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2화 (92/142)

제92화

미끼를 드리운 낚시꾼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조바심 내지 않고 기다리는 것이지.’

나디아는 고향에 좀 더 머무르고 싶다는 구실을 내세워 며칠 동안 수도 주변을 유람했다.

성 밖의 호수에서 뱃놀이를 하기도 했고, 들판으로 피크닉을 나가기도 했다. 영락없이 휴가를 즐기는 귀부인의 모습이다.

그렇게 얼마나 유유자적 시간을 보냈을까? 낚시대에 입질이 온 것은 놀고먹는 것도 슬슬 지루해질 때쯤이었다.

윈터펠 후작가의 거처.

침실 안에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던 나디아에게 한 통의 서신이 도착했다.

“왕궁에서 온 전언입니다.”

“왕비 전하께서 보낸 서신이니?”

“네? 아,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신 겁니까?”

“지금쯤 약의 효과를 보고도 남았을 시기이니까.”

나디아가 비스듬하게 누워 있는 몸을 일으켜 편지를 뜯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왕비의 직인이 찍혀 있다.

서신의 내용은 지난번에 받은 약은 너무 고맙게 잘 썼으니, 조금 더 구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보답으로 금전을 지불할 용의도 있다고 하는군. 비전하께서 약의 효과에 너무 감동받으신 모양이야.”

“다행이군요. 다량이 준비되어 있으니 폐기 걱정은 덜겠습니다.”

“무슨 소리야? 지금부터 만들려면 시간이 좀 걸릴 텐데.”

“예? 영지에서부터 가져오셨지 않…… 아아, 알겠습니다. 지금부터 재료를 조달하고 배합하려면 시일이 꽤 걸리겠군요.”

빠르게 나디아의 말뜻을 알아들은 보좌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약을 요구하자마자 준비되었다는 듯 금방 내어 줬다간 이쪽의 속내가 너무 뻔히 드러나게 된다.

윈터펠이 적극적으로 약의 상업화에 뛰어드는 그림이 아니라, 외부의 요구가 빗발쳐 어쩔 수 없이 판매를 시작하는 모양새가 되어야 한다.

게다가…….

“당분간 수도에 더 머물 구실도 필요하니까. 비전하께 드릴 약을 만드는 중이라고 하면 아무도 문제 삼지 못하겠지.”

“일석이조군요.”

보좌관이 입을 벌리며 감탄하고 있을 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난다. 두 사람의 고개가 동시에 한 방향으로 돌아갔다.

그곳엔 급하게 달려온 듯한 글렌이 문고리를 잡고 서 있었다.

“그 소식 들었나?”

“무슨 소식이요?”

“수도 내에서 1왕자와 관련된 괴소문이 퍼지고 있다는군.”

“세상에, 어쩜.”

나디아가 턱을 매만지며 감탄했다.

“예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네요. 1왕자 저하께서 많이 불안해하고 계시겠어요. 이제 우리 왕자님은 누군가 자신을 위협하고 있다는 걸 몸소 느꼈겠네요.”

이번 일은 지금껏 한량처럼 살았던 프레이가 아군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말을 물가로 끌고 갈 수는 있어도 물을 먹일 수는 없는 법.

이복동생과 맞서야 한다는 위기감을, 그 꽃밭 속에 사는 왕자는 스스로 느낄 필요가 있었다.

“거봐요. 제가 말한 대로 됐죠? 아버지의 방식 정도는 오래 지켜본 덕에 통달하고 있거든요.”

“그렇기는 한데…… 뭔가가 조금 이상하다.”

“뭐가요?”

“조만간 고대 왕국의 멸망했을 때처럼, 이번 달 내에 달이 사라질 거라고 하더군. 왕의 자격이 없는 왕자가 왕위에 오른다면 크나큰 재앙이 닥치게 될 것이라며…….”

“…….”

나디아가 잠시 입을 다문 채 과거의 기억을 뒤져야 했다. 확실히 지난 생에도 이맘때쯤 그런 현상이 일어난 건 맞았다.

‘다만 문제는…… 현재로썬 그게 오직 나만이 알고 있는 정보라는 것이지.’

아버지에게 갑자기 미래를 보는 눈이라도 생긴 게 아니라면 말이다.

“그거…… 확실히 이상하긴 하네요.”

왕족을 비난하기 위해 자연재해를 이용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예를 들자면, 몇 년간 이어진 가뭄을 왕의 부덕함 탓으로 돌리는 건 전례가 몇 번이나 있었던 일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무언가가 달랐다. 지금 떠도는 소문은 미래에 일어날 현상을 가리키고 있다.

글렌 역시 그 점을 석연치 않아 하는 듯했다.

“만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제 발에 걸려 넘어지는 꼴이 될 텐데……. 감히 왕가를 음해하는 반역자를 색출해야 된다는 목소리에 힘이 실리게 될 거다.”

“그러게요. 아버지가 거기까지 예상하지 못했을 리 없는데…….”

나디아가 들고 있던 책 모서리를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지난 생에도 이맘때쯤 그런 현상이 일어난 건 확실해. 정확한 시기를 기억하지 못해서 이용할 생각은 못했지만……. 나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는 걸, 어떻게 미리 알고 있지?’

설마 저쪽에도 미래에서 돌아온 자가 있는 것일까?

혹은 점성술로 하늘의 움직임을 읽은 자가 가신들 중에 있다거나…….

“설마.”

