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3화 (93/142)

제93화

성 안에 떠도는 소문은 당연하게도 프레이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처음엔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그럴 리가 없지 않느냐며 말이다.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건 조금 시일이 흐른 후였다. 쉬이 지나갈 일이 아님을 알아챈 것이다.

‘고대로부터 원인 모를 자연재해는 권력자를 끌어내리기 위해 사용되는 수법이었지요.’

졸면서 들었던 역사학 선생의 말이 그제야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건 어째서인지.

역사 공부를 열심히 해 본 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명색이 왕자이니만큼 기본적인 지식 정도는 머릿속에 들어 있었다.

장기간의 가뭄, 홍수, 또는 그 외의 천재지변이 일어났을 때, 옛날 사람들은 그 원인을 찾아 해결하고자 했다.

대부분의 경우 제사를 지내어 신을 달래는 것 정도로 끝나곤 했지만…… 왕족 한 사람에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우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제 존재를 가장 거슬려 할 사람이라……. 아무리 역사 공부를 대충 한 프레이라지만 이 정도 추론도 못해 내진 않았다.

현 시점에서 제게 변고가 생길 시 다음 왕위를 물려받는 건 이복동생 리암이다.

거기까지 추론한 프레이가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왜?’하는 의문이었다.

“썩 살가운 형제지간은 아니었지만 서로를 해칠 만큼 험악한 사이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

“형인 내가 먼저 양보하면 역사 속의 비극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여겼지. 나는 왕위를 잇고 싶은 생각이 없는데…… 그럼 그냥 사이좋게 지낼 수 있을 줄 알았지.”

“…….”

“그런데 그것은 나만의 착각이었던 모양이야.”

배신감에 젖은 표정으로 그리 말하는 왕자의 목소리는 완전히 잠긴 상태였다.

방금까지 눈물을 흘리고 있었던 것인지 눈가가 붉다.

동생의 배신에 치를 떨고 있는 프레이에게는 참 미안한 일이지만…… 나디아는 진심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다행이다. 누가 자신을 공격하고 있는지 모를 만큼 바보는 아니라서…….’

힐끔 고개를 돌려 옆을 확인해 보니 글렌 역시 안도한 표정을 짓고 있다.

계모의 방치로 배움이 짧기는 하나, 태생부터 글러먹은 경우는 아닌 듯했다.

두 사람이 안도하는 와중에도 왕자는 계속해서 한탄을 이어나갔다.

“왜 형제끼리 싸워야 하는 거지? 나는 정말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후작 부인,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인가?”

“전하께 잘못이 있다면 너무 선량하셨다는 것뿐입니다. 책임을 본인에게 돌리지 마세요.”

“이해가 되지 않아. 난 리암을 위협할 마음이 조금도 없었어. 그가 평화롭게 왕위를 물려받길 원했다고. 게다가 얼마 전엔 리암의 후견인인 발라지트 공작을 두둔해 주기까지 했어! 그런데도 나한테 이러는 이유가 대체 뭔데!”

나디아가 식은땀을 흘리며 생각했다.

‘죄송합니다, 전하. 제가 바람을 좀 넣었어요…….’

하지만 장자가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법인 이상, 아버지는 언젠가 프레이의 왕위 계승권을 제거하려 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그가 다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이 순박한 왕자를 속이고 있다는 게 좀 양심에 찔렸지만, 나디아는 서로 이득이 될 거라 생각하기로 했다.

언젠가 맞을 뒤통수를 미리 맞은 셈 아닌가? 적을 파악하는 건 하루라도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그녀가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들의 속내야 저희가 어떻게 알겠냐마는…… 아마도 방해가 될 만한 것은 그 싹을 자르자는 속산이겠지요. 그보다 전하, 이대로 당하고 계실 겁니까?”

“그건…… 그건 싫다. 이대로 당해 주고 싶진 않아.”

