올해 받은 도움은 반드시 다음 수확기에 한 톨도 빠짐없이 갚도록 하겠습니다.”

“갚는다니? 내년에 풍작을 거둔다 해도 영지 내의 수요량이 있을 것 아닌가? 도움을 빌미로 마이어 가문에 대가를 요구할 생각은 없네. 다만 윈터펠과의 우호를 잊지 말아 줬으면 하는 마음뿐이지.”

“……!”

그러니까 이런 뜻이었다.

‘식량 지원해 줄 테니 윈터펠이 북부 지역의 맹주라는 걸 인정해라.’

어렵지 않은 요구였다. 솔직히 말해서 받은 곡물을 내년에 갚으라는 것보다 훨씬 기껍다고 할 만했다.

최근 몇 년간 조금 위기가 있긴 했지만, 북부 지역의 맹주가 윈터펠이라는 건 오래전부터 기정사실 아니었던가?

원래 존재했던 명제를 다시 한번 인정하는 것쯤이야 어렵지도 않다.

게다가 어차피 마이어는 북부 가문들 사이의 주도권을 탐낸 적도 없었다.

그가 얼른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후작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다른 표현으로 말하자면 이러했다. 거래 성립.

그 순간 글렌과 나디아가 서로 웃음 섞인 눈빛을 교환했다. 배고픈 이에게 곡물을 나눠 주는 것만큼 효과적인 회유 수단이 또 없는 법이다.

글렌이 넙죽 허리 숙인 노버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어려울 때 서로 돕는 것이 진정한 이웃인 법이지. 그러지 말고 고개 들게.”

“저, 정말 감사합니다, 후작님.”

그 이후로 얼마만큼의 곡물을 지원할 것인지, 시기는 언제로 정할 것인지에 대한 대화가 이어졌다.

그런데 막 자세한 내용이 화두에 오르려는 순간이었다.

“영주님, 영주님!”

숨을 헐떡거리며 달려온 하녀 한 명이 대화의 맥을 끊어 먹는다. 글렌이 지척까지 다가온 하녀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지?”

“크레타 상회의, 허억, 카타리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카타리나가? 용건이 뭐라고 하더냐?”

“시키신 일은 완수했다고, 그렇게만 전하면 알아들으실 거라고 했습니다.”

그때, 대화를 듣고 있던 나디아가 불쑥 끼어들었다.

글렌이 카타리나에게 시킨 일이 있다니, 금시초문이었던 것이다.

“리암 상회와 거래하신 것이 있어요? 저한테는 보고가 들어오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그거’인 것 같군.”

“……그거, 라니요?”

글렌은 그녀의 질문에 답하는 대신 노버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미안하지만 매우 급한 일이 생겨서 말이야. 이만 자리를 옮겨도 되겠나?”

“아아, 물론입니다. 어차피 더 자세한 내용은 실무진을 통해 검토한 후에 결정할 일이었지요. 급한 사안이라니 먼저 해결하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해해 줘서 고맙군.”

사실 이해 못 해주겠다고 뻗댈 상황도 아니긴 했다.

저 젊은 영주의 표정을 보라. 당장이라도 카타리나인지 카트리나인지 하는 상인에게 달려가고 싶다는 얼굴이지 않은가?

저건 노버트가 양해 못 해주겠다며 우겼어도 무시하고 자리를 뜰 얼굴이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저러시지……?’

솔직히 그 ‘용건’이라는 게 무엇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이 거대한 영지의 젊은 주인이 얼굴색까지 바꿔 가며 급히 자리를 옮겨야 할 용건이라…….

그는 우르르 이동하는 일행을 따라 함께 자리를 떴다. 손님방을 안내받지 못한 터라 함께 따라가는 것 외엔 방법이 없기도 했다.

그들이 마침내 도착한 곳은 본채의 응접실이었다.