아버지 아래의 가신들을 하나씩 떠올려보던 그녀의 얼굴이 자못 심각해졌다. 불현듯 전생의 기억이 떠올랐던 것이다.

돌처럼 굳어 버린 그녀에게 글렌이 말을 걸었다.

“일단 그를 끌어내리고 보자는 속셈일까? 하지만 그래 봤자 예언이 틀렸다는 게 밝혀지면 왕자를 복권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커질 텐데…….”

“그게 아니라 이미 확신하고 있는 거예요.”

그녀의 전 약혼자에게는 한 가지 신기한 버릇이 존재했는데, 그건 바로 매일 밤 하늘을 올려다본다는 것이었다.

날이 어두워지면 어김없이 성의 망루로 올라가는 것을 기이하게 여겼던 나디아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그에게 질문했다.

“지호 경은 밤하늘을 구경하는 걸 좋아하시나 봐요.”

“아, 이건 그냥…… 제 오랜 버릇입니다. 저번에 사고를 당했다가 눈을 뜨니 이곳이었다는 얘기를 했던가요?”

“들은 기억이 나네요.”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감이 안 잡힐 만큼 신빙성없는 이야기이긴 했지만 말이다. 마차 같은 것에 치여서 정신을 잃었더니 다른 세계로 이동했다고 했던가?

“그때 저는 제가 있는 위치를 파악하고자 하늘을 올려다봤습니다. 별자리의 위치를 보면 제가 떨어진 장소의 위치를 대략적이나마 짐작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그의 입가에 쓰디쓴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제가 알던 밤하늘과는 완전히 다르더군요. 마치 우주 반대편의 다른 행성에 와 있는 것 같았습니다. 실제로도 그러했고요.”

“……행성?”

“아, 그건 설명하자면 긴데…… 나중에 좀 더 자세하게 말씀드리지요. 아무튼 그때의 저는 제가 완전히 다른 세상에 떨어졌다는 걸 믿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계속 하늘을 올려다보고, 또 올려다봤어요.”

“…….”

“혹시나 내가 아는 밤하늘과 비슷한 구석이 조금이라도 있지 않을까, 해서…….”

그리 말하는 그의 얼굴에는 온갖 감정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그리움, 체념, 슬픔, 좌절, 절망…….

“아무튼 제가 요즘도 매일 밤하늘을 관찰하는 건, 물론 그때 생긴 습관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흥미 탓도 크지요. 혹시 알고 계십니까? 별과 달의 움직임에는 일정한 규칙이 있다는 것을요.”

“달이 한 달 주기로 줄어들었다가 늘어나는 거라면 알고 있어요.”

“그처럼 하늘의 모든 것은 일정한 규칙에 의해 움직입니다. 자세히 보면 알 수 있어요. 굉장히 장기간의 관찰이 필요하긴 하지만…… 예컨대 월식이나 일식이 일어나는 것도 예측할 수 있고요.”

그쯤 되니 그녀는 다른 방향으로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건 신이 인간에게 내리는 형벌의 징조가 아니었나요? 과거에 고대 왕국이 멸망할 때에도 달이 사라졌다고 들었어요.”

“그건 재앙 같은 게 아니라 그저 자연현상일 뿐입니다. 원리만 안다면 그 따위 일을 두려워했다는 걸 다들 우스워 할 겁니다. 그런 현상이 왜 벌어지냐면…….”

잠시 말을 멈춘 이지호가 난처한 듯 볼을 긁적였다.

“설명하자니 조금 길군요. 추후에 시간이 생기면 천천히 설명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마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기대하고 있을게요.”

그날의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두 사람은 함께 망루를 걸어 내려왔고, 여유가 생기면 하나씩 설명해 주겠다는 약속을 한 뒤 헤어졌다.

그러나 당시 했던 약속이 무색하게도 나디아는 끝내 자세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왕이 갑작스레 급사하면서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갔던 데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까지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약간의 허풍이 섞인 이야기일 줄 알았는데…….’

설마 진짜 가능한 일일 줄이야. 나디아가 홀린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자가 그때 했던 말이…… 그래, 이건 분명 이지호가 생각해 낸 일일 거예요.”

예상치 못한 이름에 글렌의 인상이 살짝 일그러졌다. 수도에 도착한 이래로 줄곧 그의 심기를 긁었던 이름이 또 등장한 것이다.

“그에게 자연재해를 예측할 수 있는 능력이라도 있다는 말은 아니겠지?”

“비슷하죠. 그자가 아주 머나먼 곳에서 온 이방인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나요?”

“그렇다고들 하더군.”

“그의 고향에서는 하늘의 움직임을 예측하는 학문이 발달한 모양이에요. 그 자가 아버지를 움직인 게 분명해요.”

“하늘의 움직임을 예측해? 설마 점성술…… 비슷한 것인가?”

“저도 자세히는 몰라요. 하지만 점성술과는 조금 궤를 달리 하는 느낌이었어요. 아무튼 중요한 건 수도에 떠도는 소문이 실제로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는 거예요.”

오래 전에 단 한 차례 나눴던 대화이기에, 이지호가 그것을 이용하리라곤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어떤 위기에서건 출구는 존재하는 법.

그쪽이 하늘의 움직임을 예측할 수 있다면, 이쪽은 미래에 일어날 일을 이미 겪고 왔다.

잠시 고민에 빠졌던 나디아가 희미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들었다.

“글렌.”

“응?”

“앞으로 제가 무슨 믿기 힘든 소리를 하든, 제 말에 따라 줄래요? 제가 어떤 부탁을 한다 해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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