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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화 (100/142)

제100화

나디아는 즉시 프레이에게로 안내될 수 있었다. 왕자궁에 다른 방문객이 없었던 덕분이었다.

바스락. 그녀가 마른 잔디를 밟으며 왕자가 앉아 있는 벤치로 다가갔다.

벤치 위에 앉은 채 축 늘어져 있는 프레이의 모습이 보인다. 힘 빠진 얼굴에서부터 그의 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디아가 입을 열어 말했다.

“여기 계셨군요.”

그제야 축 늘어져 있던 왕자가 천천히 고개를 든다. 그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또 보는군, 후작 부인.”

“저도 또 뵙게 되어 기쁩니다.”

“어머니를 뵈러 입궁했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어.”

“어쩌다 보니 뭐, 이렇게 되었네요.”

“그보다 나를 긴히 봐야 할 일이 있다고 했다며?”

“왕궁의 시녀들이 왕자 전하와 스승 사이에 다툼이 있었다고 떠드는 얘기를 들어서 말입니다.”

“아, 그게 벌써 소문이 퍼졌나?”

힘없는 표정을 짓고 있던 프레이의 얼굴에 놀라움이 퍼졌다.

“허…… 하긴, 왕궁은 원래 그런 곳이지.”

그런 곳인 줄 알면 문제를 일으키지 말았어야지. 잔소리가 목구멍까지 솟구쳤으나 나디아는 참았다.

‘저 무던한 성격에 일부러 싸우지는 않았을 테고…… 무언가 감정적으로 쌓인 게 있었을 테지.’

일단 파비안이 미처 알지 못하여 전해 주지 못한 속사정을 파악하는 것이 먼저였다.

나디아가 얌전히 서 있는 궁인들을 향해 말했다.

“너희들은 물러가라.”

그러자 시종과 시녀들이 눈짓으로 프레이의 동의를 구한다.

그들은 주인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 확인한 후에서야 멀찍이 떨어져 나갔다.

프레이가 물었다.

“한데 궁인들은 왜?”

“전하께서 입 밖으로 꺼내기 어려우실 내용을 묻고 싶어서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

나디아는 최대한 부드럽게, 탓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도록 노력하며 재차 질문해야 했다.

“2왕자님이 유폐되어 있는 동안, 전하께선 모범적인 왕위 계승자의 모습을 보일 필요가 있어요. 그리고 기껏 데려온 스승과 싸우는 것은 모범적인 모습과는 한참 거리가 있는 일이에요. 그럼에도 화를 내셨다는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겠지요.”

“…….”

“일부러 다투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 잘 압니다. 이유 없이 신경질을 낼 분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요. 그러니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 말씀을 해 보세요.”

“후, 후작 부인…….”

나디아의 인내심이 효과를 발휘했다. 프레이가 울먹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던 것이다.

“저, 정말 나를 믿어 주는 건가? 탓하려는 게 아니라?”

“모든 갈등에는 원인이 있는 법이지요. 저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

프레이가 감동 받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고자질하는 어린아이처럼 미주알고주알 떠들기 시작한다.

내용은 대충 이러했다.

나는 정말 잘해 보려고 했다. 일전에 나를 가르쳤던 스승에게 찾아가 다시 한번 수업을 청했을 만큼.

그런데 제대로 수업을 하지도 않더니 나더러 책을 내용을 요약해 보라는 둥, 이해하지 못하는 게 이상한 거라는 둥, 온갖 무례한 소리를 해 대는 것 아닌가?

그게 가능했으면 그냥 독학을 했겠지!

귀족 출신 학자들은 언제나 그랬다. 사정을 모르는 이가 봤다면 그자들이 웃전인 줄 알았을 거다.

아무리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도 두 달을 못 넘기고 사직을 하더라. 그러고 보니 오늘 그자가 최단기간을 갱신했군.