응접실 한가운데에 붉은 머리카락의 중년 여인이 서 있었는데, 노버트는 한눈에 그녀가 리암 상회의 카타리나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후작님. 그리고 후작 부인도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주문한 물건은?”

“하하, 거 참. 성격도 급하시지. 제가 누굽니까? 그 어떤 까다로운 귀부인도 실망시킨 적이 없답니다, 제가.”

중년 여자, 카타리나는 그리 너스레를 떨며 자그마한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노버트의 목울대가 꿀꺽 넘어갔다.

‘저, 저게 뭐지?’

얼핏 보기에는 마치 보석함처럼 생겼다.

하지만 고작 그따위 물건을 받는 것을 ‘급한 용건’이라고 표현하지는 않았을 터. 분명 숨겨진 정체가 있을 것…….

“말씀하신 비취 목걸이입니다. 최상품이지요. 이보다 더 최상품의 비취는 없다고 자부합니다.”

……보석함 맞네.

카타리나의 손에 의해 열린 상자 속에 든 건 초록빛 보석으로 장식된 목걸이였다. 몇 번이고 눈을 깜박여 봐도 바뀌는 것은 없었다.

나디아가 깜짝 놀란 얼굴로 입을 연다.

“설마…… 제가 전에 비취가 좋다고 한 것 때문이에요?”

“선물해 주겠다고 했잖아. 왜? 마음에 안 드나?”

“아니, 그게 아니라…… 저도 모르게 크레타 상회에 시킨 일이 있다기에 깜짝 놀랐잖아요. 무슨 일이 생겼나 해서…….”

“그대를 놀래키고 싶었어. 많이 놀랐다면 사과하지.”

부부의 대화를 듣고 있던 노버트의 표정이 조금씩 일그러져갔다.

‘서프라이즈 선물이라…… 그래, 참으로 급한 용건이 맞군.’

시간을 끌면 카타리나인지 뭔지 하는 상인이 목걸이를 공수해 왔다는 게 나디아의 귀에 들어갈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급히 이곳으로 달려와야 했던 글렌의 사정이 정말, 진심으로 이해되었다. 암, 이해되고말고.

하지만 후작 부부의 애정 행각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착용해 보지 그래? 아니, 내가 직접 걸어주지.”

“여기서요? 뭐…… 좋아요. 당신 성의가 있으니까.”

나디아가 의자에 착석하자, 그녀의 뒤에 선 글렌이 긴 머리카락을 걷어 냈다. 그의 손끝이 목덜미에 살짝 닿는다. 그 간질간질한 느낌에 나디아는 살짝 몸을 떨고 말았다.

아직 본격적인 겨울이 닥치기 전이라 그녀는 목덜미를 드러낸 옷을 입고 있었다. 그러니까, 하얀 피부와 녹색 보석이 대조되어 꽤 그럴 듯한 그림이 나왔다는 뜻이다.

카타니라가 수완 좋은 상인답게 물개 박수를 치며 감탄했다.

“어쩜! 제 안목이 틀리지 않았네요. 이건 후작 부인의 것이 되기 위해 만들어진 물건입니다.”

“카타리나…… 부끄러우니 그런 말은 작게 말해 줘.”

“제 입은 오로지 진실만을 말한답니다. 그러니 부끄러울 것도 없지요.”

그녀가 턱을 치켜세우며 그리 대답했다. 뻔뻔하면서도 능청스러운 태도에 주변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온다.

글렌이 카타리나를 거들어주기 시작한 건 바로 그때였다.

“후작 부인께서 자네 말을 믿지 않는 것 같으니, 아무래도 직접 두 눈으로 확인시켜 주는 것이 좋겠군. 거울을 가져와라.”

“예에, 여기 있습니다.”

카타리나가 냉큼 거울을 대령한다. 그제야 나디아는 제 목에 걸린 목걸이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직접 착용하는 게 더 예쁘네.’

