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0화
1왕자 프레이는 누구나 인정하는 한량이었다.
그럼에도 그를 저지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감히 왕의 첫째 아들인 그를 막아 세울 만큼 간이 큰 이는 없었던 데다, 무엇보다 왕비와 신하들이 그를 방치했기 때문이다.
정통성 있는 장자가 영리하기까지 하면 골치 아파지리라는 것은 자명한 일. 그들 입장에선 프레이가 얼굴만 잘생긴 한량으로 남아주는 것이 유리했다.
흐느적거리며 걸어가던 프레이가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아…… 정말 귀찮아. 부왕께선 왜 매일 나를 국무 회의에 부르시는 거지? 어차피 나 없어도 잘 돌아갈 텐데.”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전하께서는 곧 왕위를 물려받을 분 아니십니까? 예행 연습인 셈이지요.”
“그러니까 난 그런 귀찮은 자리 떠맡을…… 어라.”
연신 투덜거리던 그의 말소리가 뚝 멎었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걸어가는 낯익은 얼굴을 발견한 것이다.
타인과 친화력이 좋은 것 역시 그의 장점 중 하나였다. 프레이는 마치 십년지기 친구를 만난 듯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며 글렌에게 다가갔다.
“왕자 전하를 뵙습니다.”
“윈터펠 가의 사람을 또 보는군. 방금 그대의 아내를 만나고 오는 길이거든.”
“아, 제 아내라면 왕비궁에 들렀다가 돌아가는 길이었을 겁니다. 공주님께 드릴 물건이 있어서 말입니다.”
“그건 이미 전해 들었네. 경도 태양궁의 대 회의실에 가는 중이지? 함께 동행하지.”
두 사람이 속도를 맞춰 걸어가기 시작했다. 태양궁까지 향하는 길은 길고도 멀었다.
목적지까지 난 길을 따라 걸어가며, 글렌이 생각했다.
‘말이 많은 사람이라고 하더니, 나디아의 평이 정확했군.’
프레이는 정말 쉴 새 없이 떠들었다. 날씨 얘기부터 오늘 점심에 먹은 식사 메뉴 얘기까지.
쓸데없는 잡담을 주절주절 늘어놓던 그가 불현듯 생각난 것처럼 아, 하고 탄성을 토한다.
“그러고 보니 경은 발라지트 공작의 빈자리를 대신하여 오늘 국무 회의에 참석하는 것이라 했지?”
“운 좋게도 국무 회의에 참석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에이, 윈터펠 가의 가주라면 마땅히 참여할 자격이 있지.”
본래라면 글렌은 국무 회의의 정규 멤버가 아니었다. 저 머나먼 북부에 사는 그가 매주 왕궁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석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다만 특수한 상황 탓에 발라지트 공작의 오늘 회의에 빠지게 되었고, 마침 수도에 머무르는 중이었던 글렌이 그 빈자리를 임시로 메우게 된 것이다.
“공작과 경의 가문은 오래 전부터 사이가 안 좋지 않았나? 공작의 딸이 혼자 제 무덤을 파 줘서 꽤나 기쁘겠어? 경의 입장에선 호박이 알아서 굴러 들어온 꼴 아닌가?”
“아뇨, 기쁘다고 할 것까지는…….”
“어때? 내가 좀 도와줄까?”
무던한 성격의 프레이는 주변 사람들과 두루두루 잘 지내는 편에 속했지만, 그런 그라도 모든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이복동생인 2왕자 리암과 그의 후견인 발라지트 공작이 그러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프레이는 그들과도 잘 지내고 싶었다. 미우나 고우나 리암은 그의 하나뿐인 형제였으니까.
하지만 리암의 생각은 조금 다른 듯했다.
친모에게서 대체 무슨 이야기를 들은 것인지, 리암은 어릴 적부터 형에게 살갑게 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머리가 조금 크고 나서는 오히려 한량인 형을 한심하게 여기는 기색이 만만이었다.