프레이가 입술을 질끈 깨물고 대답했다. 그의 파란 눈동자에서 오기가 솟아오르고 있다.

왕궁의 하인들이 아끼는 그릇을 깨도 허허실실 웃으며 넘어가는 그의 성정을 고려해 볼 때, 동생의 태도가 어지간히 충격인 듯했다.

그가 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제 와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만일 리암이 진심으로 귀족들과 손을 잡고 자신을 공격하려 든다면, 그때는 어떡해야 되는가?

‘내 편을 들어줄 만한 사람이…… 아버지? 아니, 아니. 부왕도 나보다 똑똑한 리암을 더 총애하시잖아. 그럼 외숙부? 숙부는 나와 연락하지 않은 지 꽤 되었는데…….’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그럴 만한 인물이 떠오르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껏 그는 자기 세력을 만들려는 엄두조차 내지 않았으니까.

장자라는 정통성도 본인이 권력욕이 있을 때 유용하게 쓰이는 법.

뒤늦게 발버둥 친다 한들 동생과의 차이를 극복할 수는 없으리라.

현실을 깨닫는 순간, 누군가 목울대를 짓누르고 있는 듯한 압박감이 들었다.

‘내가 너무 순진했구나…….’

왜 진작 알지 못했을까? 왜 세상에는 한쪽이 일방적으로 양보한다고 해도 양립할 수 없는 관계가 있다는 걸, 깨닫지 못했던 것일까?

아니, 한때 프레이에게 그 사실을 알려 주려는 자들이 존재하긴 했다.

‘조언을 한 자들은 존재했어. 멍청하게도 내가 듣지 않은 것이지.’

한때 진실한 충언을 올렸던 이들은 제 태도에 질린 나머지 떠나가 버렸다. 외숙부가 더는 수도의 정계에 간섭하지 않겠다며 영지로 되돌아가 버린 것처럼 말이다.

제게 실망을 표하던 그의 얼굴을 떠올리자, 프레이의 표정이 울 듯이 일그러졌다.

‘너무 늦었어…….’

이미 그의 곁에는 사람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현실을 깨달은 프레이가 절망 속으로 빠져들려는 순간이었다. 암담한 상황 속에서도 그를 붙드는 손길이 하나 존재했다.

덥석!

누군가 자신의 손을 붙잡는 느낌에, 프레이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전하, 그럼 저희 얘기를 들어 보시겠습니까?”

“……?”

제 손을 붙잡은 채 눈을 빛내고 있는 윈터펠 후작 부인의 모습이었다.

* * *

수도 인근에는 왕국의 젖줄이라 불리는 잔느 강이 흐르고 있다.

강 주변에는 큰 마을과 풍요로운 농경지가 자리했는데, 이곳에서 나는 수확물이 한 해의 양식을 책임진다고 할 만큼 중요한 지역이었다.

그렇게나 중요한 지역의 관리를 둘째 왕자가 맡았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2왕자 리암은 농경지의 풍경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사실상 내가 이 나라의 후계자라는 뜻이지.’

멍청한 형님 대신 제가 왕의 되는 것이 백 번은 더 훌륭한 선택지이리라.

멍청하게 웃는 형님의 얼굴을 떠올린 그가 쯧 하고 혀를 찼다.

조금 아둔하긴 해도 나쁜 사람은 아니었는데, 이런 상황까지 치달은 게 썩 달갑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게 얌전히 지냈으면 좋았을걸. 굳이 권주를 마다하고 벌주를 받겠다니.”

“그거 혹시 프레이 전하 이야기입니까?”

리암이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발라지트 공작의 조카, 에이든 에른스트가 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잖아도 그분에 대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윈터펠 후작이 입궁하여 1왕자 전하를 뵙고 갔다고 하는군요.”

“얼마나 머물렀지?”

“꽤 오랜 시간 독대한 모양입니다.”

“참 난감한 분이시군, 나의 형님은.”

