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7화
그녀에게 고마워하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스킨십이 너무 긴 것은 두고 볼 수가 없었다.
1왕자가 아직 미혼이라는 것이―한량 노릇을 하느라 여태 결혼을 미뤘다― 더욱 기분이 찝찝하게 만든다.
글렌이 나디아를 살짝 제 쪽으로 끌어당기며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복구 비용 말인데, 저희 윈터펠에서도 비용을 일부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이거 참 고맙군. 부왕께서는 북부를 홀대했는데 이리 도움을 주다니.”
“윈터펠에서 복구에 지원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기만 하면 됩니다.”
“그거라면 걱정 말게. 아 참, 그대들에게서 많은 도움을 받았으니 나도 도움을 한 가지 주고 싶다만.”
“……?”
다시 자신을 바라보는 프레이의 시선에 나디아의 고개가 갸우뚱 기울었다. 웬 도움?
“후작 부인, 리암 때문에 손목을 잃었다는 그 하녀 말인데, 이름을 알고 있나?”
“……예?”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즉석에서 창조해낸 가상의 인물이니까.
나디아의 목덜미에 식은땀이 맺힌 걸 알기나 하는지, 프레이가 밝은 얼굴로 말을 이어나갔다.
“어릴 적 부인의 유일한 말동무였다며. 내가 도울 수 있다면 돕고 싶군. 왕족의 추천서가 있다면 비록 장애가 있다 해도 편한 일자리에 취직할 수 있을 거야. 내가 그 하녀에게 추천서를…….”
“마, 말씀은 감사하지만……!”
“응?”
“그 아이는 시골의 고향으로 내려가서 가족들과 잘 살고 있다고 해요. 굳이 수도로 불러올 필요가 있을까 합니다.”
“그래? 뭐, 고향에서 잘 살고 있다면 어쩔 수 없지.”
프레이가 어깨를 으쓱한다. 아무래도 나디아의 말을 의심하지는 않는 듯했다.
“혹시라도 수도에서 일하고 싶다고 한다면 언제든 말하게. 좋은 일자리를 소개시켜줄 테니.”
“마음 써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아군의 말은 의심 안 하는 성품이라서 정말 다행이다. 그녀가 남 몰래 목덜미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 내렸다.
* * *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가? 언제부터 일이 하나씩 잘못되어 갔던 거지?’
대체 어쩌다가 상황이 이렇게까지 잘못된 것일까?
발라지트 공작은 창밖을 내려다보며 일의 원인과 결과를 되짚는 중이었다.
북부를 칼라아이 원정에 끌어들였을 때만 해도 반은 승리했다고 생각했다. 수도는 완전히 제 손 안에 있었고, 공작가와 손잡은 왕위 계승자는 더할 나위없이 훌륭했다.
거기다 적의 중심부에 제 눈이 되어줄 여식을 첩자로 심기까지.
모든 것이 그의 뜻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윈터펠이 잠시 위축됐던 세를 불리기 시작한 것은 그 이후…… 그래, 나디아가 시집간 직후다.
딸이 매입한 가시덩굴 허브가 전염병의 치료제라는 게 밝혀지면서부터.
윈터펠이 레이나 지역을 집어삼킨 것도, 적녀가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해 가문의 이름에 먹칠을 한 것도, 왕위 계승자로서 지원했던 2왕자의 명성에 치명상을 입은 것도…….
‘전부 나디아가 윈터펠 후작과 결혼한 이후였다!’
국왕의 탄신연 당일, 나디아가 카레인의 죄를 공개적으로 고발한 순간부터 느낀 찝찝함이 다시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그게 분노 때문인지, 공포 때문인지는 본인도 알지 못했다.
공작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에이든.”
“예, 백부님.”
“윈터펠이 알테어와 영지전을 벌였던 당시…… 나디아가 직접 전선으로 찾아갔다는 보고를 들은 적이 있는데, 내 기억이 제대로 된 건가?”
“예, 맞습니다. 그런 보고를 올라왔던 것 같군요.”
“그렇다면 그 애가 왜 거기까지, 무슨 구실로 갔는지 기억하나?”
“표면적인 이유는 남편에 대한 상사병 때문이었습니다만, 물론 본심은 그게 아니었겠지요. 사령부를 염탐하기 위함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래서 나디아가 윈터펠을 방해하는 데에 성과를 거뒀던가?”
“어, 그건 아니지만 안주인의 지위로는 전투를 방해하는 건 실질적으로 몹시 힘든 일입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
“그래, 그게 문제였다! 그리 안일하게 생각했던 게 문제였단 말이다! 가시덩굴 허브 때도 우연에 우연이 겹칠 것뿐이라며 의심을 지워 버렸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디아가 자신을 배신했다는 명확한 증거는 없었다.
하지만 몇 번이나 물을 먹고도 의심조차 하지 않는다면 그의 나이가 무색해질 것이다.
무엇보다 육감이 그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딸에 대한 의심을 방치한다면 언젠가 더욱 큰 위기에 처할 것이라고.
