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5화 (95/142)

제95화

글렌에게 진실을 밝힌 이후, 선후작은 단 한 번도 그녀에게 후사를 재촉하지 않았다.

결혼한 지 1년이 된 아들 부부가 합방을 하지 않는데도 방관하기만 하다니.

며느리에 대한 신뢰가 굳건하다는 걸 감안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나디아가 궁금하다는 얼굴로 위를 올려다보자, 그의 얼굴이 점차 붉어지기 시작했다.

“조금…… 말하기가 민망한데.”

“뭔데 그래요? 혹시라도 나중에 우리끼리 말이 안 맞으면 안 되잖아요. 빨리 말해 봐요.”

글렌이 머뭇거리다가 끝내 입을 열었다.

“그대가 겁이 많아서…… 진도를 조금 천천히 나가는 중이라고 둘러댔다.”

“꽤 그럴듯한데요? 잘했어요. 그럼 설정상 우리는 지금 어디까지 진도를 나간 거예요?”

“그, 그건…….”

“부끄러워할 것 없어요. 나중에 말 안 맞아서 거짓말한 거 들키는 것보단 낫잖아요.”

“……입맞춤까지 한 걸로…….”

“아하.”

나디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근데 그럼 ‘설정상’이 아니지 않나요? 실제로 했잖아요. 입맞춤.”

“……!”

결혼식 때도 했고, 그가 제게 황금 장미를 바친 날에도 했다. 과거의 일을 상기시켜 주자 글렌의 얼굴이 단숨에 달아올랐다.

붉게 변한 얼굴을 가리키며 그녀가 웃음을 터트렸다.

“도, 도대체 그대는 부끄러움이란 게……!”

“원래 황금 장미를 받는 레이디는 기사들에게 그 정도 스킨십은 해 준다고요. 뭘 그렇게 부끄러워해요?”

웃음소리가 한동안 이어졌다.

* * *

왕궁의 분위기는 전에 없이 흉흉했다.

첫째 왕자에 이어 둘째 왕자까지 불명예스러운 소문에 휘말렸기 때문이다.

보좌관에게서 전해 들은 일에 대해 까맣게 잊고 있었던 리암은, 떠도는 소문이 몸집을 불려간다는 말을 전해 듣곤 분노를 터트렸다.

“……이렇게 빨리 소문이 퍼져 나갔다는 건, 누군가 의도적으로 말을 옮겼다는 것이다.”

유언비어를 퍼트리는 건 얼마 전 그가 시행했던 일이었기에, 리암은 알 수 있었다.

이리 빠르게 소문을 퍼트리는 건 누군가의 인위적인 개입 없이는 힘든 일이라고.

“……형님이 발악하고 계시는가 보군. 공작은 이 일을 알고 있는가?”

“아마 지금쯤 전달되었을 겁니다.”

“별다른 얘기는 없었나?”

“예.”

“그렇다는 건 그 역시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는 거지.”

하긴, 생각해 보면 그랬다. 그 따위 헛소문에 휘둘렸다간 왕실의 권위가 우습게 될 뿐이다.

자신이 대대적으로 제방을 보수한 후에 비가 내리지 않으면 일국의 왕자가 헛소문 따위에 놀아났다는 소리를 들을 것 아닌가?

왕이 될 자는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이어야 했다. 결코 우스갯소리의 소재가 되어선 안 된다.

아랫것들이 자신의 실책을 비웃는다고 생각하니 내장이 뒤집어지는 것만 같았다.

‘형님이 이런 짓을 한 이유는…… 내게도 같은 추문을 퍼트려서 본인에게 쏠린 이목을 분산시키려는 계획이었을까?’

어찌 됐든 조금만 기다리면 승패가 확실히 갈릴 일이다.

폭우가 쏟아져 제방이 무너질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고, 그에 비해 달은 종적을 감출 테니.

리암이 커튼을 젖혀 창밖을 올려다보았다. 가을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높고 푸르렀다.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절로 피식 웃음이 새어나온다.

‘이 시기에 수재가 일어날 리가 없지.’

나를 기만하려면 조금 더 그럴듯한 그림을 그렸어야지.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화창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초하룻날에 다다라서는 조금 구름이 끼긴 했지만 폭우가 내릴 정도는 아니었다.

리암은 안심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자고 일어나면 자신을 괴롭히던 헛소문은 씻은 듯 사라져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툭, 투둑.

빗물이 한 줄기씩 내리기 시작했다.

* * *

모두가 잠에 빠져든 한밤이었다.

깨어 있는 이 하나 없는 마을이었지만 온 사방이 굉음으로 진동하고 있었다. 늦저녁부터 조금씩 내리던 부슬비가 점차 굵어진 탓이었다.

굵은 빗방울이 오두막의 지붕을 거세게 두드린다. 그 소리에 몇몇 예민한 이들이 잠에서 깨어나기도 했다.

빗소리만이 울려 퍼지는 마을 안에 한 무리의 병사들이 들이닥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짝을 지어 흩어진 병사들은 마을을 이리저리 휘저으며 대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쾅쾅쾅!

-쾅, 쾅!

“계시오? 계시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을 주민이 문을 열고 나섰다.

“무슨 일입니까, 나리?”

“폭우 때문에 제방이 붕괴될 우려가 있소. 서둘러 가족들과 함께 다른 장소로 대피하시오. 대피하지 않을시 안전은 책임지지 못하오.”

“아니, 그게 대체…….”