리암이 참다못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심 왕위에 오르고 싶었으면 진작 움직임을 보이든가.

이제 와서 자기 세력을 만들고자 이리저리 뛰어 봤자 이미 대세는 정해져 있다.

‘멀리 있는 북방 영주들과 손을 잡아 봤자 그들이 도움 되면 얼마나 된다고…….’

게다가 이방인 기사, 이지호가 낸 계획이 성공한다면 프레이는 완전히 실각하게 될 것이다. 이 수도 내에서 그를 비호해 줄 세력은 없으니 말이다.

검은 머리 이방인 기사를 떠올린 리암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그나저나 이번 일을 계획해 낸 자 말이다.”

“지호 경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그 검은 머리 이방인. 정말 그자의 말을 믿어도 되는 건가? 조만간 월식이 일어난다고?”

“백부님께서는 확신하고 계시는 것 같았습니다. 듣자 하니 몇 년 전에도 지호 경이 달의 움직임을 예측한 적이 있다고 하더군요. 장기간의 기록을 살펴보면 일정한 규칙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면서 말입니다.”

“동대륙 사람이라 했나? 그러고 보니 동대륙에선 점성술이 발달했다고 들은 것 같군.”

“점성술과는 조금 다른 학문인 듯했습니다. 여하튼 중요한 건 어떻게 예측했느냐 하는 문제보단 그 일이 몰고 올 결과이지요.”

“경들이 수고를 좀 해 줘야겠군.”

“당연히 저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일이 터진 이후, 전하께서는 그저 침묵을 고수하시기만 하면 됩니다.”

하늘의 뜻을 받들어 1왕자의 폐위를 주장하는 건 저 같은 귀족들이 해야 할 일이었다.

흠 잡을 데 하나 없는 계획이다. 제대로 된 아군 한 명 없는 프레이가 이번 공세를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 이렇게나 결과가 명백하게 보이는 일인데…….

“그런데 한 가지 걸리는 게 있다.”

왜 마음 한 편에선 찝찝함이 가시질 않는 것인지.

“형님과 윈터펠 후작은 무슨 대화를 나눴을까?”

“그 건에 대해서는 입수한 정보가 없습니다만…… 아마 저쪽에서도 별다른 수가 없을 겁니다. 어쩌면 예언 자체를 믿지 않을 수도 있지요.”

“음, 그것도 그렇군.”

그 역시 발라지트 공작의 확언이 없었다면 이방인 기사의 말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형님은 그런 일이 일어날 리 없다며 마음 놓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 생각하니 원인 모를 불안함이 조금 누그러드는 것 같았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일은 안심했을 때 일어나는 법이다.

“왕자님, 확인해 보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리암이 처음 그 소식을 접한 것은, 편한 마음으로 왕궁으로 돌아가는 길에 일어났다.

막 입궁하려던 찰나, 보좌관 중 한 명이 조심스레 귀엣말을 전한 것이다. 리암이 되물었다.

“무슨 일이냐?”

“그게, 저잣거리에 떠도는 소문인데 왕자님에 대한 이야기라…….”

리암은 말을 끝까지 다 듣기도 전에 손사래를 쳤다.

“아랫것들이 떠드는 말까지 내가 알아야 하느냐? 됐다.”

“하, 하지만…….”

“듣기 싫대도.”

들으나 마나 영양가 없는 헛소문이겠지.

그리 생각하며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이었다. 혹시 모를 가능성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잠깐.”

저잣거리에 떠도는 소문이라니.

그는 얼마 전 형님을 음해하는 소문을 퍼트렸다. 이런 시기에 제게도 같은 일이 일어나다니.

발라지트 공작이 추가적으로 벌인 짓인지, 아니면 프레이가 제게 맞선 것인지. 어느 쪽이든 들어 볼 가치가 있으리라.

“마음이 바뀌었다. 말해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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