발라지트 공작 역시 제 앞에서는 예를 차렸으나, 그가 뒤에서 자신의 자질을 깎아내린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아무리 분란을 꺼리는 성품의 소유자라 한들, 자신을 싫어하고 헐뜯는 이들에게 한없이 너그러워지긴 힘든 법이다.
“도와주신다 함은…….”
“내가 조금 거들어주겠다는 거지. 나 역시 발언권이 있어서 말이야. 내가 공작가 전체에 죄를 물어야 한다고 하면 그 영향력이 없지는 않을걸.”
늘 자신을 깔아보던 동생과 그 후견인의 얼굴이 난처하게 변하는 걸 한 번쯤 보고 싶다…… 라는 게 프레이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글렌이 깜짝 놀라 물었다.
“전하, 진심이십니까?”
“자네만 원한다면 못할 것도 없지.”
“…….”
빙글빙글 웃는 얼굴을 보아할 때 자신의 행동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 조금도 고민해 보지 않은 게 확실했다.
입궁하기 전 나디아가 했던 말이 떠오른 것은 그때였다.
“오늘 회의에서 당신이 해 줘야 할 일이 있어요. 1왕자에게 작은 도움을 줘서 그가 정치적 이득을 얻게 하세요. 여기서 중요한 건 1왕자를 도와준 게 당신이라는 걸 암암리에 알리는 것이에요.”
글렌은 지금이 나디아가 준 임무를 완수할 시점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가 걸음을 멈추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전하, 제가 한 가지 조언을 올려도 되겠습니까?”
“응? 말해 보게.”
“전하께서는 오늘 발라지트 공작을 두둔하셔야 합니다.”
당연하게도 프레이는 펄쩍 뛰며 반문했다.
“아니, 왜? 이런 기회가 흔한 줄 아는가? 리암 녀석과 공작을 동시에 엿 먹일 절호의 기회란 말일세!”
“전하께서 발라지트 가문 전체에 죄를 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오로지 실만 있고 득이 없는 일입니다.”
“실만 있고 득이 없어? 왜 내가 피해를 입는단 말인가? 나는 잘못한 게 없는데.”
“어차피 폐하께서는 공작가에 큰 벌을 내릴 의사가 없으십니다. 저하께서 죄를 물어야 한다고 주장하신다면 보여 주기 식으로 벌을 내릴 수도 있지만, 그건 말 그대로 구색 맞추기일 뿐. 발라지트 공작은 실질적인 피해를 입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아버지가 그 자를 총애하시긴 하지.”
카레인이 요하네스 수도원으로 유배를 간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공작을 두둔하는 이들은 이번 일이 공작 영애의 독단이라는 말로 꼬리를 자르려 할 것이다.
“어차피 그자에게 실질적인 피해를 입히지 못할 거라면, 차라리 이 기회에 전하의 너그러움을 보이십시오.”
“나의…… 너그러움을 보이라고?”
글렌이 차근차근 설명을 이어 나갔다.
“발라지트 공작은 리암 전하의 가장 큰 우군이지 않습니까?”
“맞아. 그건 나도 알고 있네.”
“그러니 전하께서 공작가 전체의 처벌을 주장하시는 것은 리암 전하를 향한 정치적 공세로 해석될 여지가 큽니다.”
“응? 어? 어어? 그, 그렇게 되는 건가?”
프레이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짓는다.
‘나는 그냥 소소하게 골탕 먹이려는 것뿐이었는데…….’
얄미운 녀석이긴 하지만 동생과 진지하게 왕위 다툼을 하고픈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당황해하는 그를 향해 글렌이 말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그건 폐하의 눈에 그리 유쾌한 광경이 아닐 것입니다. 그 어떤 아비가 자식끼리 다투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겠습니까?”
“음…… 그것도 그렇군.”
“그러니 발라지트 공작을 두둔하는 것이 더 이롭습니다. 세간에 전하의 아량을 널리 알리고, 폐하의 총애를 얻을 기회입니다.”