묻고 싶은 것은 많았으나 이름 모를 병사들은 질문할 틈을 주지 않았다. 말을 끝내자마자 곧장 다음 집으로 걸어가 버린다.

홀로 남겨진 아무개는 멀뚱멀뚱 그들이 달려간 방향과 하늘을 번갈아 봐야 했다. 마치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그때, 막 잠에서 깨어난 아들이 눈을 부비며 문을 열고 나온다. 그 뒤에는 마찬가지로 잠에서 덜 깬 아내가 비척비척 걸어오고 있었다.

그 순간 그는 마음을 정했다. 일단 중요한 물건들만 챙겨서 대피하기로.

‘가족의 목숨을 두고 도박을 할 수는 없지.’

폭우가 내리는 빗길 사이로, 마을을 떠나는 사람들의 행렬이 길게 이어졌다.

* * *

같은 시각.

나디아는 윈터펠 가의 거처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

달그락.

창밖만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옆으로 그릇이 내려왔다. 간단한 간식거리가 담겨 있는 그릇이다.

나디아가 그릇을 잡고 있는 손을 따라 위를 올려다보았다. 글렌이다.

“이만 눈 좀 붙이지 그래?”

“긴장돼서 잘 수가 있어야죠. 여기서 일이 잘못되면 앞으로의 일이 다 꼬이는걸요.”

“그대의 말대로 폭우가 내리고 있잖아. 더 기다릴 것이 남았나?”

“제가 예상한 대로라면 제방이 무너질 테니, 1왕자님이 인근 마을 사람들을 다 대피시켰다는 소식까지 들어야 안심하고 잠들 수 있을 것 같아요.”

사람의 목숨도 목숨이지만, 한량으로 소문난 프레이의 평판도 끌어올릴 필요가 있었다.

아마 지금쯤 1왕자궁의 병사들로 위장한 가신들이 주민들의 대피를 돕고 있을 것이다.

이로써 어느 왕자가 달이 경고한 재앙일지는 그 누구의 눈에도 명백하리라.

드르륵.

초조하게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나디아는 의자가 끌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글렌이 제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있다.

그가 의자에 착석하며 말했다.

“그럼 나도 함께 기다리는 걸로 하지.”

“언제 소식이 도착할지 모르는데요?”

“이건 그대에게만 중요한 일이 아니잖아. 나도 기다리는 게 맞지.”

“그도 그러네요.”

나디아는 새삼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발라지트 가문은 그녀에게도 복수의 대상이지만 글렌에게도 숙적인 것이다.

‘아버지와 맞설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영주가 하필이면 결혼 적령기라서 얼마나 다행인지…….’

만일 윈터펠 가문이 없었더라면 나디아는 미래에 일어날 일을 알고 있다는 이점을 가지고도 상당한 고난을 맞이했을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서 성을 쌓아올리는 것과 무너져 내리는 성을 보수하는 것 사이에는 은하수만큼의 차이가 있었다.

제게 있어 그와 윈터펠의 존재는 그야말로 천운이었다. 물론 그 역도 성립하지만.

“글렌.”

“응?”

“당신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뭐? 갑자기 왜 그런 얘기를…….”

“오늘만 해도 가신들의 도움을 빌렸잖아요. 저 혼자 복수를 해내야 했다면 얼마나 현실적인 어려움이 많았을지 상상도 안 가네요.”

“……아아, 그런 뜻이었나.”

좋다 말았네.

글렌의 얼굴에 살짝 실망하는 빛이 스쳐 지나간다. 하지만 그는 곧 표정을 갈무리했다.

“나 역시…… 그대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대와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다음 왕위가 문제가 아니라 영지민들을 제대로 건사하지도 못하고 있었을 테니.”

“좋네요. 서로에게 이득인 결혼이라.”

“공작가를 쓰러트린 이후에도 우리 협력 관계가 잘 유지됐으면 좋겠군.”

“혹시라도 먼 미래에 어려움이 생기면 일단 저한테 털어놓아 보세요. 도울 수 있는 거라면 도와줄 테니.”

이혼을 다시 생각해 달란 뜻이었는데 애매한 대답이 돌아온다. 그 속뜻을 알아들은 것인지, 아니면 알아듣고도 모른 체하는 것인지.

무어라 더 말하려던 글렌은 순순히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그녀도 생각이 많아 복잡할 테니, 이 문제는 나중에.

“선후작님은 잘 지내고 계실지 모르겠네요.”

“평생 감기 한 번 앓으신 적 없는 분이었으니 우리가 돌아갈 때쯤이면 나만큼이나 몸을 회복한 상태일걸.”

“아니, 친부인데 진지하게 걱정 좀 해 봐요.”

“사실이 그런 걸 어쩌겠나? 그나저나 갑자기 아버지는 왜?”

“슬슬 본성 사람들이 보고 싶어서 그러죠.”

“어느새 윈터펠 사람이 다 됐어.”

“다들 잘 지내고 있겠죠? 노아가 말썽 안 피우고 얌전히 있어야 할 텐데…….”

벽난로가 타오르는 방 안. 두 사람이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말소리는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밤이 깊어갈수록 빗줄기는 더욱 굵어지고 있었다. 새벽이 밝아 올 시간이 되었는데도 먹구름에 가려진 하늘은 한밤중처럼 어둡기만 했다.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는 나디아에게 글렌이 담요를 덮어 줄 무렵, 성벽 바깥에선 빗소리보다 더욱 요란한 굉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콰르르르르, 쾅!

제방을 터트리고 흘러나온 물줄기가 강기슭의 마을들을 휩쓸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