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2화
‘망나니는 망나니인데 말 잘 듣는 망나니라서 정말 다행이야…….’
나디아가 말 위로 올라타며 인사했다.
“다음에 또 봬요. 부디 평안히 지내시길.”
“살펴 가게.”
이윽고 북부로 향하는 행렬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서른 걸음쯤 옮겼을까? 등 뒤에서 왕자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서부 근처에 들를 일이 있다면 언제든 나를 불러내도 좋아! 만사를 제쳐 두고 배웅하러 나갈 테니!”
뒤를 돌아보니 프레이가 커다랗게 팔을 휙휙 흔들고 있다.
나디아는 웃는 얼굴로 마주 손을 흔들어 주며 생각했다.
‘배웅이 아니라 마중이겠죠……. 그런 거 큰 소리로 떠들지 마세요…….’
그의 새로운 스승이 될 자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당분간 고생 좀 하지 싶다.
실소를 흘리는 그녀의 곁으로 글렌이 다가왔다.
“많이 가까워진 모양이군.”
“1왕자님과요?”
“그래.”
“우리가 지지해야 하는 왕위 계승자인데 그가 윈터펠을 신뢰하면 신뢰할수록 잘된 일 아니겠어요?”
“윈터펠을 신뢰한다기보다는 그대를 신뢰하는 것으로 보였다만.”
“그게 그거죠. 최소한 그분이 다음 대 왕이 될 때까지 저는 윈터펠 사람일 테니까요.”
“…….”
그래, 그게 문제였다. 나디아가 이 집안의 안주인 자리에 앉아 있는 건 시일이 정해진 일이라는 것.
만일 두 사람의 계약이 종료된 이후, 프레이가 그녀에게 왕비 자리를 제시하기라도 한다면…….
‘젠장.’
글렌이 아는 나디아는 딱히 물욕이 없는 사람이었다.
다만 일 욕심 하나만큼은 무지막지했다. 나라를 관리할 수 있게 해 준다면 냉큼 받아들일 것 같다.
나랏일을 척척 처리해 내는 나디아의 모습이 너무나도 잘 상상되었다. 글렌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질끈 깨물고 말았다.
기분 탓인지 그녀의 팔목에 달린 팔찌가 더욱 거슬리는 것 같다. 그가 애꿎은 팔찌를 노려보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뭔가 조치가 필요할 것 같군.’
그의 금안에 서늘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 * *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대박입니다. 대풍년이에요.”
글렌과 나디아가 영지로 되돌아왔을 땐, 수확 작업이 대부분 끝난 상태였다.
집사장 고든의 입이 거의 귀까지 벌어져 있다. 다른 가신들의 상태도 마찬가지였다.
“마님께서 개량하신 농기구 덕분입니다. 게다가 흑토 지역의 생산량은 저희가 상상한 것 이상이었습니다.”
“효과가 좋다니 다행이군.”
나디아는 밀의 또 다른 기능을 알게 되었다. 그건 바로 창고에 한가득 쌓인 밀은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행복하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다른 이들의 표정을 보아하니 제게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님이 분명했다.
그녀가 자리를 비운 동안에도 영지는 더욱 풍요로워져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바뀐 점이라면…….
“키잇.”
“…….”
“키이?”
“원래 몬스터는…… 이렇게 빨리 크나?”
“으음, 성체가 되면 집채보다 더욱 커질 테니까요. 사람의 성장 속도를 생각하면 안 되겠죠.”
수도로 떠날 때만 해도 다 큰 고양이만 하던 것이 어느새 사냥개만큼 커져 있었다.
“키익.”
“커헉!”
심지어 꽤 무겁다. 아직도 제가 고양이만 한 크기라고 생각하는 건지, 예전처럼 품 안으로 뛰어들자 절로 억 소리가 나왔다.
“어딜.”
글렌이 고통스러워하는 나디아 위에서 얼른 노아를 치워 주었다. 그제야 그녀는 다시 숨을 쉴 수 있었다.
“허억…… 조만간 사람보다 더 커지겠는데요.”
“그리 되면 실내에선 키울 수가 없겠지. 어쩔 수 없이 바깥에 보금자리를 만들어 줘야겠군.”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치고는 표정이 꽤나 기뻐 보였다.
“성체가 되면 아예 성 바깥에서 키워야 될지도 모르겠는걸.”
“그죠. 집채보다 더 커질 테니까요.”
“키익?”
제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분위기를 읽은 듯, 노아의 눈이 동그래진다.
“키이…….”
나디아와 글렌을 번갈아보던 그것이 이내 무언가 결심한 듯 결연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더니 공중으로 살짝 점프했다.
“어?”
“응?”
네 발로 카펫 위에 착지했을 때, 노아는 예전처럼 고양이만 한 크기가 되어 있었다. 당연하게도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고, 고든.”
“예, 마님.”
“얘가…… 이런 재주도 부릴 줄 알았어?”
“그, 글쎄요. 몬스터 중에는 자기 몸집을 조절할 수 있는 종류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용도 몬스터의 한 종류니까…… 종족적인 특성 아닐까요?”
“내가 자리를 비웠을 때도 몸집을 줄였던 적이 있나?”
“일단 저는 처음 봅니다.”
“아니, 그럼 왜 갑자기…….”
글렌은 저 얄미운 파충류의 정체를 까발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우리가 하는 말을 알아들은 걸지도 모르지. 어쩌면 우리가 안 보는 곳에선 사람 말을 할지도 몰라.”
“에이, 그럴 리가요.”
몸집을 줄인 노아가 다시 나디아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릉그릉 소리를 내며 비비적거리는 모습이 마치 검은 고양이 같다.