척 봐도 정성이 들어간 물건이었다. 카타리나가 발빠르게 최상품 비취를 구해온 후, 영지의 드워프들에게 추가 근로를 시켜 완성한 물건이리라.

‘어쩐지 최근 들어 미아르가 잘 보이지 않더니…… 그런 사정이 있었구나.’

나디아는 그가 일부러 자신을 피하는 건 아닐까―마주치면 일 시키니까― 잠시 의심했던 걸 반성해야 했다.

글렌이 초조한 듯 물었다.

“어때?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것으로 구해주지.”

“마음에 안 들긴요.”

드워프의 노동력을 녹여 만든 공예품이 마음에 들지 않을 리가.

발라지트 공작의 아래에 있을 땐 감히 꿈도 꾸지 못했을 물건이었다. 기쁘지 않다면 거짓말이리라.

나디아가 위를 올려다보며 배시시 웃었다.

“정말 고마워요. 제가 가진 물건들 중 가장 귀한 것이 될 거 같네요.”

“…….”

사르르 접히는 눈매가 어찌나 사랑스럽던지. 한순간 말문마저 막힐 정도였다.

그는 잠시 할 말을 고른 후에서야 다시 입을 열 수 있었다.

“그대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나 역시 기쁘군.”

“어머, 웬일로 그렇게 기특한 말을…….”

“사내들이 왜 구애하는 여성에게 보석을 선물하는지 알 것 같아.”

“……네?”

누가 들어도 작업 거는 멘트였다. 듣고 있던 노버트의 뒷목에 기어이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아니, 저기…… 후작 각하.

‘저 아직 여기 있습니다. 손님이 옆에 있다고요.’

갑작스러운 작업 멘트에 노버트만 놀란 건 아니었는지, 후작 부인 역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방금, 뭐라고…….”

“내가 그대를 웃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 몹시 기쁘다는 뜻이었다.”

더는 못 들어주겠다. 참다못한 노버트의 목구멍에서 거친 헛기침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크흠, 크흐흐흠!”

그러자 응접실 안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글렌의 표정이 마치 기묘한 것을 보듯 변한다.

“……자네 언제부터 거기 있었나?”

“처음부터…… 있었습니다.”

“피곤할 텐데 왜 휴식을 취하지 않고…… 아, 설마 사용인들이 손님방으로 안내해 주지 않던가?”

“예…….”

아무도 저한테 관심이 없던데요. 노버트는 하고픈 말을 목구멍 뒤로 삼켜야 했다.

“저런, 실례가 많았군. 고든, 어서 마이어 자작을 처소로 모셔라. 지내는 동안 불편함이 없도록 해야 한다.”

“예, 영주님.”

이윽고 하녀들이 다가와 그를 바깥으로 안내해주었다. 노버트는 그제야 닭살이 돋아난 팔을 벅벅 긁을 수 있었다.

‘후작 부인이 허울뿐인 안주인이라는 건 다 거짓 소문이었구나.’

대체 누가 발라지트 공작의 딸이니 윈터펠에서 입지가 없을 거라는 둥의 헛소리를 해 댄 건가?

실체 없는 헛소문을 믿고 후작 부인을 경시했다간 크게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오늘 보고 느낀 것을 주변인들에게 반드시 전해 줘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노버트가 발걸음을 옮겼다.

* * *

마이어 자작이 떠난 응접실 안.

나디아는 테이블에 앉은 채 거울을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하얀 목덜미 위에 예술품에 가까운 목걸이가 자태를 뽐내고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볼수록 마음에 들었다.

‘갑자기 웬 바람이 불어서 선물 공세를 한담?’

조금 의아하긴 하지만 주는 선물을 마다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기특한 건 기특한 거고,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은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나디아가 옆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글렌, 일부러 그랬죠?”

“뭘?”

“마이어 자작이 보는 앞에서 보여 준 행동들 말이에요. 사실은 그가 응접실에 와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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