“듣고 보니 경의 말이 옳은 것 같네!”
프레이가 위아래로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한다. 설득이 쉬워서 좋긴 했다.
“하마터면 큰 실수를 저지를 뻔했군. 이 빚은 반드시 기억하겠네.”
“전하께 도움이 되었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싱글벙글 웃던 프레이가 문득 떠오른 듯한 가지 의문을 표했다.
“그런데 왜 나를 도와준 거지?”
“예?”
“가만히 있었으면 발라지트 공작이 엿 먹는 걸 구경할 수 있었을 텐데. 뭐, 경의 말마따나 실질적인 피해는 입지 않았을 테지만 망신당하는 모습은 볼 수 있었을 것 아닌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게 용하다. 글렌은 내심 감탄하며 대답했다.
“그야 저는 윈터펠의 당주이기 이전에 왕실의 봉신이기 때문입니다. 옳은 방향의 조언을 올리는 건 당연히 해야 될 일이지요.”
“…….”
프레이가 조금 놀란 얼굴로 글렌을 바라봤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여태껏 만났던 귀족들 중 그를 이렇게 진지하게 대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잠시 입을 뻐끔거리던 그가 목소리를 냈다.
“경은 정말…….”
“…….”
“왕가에 충성스럽군. 누가 감히 북부가 독립을 꾀하고 있다고 모함했는지 궁금할 정도야.”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는 얼굴이었다. 그 탓에 프레이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이곳은 태양궁으로 향하는 길목이라 지나치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그가 윈터펠 후작과 오래도록 이야기를 주고받는 모습을 많은 이들이 목격했다는 것을.
글렌 역시 주변의 이목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체 하며 대답했다.
“아직도 그런 이간질을 하는 자가 있습니까? 국론을 분열시켜 사사로운 이득을 꾀하려는 자의 계교일 뿐입니다.”
“오, 그런가?”
의미 모를 어려운 단어가 섞여 있었지만 프레이는 대강 알아들은 척했다.
“경이 아니었으면 또 부왕께 한 소리 들을 뻔했어. 그 양반, 요새 나만 보면 공부 좀 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는 둥, 언제까지 건달처럼 살 거냐는 둥…… 잔소리가 보통이 아니거든.”
“전하를 아끼는 마음의 표현일 겁니다. 깊게 담아 두지 마십시오.”
“에휴…… 그렇다면 좋으련만.”
길을 지나가던 시종들이 옆으로 멈춰서 허리를 숙인다.
시종들뿐만이 아니었다. 이 자리엔 프레이의 얼굴을 알아보고 다가와서 인사를 하고 가는 자도 존재했다.
주변을 둘러본 글렌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스쳐 지나간다. 이것으로 나디아가 부탁한 일은 완수한 셈이다.
“1왕자는 본격적으로 왕위 다툼에 끼어들려 하지 않을 거예요. 동생에게 왕세자 자리를 양보했으면 양보했지. 설마 동생이 자신을 죽이기까지야 할까, 하면서 마음 놓고 있을걸요.”
“그렇다면 그로 하여금 위기감을 깨우치는 계기가 필요하겠군.”
북부에는 왕위 계승권이 있는 왕자의 존재가 필요하다.
내전이 일어난 상황에서, 타당한 왕위 계승자를 내세우지 못한 군대는 그저 반동분자가 될 뿐이다.
“맞아요. 그러니 아버지가 착각하게 만들어야 해요. 1왕자가 우리와 손잡으려 하고 있다는 착각이요.”
자신의 조언을 순수한 호의와 충심이라 여기고 있을 프레이에겐 심심한 애도를 표한다.
하지만 마음 놓고 있다가 혈육에게 뒤통수를 맞는 것보다는 백배 천배 낫지 않은가?
표정을 갈무리한 글렌이 입을 열었다.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어서 대 회의실로 가시지요.”
“아아, 그렇지. 늦으면 또 꾸중을 들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