“짐승이라 눈치가 빠른 거겠지요. 아, 귀여워라.”
“…….”
글렌은 애교 부리고 있는 검은 용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이쪽으로는 시선도 두지 않고 애교만 부리고 있다. 그게 더 얄미웠다.
언젠가 저 가증스러운 용의 실체를 낱낱이 까발리고 말리라. 그가 그런 다짐을 마음속으로 다지고 있을 때였다.
“영주님, 말씀하신 물건을 가져왔습니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글렌이 가져오라 명했던 물건이 도착했다.
하인들이 양 팔로 안고 있는 것은 화려한 상자였다.
내용물을 보지 않아도 그 용도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저건 보석함이다.
‘그나저나 왠지 눈에 익은 물건인데…….’
어디서 봤더라? 나디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글렌, 당신이 가져오라 한 거예요?”
“그래.”
“저게 뭔데요? 아니, 보석함인 건 알겠네요. 그런데 갑자기 저건 왜요?”
“보석함인 건 맞아. 어디서 본 것 같지 않나?”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어머니가 사용하셨던 액세서리를 모아둔 함이다. 아마 집사가 진작 보여 줬을 것 같은데.”
“아.”
그러고 보니 윈터펠에 온 지 얼마 안 됐을 무렵, 집사가 내성을 안내하며 드레스룸을 소개시켜 줬던 것 같다. 그때 본 기억이 난다.
시간이 지날수록 낡은 티가 나는 옷과 달리, 보석류는 대를 이어서 사용하는 경우가 잦았다.
‘그때는 전대 안주인의 물건 같은 걸 신경 쓸 여유가 없었으니까…….’
다 망해 가는 집안 재정을 살리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전대 후작 부인의 물건 같은 걸 살펴볼 생각도 못 했고, 시간이 흐른 뒤에는 아예 머릿속에서 잊혀 버렸다.
“그대가 까맣게 잊고 있는 것 같아서 말이지. 어머니가 사용했던 방에 그대로 있었다는데.”
달칵. 글렌이 보석함을 열며 말했다.
“전대 안주인의 물건을 물려받는다는 건 상징적인 의미가 있으니까. 이참에 하나 골라서 차고 다니는 건 어때?”
“이제 와서 저를 후작 부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래요?”
게다가 어차피 언젠가는 돌려줘야 할 물건이 아닌가? 제 것도 아닌 물건에 괜히 흠집을 내고 싶진 않았다.
“저는 괜찮아요. 어머니의 유품인 셈인데 제가 사용하다가 흠이라도 나면 어쩌려고요?”
“내가 그대를 홀대하는 것처럼 비춰지느니 흠집이 조금 나는 게 낫지.”
“음…… 그런 거라면, 뭐.”
나디아는 금방 수긍했다.
자칫 다른 사람들 눈엔 글렌이 아내의 능력만 이용해 먹는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다는 데에 생각이 미친 것이다.
“그럼 반지 하나만 고를게요.”
선택지가 많으면 많을수록 선택이 어려워지는 법이다. 나디아는 수십 개의 반지 앞에서 한참 동안 낮은 신음을 흘려야 했다.
그녀가 한참 동안 반지를 골라내지 못하자, 글렌이 도와주기 위해 입을 열었다.
“선호하는 색상이 있나?”
“초록색을 좋아하긴 해요. 제 눈동자 색깔이라.”
“그럼 좋아하는 색깔의 보석을 고르는 건 어때?”
“그거 좋겠네요. 특히 비취를 좋아하거든요. 어디 보자…….”
나디아가 원하는 물건을 찾아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렸다. 그리고 그녀는 곧 깨달을 수 있었다.
“비취, 없는 것 같은데요.”
“……그런 것 같군.”
“인기가 많은 보석은 아니니까 어쩔 수 없죠, 뭐. 그러고 보니 카레인도 항상 비취는 고르지 않았던 것 같네요. 그 덕에 제가 그거라도 받을 수 있었던 거지만…….”
그녀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생각해 보니 제가 비취를 좋아하는 것도 그 때문인 것 같아요. 제가 가질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물건이었으니까.”
녹색 보석이라 하면 보통 에메랄드부터 떠올리기 마련이니 말이다. 전대 후작 부인의 유품 중에 비취가 없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때, 글렌이 입을 열어 말했다.
“난 좋아한다.”
“뭐를요? 비취요?”
“그래, 나는 매우 좋아해. 비록 비취는 모르는 것 같아서 안타깝지만.”
“…….”
그 말에 나디아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아야 했다.
고개를 드니 글렌과 시선이 딱 마주쳤다. 어쩐지 묘한 기분이 든다.
‘방금 뉘앙스가 좀……. 보석 얘기하는 거 맞지?’
분명 비취 얘기가 맞는데…… 맞긴 한데…… 왜 이렇게 묘하게 들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좀 더 확실히 하기 위해, 나디아가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좋아한다고요, 비취를?”
“그래, 제일 좋아한다.”
“보석류 중에서 비취를 제일 좋아한다는 사람은 처음 봐요.”
자신과 같은 취향의 사람이 있다니 신기하기 짝이 없었다. 보통 귀족들에게 제일 선호하는 보석류가 무엇이냐 물으면 더 값비싼 종류를 꼽기 마련이다.
‘아무래도 비취는 그리 값나가는 보석이 아니니까…….’
그런데 그때였다. 파비안이 중얼거리듯 말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와아…… 우리 영주님도 제법인…… 아악, 내 발!”
채 한 문장을 끝맺지도 못하고 발을 붙잡은 채 폴짝폴짝 뛰어야 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