‘거기다 발롱 성이 함락당한 것은 성벽 아래의 약점 때문이었다. 만일 나디아가 ‘그’ 자료를 몰래 훔쳐봤다면…… 그래, 후작이 어떻게 그걸 알고 있나 했더니, 그 애가 유출한 것이었군. 금고에 보관된 자료에 대체 어떻게 접근한 것이지?’
심증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프레이를 음해하도록 부추긴 것은 다름 아닌 나디아 아니었던가?
긁어 부스럼이라고, 괜히 프레이를 끌어 내리려다가 애꿎은 리암만 근신하게 되었다.
나디아와 대화를 나눴을 당시에 느꼈던 불길함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에이든이 재차 물었다.
“그러니까 백부님의 말씀은 나디아가 윈터펠을 돕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뜻입니까?”
“그래, 그 애가 북부로 간 이유는 그곳에서 첩자 역할을 수행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1년이 다 되어 가도록 우리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준 적이 있느냐?”
“하지만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그 애에겐 그럴 이유가 없는걸요. 왜 그 애가 생판 남인 윈터펠 후작을 돕는단 말입니까?”
“그거야 본인에게 물어봐야 알 일이지. 어쩌면 사내놈과 살을 맞대다 보니 정이 들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배은망덕한 것 같으니.”
그 순간, 같은 방 안에 있던 이지호의 주먹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발라지트 공작에게 이목이 집중되어 있었기에 그 장면을 발견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수도 내에서 그 애의 행적에 대한 목격담이 있나?”
“왕비 전하께 자주 찾아간다고 들었습니다. 대화 내용은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귀부인들의 대화라 합니다. 굳이 눈여겨볼 점을 찾자면 왕비 전하께 약을 선물했다는 것 정도일까요?”
“……약?”
“후작가가 아직 수도를 떠나지 않는 이유가 그것이랍니다. 비전하의 요청으로 약을 제조하느라 시일이 늦어지고 있다는군요.”
에이든은 귀부인들의 일이라는 듯 대수롭지 않은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발라지트 공작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이곳에 오래 머무를 구실까지 준비해온 것이구나.’
애초에 왕위 계승 구도에 변화를 만들 작정으로 국왕의 탄신연 초대를 받아들였으리라.
그 치밀함이 얼마나 가증스럽고…… 또 한편으로는 얼마나 위협적인지. 그의 입술 사이에서 작게 이 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애가 수도를 빠져나가기 전에 매듭지을 필요가 있겠군.’
제 영역인 수도를 벗어나기 전에 해결해야 한다. 그가 서둘러 말을 이었다.
“에이든, 나디아에게 연락을 해서 공작저로 찾아오게 만들어라. 그래, 일전에 식사를 함께 하기로 했었지. 떠나기 전에 가족과 식사를 하자는 구실로 불러들이는 게 좋겠다.”
“알겠습니다.”
분노로 정신이 팔린 발라지트 공작은 미처 보지 못했다. 아끼던 가신의 눈빛이 묘하게 변하는 것을.
* * *
“흐윽, 흑.”
장엄하게 꾸며진 왕비의 응접실. 그곳의 주인이 구슬픈 울음소리를 내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나디아가 생각했다.
‘위로…… 잘하는 편은 아닌데…….’
부탁받은 약을 완성하여 들고 오긴 했는데 어째 분위기가 어둡다.
승승장구할 것 같았던 아들의 앞길에 불쑥 암초가 솟아올랐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한참 구슬프게 울던 왕비가 입을 열었다.
“이렇게 억울한 일이 또 있나요? 애당초 제방의 공사 예산을 빼돌린 것은 리암이 아니었는데……. 왜 그 아이가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단 말이에요!”
왜긴. 그 자를 책임자로 추천한 것이 당신 아들이니까.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디아는 굳이 속내를 입 밖에 내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다.
‘다 알고 있으면서 눈감아 준 것 아니겠어?’
자신의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선 아랫사람들에게 콩고물을 나눠줘야 한다.
다시 말해 국가 예산을 빼돌릴 기회를 순서대로 나눠 주다가 운 나쁘게 걸린 거라는 뜻이었다. 이 나라에서는 그런 일이 흔했다.
당장 그녀의 아버지, 발라지트 공작부터가 그런 방식으로 부를 축적하지 않았던가?
‘어찌됐건 윗사람이 울고 있는데 나 몰라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하고픈 말은 많지만 참아야 할 때였다. 나디아가 서툴게 위로를 시작했다.
“말이 유폐지 근신일 뿐이라는 걸 잘 아시잖아요? 민심을 가라앉히기 위한 일시적인 조치일 뿐이에요. 곧 돌아오실 겁니다.”
“아무리 그래도 궁에서 한 발자국도 못 나오게 하다니…….”
감옥에 가둔 것도 아니고 제 침실에서 편히 쉬고 있을 사람이 뭐가 그리 안타까운 것인지.
‘회귀 전에는 강기슭 마을 주민들 대부분이 죽었단 말이다.’
공사를 제대로 했다면 피해가 없었거나, 최소한 피해가 적었을 것이다. 그리 생각하니 머릿속이 차가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녀가 표정을 갈무리하며 말을 이었다.
“국정을 보좌하느라 왕자 전하께서도 많이 고되셨을 거예요. 이참에 휴식을 취하는 것도 좋겠지요.”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