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4화
그로부터 얼마 후. 인근 지역 아라곤의 영주, 노버트 마이어와 그의 일행이 윈터펠에 도착했다.
방문 사유는 전대 가주의 쾌차를 축하하기 위함이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렇게 둘러대기로 합의했다.
마이어 가문의 체면을 위한 처사였다. 모자란 식량을 지원받기 위해 찾아왔다고 동네방네 떠벌릴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
식량을 무상으로 나눠 주면서 체면까지 챙겨 주겠다는데 감격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역시 북부의 지배자는 윈터펠이 유일하다! 윈터펠이 아니라면 달리 누가 북부 가문들을 통솔할 수 있단 말인가?’
이번 기회에 윈터펠과 확고한 동맹 관계를 맺으리라. 단단히 다짐한 그가 마차에서 내리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후작 각하!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여러 사람들이 환대를 위해 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개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은색 머리칼의 훤칠한 청년이었다.
‘가운데에 서 있는 이가 가주겠지.’
후계자 시절, 아버지를 따라 공식석상에 간간히 얼굴을 비췄던 소년은 어느새 어엿한 사내가 되어 있었다. 하마터면 알아보지도 못할 뻔했다.
하지만 노버트는 마치 십년지기 친구라도 만난 듯 함박웃음을 지어 보였다.
“윈터펠에 있었던 일들은 모두 전해 들었습니다. 마치 제 일처럼 기쁘더군요. 윈터펠의 호사는 북부 전체의 기쁨 아니겠습니까? 하하하하!”
식량을 지원해 주겠다는데 아부 좀 떠는 거야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글렌이 제 아들뻘의 나이라는 것 역시 그리 중요한 사안이 아니었다.
혼신의 힘을 다해 웃고 있는 노버트에게 글렌이 악수를 청했다.
“오래간만이군. 거의 10년 만인가? 내 아버지께선 자네와 친분이 꽤 깊으셨지.”
“선후작님께서 마이어 가를 잘 대우해 주셨지요. 그분께서 쾌차하셨다는 말에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아, 선후작님도 이 자리에 나와 계십니까?”
노버트가 얼른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아이작의 얼굴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아버지는 내게 작위를 물려준 이후로 완전히 일선에서 물러나셨다. 한 집안에 결정권자가 둘이면 될 일도 되지 않는다고 하시면서 말이야.”
“아아, 참으로 현명한 결정이십니다.”
가신들 중에는 눈에 익은 얼굴이 많았다.
몇십 년째 집사장 자리를 꿰차고 있는 고든이라든가, 선대 후작의 친우이자 신하였던 지스카르라든가.
하지만 세월이 흐른 만큼 처음 보는 얼굴도 존재했다. 글렌과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젊은 여자의 경우가 그러했다.
‘……누구지?’
탐스러운 갈색 머리카락이 눈에 띄는, 드레스 차림의 젊은 여자였다.
입고 있는 옷을 보아 할 때 절대 시녀나 일개 행정관은 아니었다.
‘설마…….’
글렌에게는 여자 형제가 없다. 그런고로 저 여인의 정체는―
“혹시 후작 부인 되십니까?”
“네, 맞아요. 제가 나디아 윈터펠이랍니다.”
“……!”
아니나 다를까였다. 모든 북부인들의 원수, 발라지트 공작의 딸이 바로 눈앞에 있는 것이다.
“처, 처음 뵙겠습니다, 부인. 마이어 가문의 노버트입니다.”
“얘기는 많이 들었어요. 오래전부터 윈터펠의 든든한 우군이었다지요.”
고개 숙여 인사하는 그의 얼굴에 혼란이 가득 찼다.
‘……대체 공작의 딸이 어떻게 이런 자리에까지 나온 거지?’
그녀는 발라지트 공작이 보낸 첩자다. 그러니 공적인 자리에선 철저히 배제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이 자리는 윈터펠과 마이어 가문 사이의 동맹을 더욱 견고히 하는 자리였다. 첩자가 감히 낄 수 있는 자리가 아닌 것이다.
‘그녀가 북부 가문들이 뭉치기 시작하고 있다는 소식을 아버지에게 전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하지만 불안해하고 있는 것은 혼자뿐인 듯, 나디아가 웃는 얼굴로 더한 소리를 해댔다.
“아라곤에 흉년이 들었다는 소식은 들었어요. 마음이 편하지 않으실 테니 우선 본론부터 해결하시죠. 곧장 창고로 가는 건 어때요?”
“……예?”
노버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윈터펠의 물자가 쌓여 있는 곳에 발라지트 가문 사람을 데려간다고?
놀라운 일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나디아의 손에서 열쇠 꾸러미가 찰랑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이건…….”
“아, 창고 열쇠예요. 제가 관리하고 있죠.”
“예?”
가문의 재산을…… 공작의 딸에게 맡긴다고?
너무 눈을 부릅뜬 나머지 눈알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제지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가 도움을 청하는 글렌을 돌아보았다.
“이, 이게 대체…….”
“내 아내가 시간 낭비를 싫어하는 성격이라 말이야. 조금 갑작스럽지만 중요한 일부터 해결하는 건 어떤가?”
괜히 애태우는 일 없이 선뜻 곡물을 내주겠다니, 노버트의 입장에서는 엎드려 반길 만한 일이었다.
한 가지 이해되지 않는 점이 있다는 점만 제외하면.
“각하, 그보다 후작 부인께서는…….”