말 한마디 한마디가 어쩜 그렇게 사람 자존심을 긁는지……. 부인도 내 입장이 되어 보면 이해할 수 있을 거다.

그래도 다시 한번 나를 찾아와 줬기에 정말 잘 지내보려고 했다. 이번에는 정말 내 역할을 해내서 인정받고 싶었다. 그랬는데…….

“또 이렇게 되어 버렸군…….”

하아, 그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러고는 삶은 야채처럼 벤치 위로 축 늘어진다.

나디아는 프레이가 했던 말을 곰곰이 되새겨보다가 입을 열었다.

“왕사들이 전부 두 달을 못 넘기고 사직을 했다고요……?”

“그들이 보기에 내 재능이 하찮게 보였겠지. 가르칠 가치가 없었으니 포기한 거였을까? 그래…… 그리 생각하니 그들의 잘못만은 아니군. 내 배움이 빠르지 못한 것이 근본적인 원인이겠지…….”

“…….”

나디아의 표정이 굳었다. 기껏 불어 넣은 의욕이 꺼져 가는 게 눈으로도 보였던 것이다.

‘아무래도 이상해.’

왕족의 스승이란 굉장히 명예로운 직함이다. 아무리 제자가 마뜩잖다 한들 그런 명예직을 두 달만에 내던져 버릴 리가.

“한 가지만 여쭤도 되겠습니까?”

“응?”

“여태껏 전하를 가르친 왕사들은 어떤 방식으로 정해진 건가요?”

“대부분은 어머니의 추천으로 연결되지. 오늘 때려치우고 나간 자는 아니었지만.”

아니, 그자도 필히 왕비와 연이 닿아 있는 자일 것이다. 나디아는 그리 확신했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제야 감이 잡힌다.

‘직접 나섰다간 비난을 받을 테니, 좀 더 지능적인 방식을 사용한 것이지.’

자질을 끊임없이 깎아내려 스스로 의지를 접게 만드는 방식이다. 수많은 학자들이 도저히 못 가르치겠다며 떠나간 기억은 뇌리에 강렬하게 남게 되리라.

나이가 어릴수록, 타인에게 거부당한 경험은 그리 쉽게 잊히는 것이 아니었다.

같은 일을 반복해서 겪은 어린 왕자가 무기력함을 학습해 버린 것도, 학자 놈들은 이제 더 이상 꼴도 보기 싫다며 자포자기해 버린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리라.

어릴 적의 나디아가 제 재능을 깨닫지 못했던 것처럼.

이 사람을 수도에 놔둬서는 안 된다. 그리 판단 내린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볼 때는 여태껏 왕사들이 전부 사직한 건 다른 이의 입김이 닿아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응? 누가 그런 짓을…… 설마 어머니가?”

“높은 확률로 그렇겠지요. 왕자들의 교육을 책임지는 것은 왕비이니까요.”

“어, 어…… 그런가?”

프레이의 표정이 멍해졌다. 생각해 보니 그럴듯했던 것이다.

리암이 오래전부터 자신을 적으로 보고 있었다는 것이 이번 일로 명확해졌다. 그렇다면 그의 친모인 왕비 역시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나디아가 재차 입을 열었다.

“제 생각에는 당분간 수도에서 떠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제 아버지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어요. 그래, 전하의 외숙부인 오르델 백작의 영지가 좋겠네요.”

일단 제대로 된 보호자 밑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아야 한다.

오르델 백작이라면 프레이의 외척이니 조카를 방치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게…….”

그런데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 것이 무색하게도, 어째 본인의 반응이 시원찮았다.

프레이가 시무룩한 얼굴로 대답한다.

“외숙부가 날 반겨 줄지 모르겠단 말이지.”

“어째서요? 조카가 왕위에 오른다면 득이 되었으면 되었지, 해가 되진 않을 텐데요.”

“그렇다고 생각했으면 진작 날 돕고 있었을 거다. 내게 실망했다면서, 오래전에 영지로 되돌아가선 나와 연락하지 않았어. 수도의 일에 간섭할 생각은 없다나?”

“…….”

“내가 리암을 경계해야 한다는 외숙부의 조언을 계속 무시한 탓일 거야. 그 정도 상황 판단 능력이라면 동생에게 왕위를 넘기고, 유폐되는 날을 기다리는 게 이 나라를 위하는 길일 거라더군.”

“그…….”

나디아의 표정이 난처하게 일그러졌다.

조카가 사지를 걸어 들어가는 모습이 안타까웠던 건 이해하지만, 말이 좀 심하긴 했다.

“심지어 나 때문에 월식이 일어난다는 헛소문이 돌 때도 나를 찾아오지 않았지. 탄신연 때문에 수도에 와 있었는데도 말이야.”

“…….”

“나는 무서워. 괜히 외숙부를 찾아갔다가 또 무슨 말을 들을지…….”

시무룩한 그의 얼굴에는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슬픔, 분노, 원망, 두려움, 기대, 그리고 좌절.

이런 상태의 인간을 움직이는 것은 쉽지 않다. 어떻게 해야 프레이가 외숙과의 관계회복을 시도하게끔 만들 수 있을까?

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연기를 시작했다.

세상에 그리도 건방진 작자가 존재할 수 있느냐는 듯, 경악한 표정으로.

“그거 참 무도한 자로군요! 아무리 친척 어른이라 할지라도 그는 왕에게 충성 서약을 맺은 봉신일 뿐이에요. 어떤 신하가 감히 왕의 자질을 논할 수 있단 말인가요?”

“그, 그런가?”

“윗사람의 자질을 두고 왈가왈부 논하다니, 그건 불충입니다!”

그녀가 적극적으로 제 편을 들어주자, 프레이는 조금 당황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눈동자에서 자신감이 살아나고 있다.

저걸 단순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제 편 하나 없는 왕궁에서 자란 것을 안타깝다고 해야 할지.

나디아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왕자를 향해 말을 이어 나갔다.

“제게 그 무례한 자의 콧대를 납작하게 눌러 줄 방법이 있습니다.”

“그런 방법이 있다고? 그게 대체 뭔가?”

“바로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음을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것이죠.”

“……?”

선뜻 이해하지 못한 표정을 보아하니 좀 더 상세한 표정이 필요한 듯싶다.

“오르델 백작에게 찾아가서, 과거의 조언을 무시했던 일에 대해 먼저 사과하세요.”

“뭐?”

“전하께 그럴 만한 그릇이 있다는 것을 몸소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그가 무례한 언사를 일삼은 것은 전하께 왕위를 이을 자질이 없다고 판단내렸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그 판단이 틀렸음을 보여주세요. 위기를 겪은 후에 바뀌셨다는 걸 깨닫게 하세요.”

“아, 아니, 그렇지만…… 고작 그 정도로 외숙이 태도를 바꿀까? 난 회의적이다만.”

“실망이란 것은 기대를 걸었을 때 하는 법이에요. 그가 전하께 쓴소리를 했던 것은 애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

“그러니 신하에게 먼저 도량을 보여 주는 것을 꺼리지 마세요. 그건 전하의 체면을 깎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세우는 일입니다. 전하께서 조금만 태도를 바꾸셔도 오르델 백작은 금방 손을 맞잡아 올 겁니다.”

프레이는 대답 없이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반박의 말이 돌아오지 않는 것만 봐도 이미 반은 설득된 것이나 다름없다.

나디아가 좀 더 은근하게 속삭였다.

“그자가 끝내 전하를 인정하고 마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으세요?”

“으음…….”

“그건 단순히 윽박질러 무례에 대한 사과를 받아내는 것보다 훨씬 더 통쾌한 승리랍니다.”

왕자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외숙을 원망하는 마음보다는 그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욕구가 더 컸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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