“내 아내가 왜?”
“…….”
글렌뿐만 아니라 다들 비슷한 반응이었다. 무엇이 문제냐고 되묻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지원받으러 온 처지에 불만을 표할 용기는 그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노버트는 결국 의문을 억누른 채 글렌을 따라나서야 했다.
창고가 있는 곳으로 향하는 동안에도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그러고 보니 자네 가족들의 안부를 묻는 걸 깜박했군.”
“아아, 다들 잘 지내고 있습니다. 제 막내딸이 지난해에 성년식을 치루었지요.”
“막내딸의 이름이…… 아라벨라였지, 아마? 약혼할 가문은 정해졌나?”
“아직입니다. 막내딸이라 그런지 영 내키지가 않는군요, 하하하.”
노버트는 글렌의 왼편에 선 채로 걸어가며 그의 질문에 충실히 답했다. 글렌의 오른편에 선 이는 당연하게도 나디아였다.
의식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도무지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마주치는 사용인들마다 나디아에게 극도로 공손히 인사했기 때문이다.
“안녕하세요, 마님. 밤새 평안하셨나요?”
“으응, 그래.”
어찌나 깍듯하게 인사하는지 머리가 땅에 닿을 지경이다. 심지어 영주인 글렌보다 나디아에게 먼저 인사를 한다.
그 모습을 관찰하는 노버트의 눈이 다시 한번 찢어질 듯 벌어졌다.
‘영주보다 후작 부인에게 더 예의를 갖춘다고?’
머릿속에 온갖 가설이 다 떠올랐다.
‘진짜 발라지트 공작의 딸은 이미 뒷산에 묻어 버렸고, 그녀와 닮은 대역을 내세웠다거나……?’
그런데 그때였다.
글렌의 걸음이 갑자기 멈춰 섰기에, 노버트 역시 발걸음을 멈추고 옆을 바라보아야 했다.
글렌이 제 오른편, 그러니까 나디아를 향해 손을 내밀고 있었다.
“앞은 계단이다. 내 손을 잡고 내려가도록.”
갑자기 웬 에스코트?
노버트의 시선이 다시 앞으로 향했다.
그의 말대로 정말 계단이 있긴 했다. 세 칸짜리 계단이.
“…….”
할 말이 없으니 그저 입을 다물 수밖에.
당황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는지, 당혹스러워 하는 나디아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제가 이 길을 몇 번이나 다녔는데 넘어질 리가 없잖아요.”
“그대는 사소한 부분에서 부주의한 면이 있잖아. 게다가 언제는 굽 높은 구두를 신고 계단을 내려가는 게 불편하다며.”
“아니, 그건 가파른 계단일 경우였고요…….”
꿍얼거리는 것치곤 너무 곧장 남편의 에스코트를 받아들인다.
서로 손을 맞잡은 채 세 칸짜리 계단을 걸어 내려가는 부부의 모습을 보며, 노버트는 자신의 가설에 확신을 더했다.
‘정말 얼굴만 닮은 대역인가? 그, 그럼 진짜 발라지트 공작 영애는 어디에 있는 거지?’
심지어 계단을 내려왔는데도 맞잡은 손을 풀지 않고 있다. 꽁냥거리는 두 사람의 대화가 귓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그대는 손이 참 가녀리군. 세게 붙잡으면 부서질 것 같아.”
“그거야 당신이 매일같이 검을 잡는 기사들만 접하니까 그렇지요. 저는 여자잖아요.”
“아니, 아무리 봐도 그대의 몸은 특히나 여린 편이야. 대체 이런 몸으로 어떻게 하루 종일 업무를 보는 건지…….”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아세요? 여자 손을 많이 만져 봤나 봐요?”
“무슨…… 내가 곁을 내준 여인은 그대밖에 없었다!”
“농담이에요. 뭘 그리 놀라고 그래요?”
후작 부부를 바라보는 노버트의 눈이 점차 가늘어졌다.
저기요, 후작님. 그리고 후작 부인. 저 듣고 있습니다. 옆에 사람 있다고요.
‘그런 대화는 둘만 있을 때 하십쇼.’
어쩌다가 윈터펠의 가주와 발라지트의 딸이 사랑 놀음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지금 두 사람의 모습은 아무리 봐도 신혼생활을 즐기고 있는 잉꼬 부부였다.
노버트는 혹시라도 제 눈이 틀렸을까 싶은 생각에 주변의 반응을 살펴보았다.
뒤에서 걸음을 옮기고 있는 가신들은 하나 같이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다시 한번 확신했다.
‘내 눈이 틀린 건 아니군.’
일단 첫째,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후작 부인은 사용인들에게서 꽤나 공경을 받고 있다.
그리고 둘째,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글렌 역시 후작 부인에게 애정을 쏟고 있다.
원인은 알 수 없지만 눈앞에 보이는 결과를 부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훗날 제 식솔들이 후작 부인을 뵐 때 절대 무례를 범하지 않도록 단단히 주의를 해야겠다.
그가 오늘의 깨달음을 머릿속에 새겨 두는 사이, 일행은 어느새 창고에 도착해 있었다.
“여기예요.”
철컥, 나디아에게서 열쇠를 건네받은 하인이 두꺼운 쇠문을 열어젖힌다.
끼이익―
쇠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창고 안에 든 내용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오!”
황금빛 물결이 그의 시야 안으로 쏟아졌다. 탐스러운 곡물이 창고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