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9화
“와아…….”
왕비의 곁에 찰싹 달라붙은 공주가 눈을 빛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나이는 열두 살쯤 되었을까? 반짝거리는 걸 좋아하기 시작할 나이이긴 했다.
“공주님의 시종들이 천사상의 블루 다이아몬드를 발견했지요. 그러니 이것은 공주님의 것입니다.”
“정말 화려하고 예뻐요.”
흑진주로 이은 체인에 커다란 루비가 걸려 있는 목걸이였다. 겨우 열두 살이 된 공주가 사용하기엔 조금 부담스러운 디자인이었지만, 본인이 저리 좋아하니 다행스러웠다.
왕비 그리젤다가 의자에서 일어날 듯 들썩이는 공주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비비안, 체통을 지키렴. 바른 자세로 앉아야지.”
“아아, 네. 어머니.”
그제야 호들갑을 떨던 공주가 차분하게 자세를 바로 한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여전히 목걸이에 고정된 채였다.
왕비 그리젤다가 말했다.
“미안해요. 공주가 아직 어린 탓에 후작 부인 앞에서 철없는 모습을 보였군요.”
“아니에요. 공주님께서 기뻐해 주시니 저 또한 기쁘답니다.”
비비안 공주는 아직 어린 탓에 왕비궁에 함께 기거하고 있었다.
나디아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녀의 목적은 공주가 아니라 왕비를 만나는 것이었으니.
“참, 왕비궁에 방문하는 김에 비전하께도 선물을 준비했답니다. 부디 받아 주시겠어요?”
“기대되는걸요.”
왕비궁에 찾아와 공주에게 선물을 전해 주면서, 정작 궁의 주인인 왕비에게 아무것도 쥐어주지 않을 리가 없다.
그리젤다는 예상했다는 듯 기대된다는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이윽고 나디아의 손짓에 하녀가 보석함을 가지고 걸어오자, 그녀의 얼굴에 서린 기대감이 배가 되었다.
“국보인 천사상과 함께 발견했던 거울이랍니다.”
“어머.”
그리젤다의 눈이 살짝 벌어졌다.
가장자리에 세공된 장식도 장식이지만, 거울 자체도 티끌 하나 없이 매끈했던 것이다. 이 시대의 기술력으로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고대 왕국의 기술력이 대단했다더니, 사학자들이 근거 없이 떠드는 이야기가 아니었군요.”
“레어에 발견한 보물들 중, 제가 가장 감탄했던 물건입니다.”
물론 거짓말이다. 나디아는 돈으로 환산하기 쉬운 금괴가 더 좋았다.
“이런 귀한 물건을 받아도 되는지…….”
“그날 연회장에서 저를 위해 증언을 해 주셨잖아요. 그때의 보답이라 생각하시고 부디 받아 주세요.”
“증언? 무슨 말을…… 아아, 그랬지, 참.”
그러고 보니 증언 비슷한 것을 했던 것 같기도 했다.
나디아가 제게 인사하기 위해 상석으로 올라왔을 때, 하인들이 급히 찾아오는 바람에 다시 내려갔던 일 말이다.
“그저 본 것을 그대로 읊었던 것뿐이죠. 폐하 앞에서 거짓을 고하는 건 어불성설이니.”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했는지 몰라요. 제 남편도 전하께 한 가지 선물을 전해 달라고 했답니다.”
“어머, 윈터펠 후작이요?”
그자는 또 어떤 선물을 준비했을까? 그리젤다의 눈빛에 기대감이 차올랐다.
한때 척박함과 가난함의 상징이었던 윈터펠 영지가 최근 들어 금력을 회복했다고 들었다. 그러니 분명 그럴 듯한 선물을 준비했을…….
“이게…… 뭔가요?”
그러나 기대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윈터펠 후작 부인이 내민 상자는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금장식이 덧대어진 나무 상자는 꽤 고급스러웠지만 그 내용물은 그렇지 않았다. 정체 모를 가루를 담은 하얀 주머니가 전부였다.
그리젤다가 직관적으로 떠오른 단어를 내뱉었다.
“……약?”
“네, 맞아요. 지난해의 흑사병 사건 이후, 글렌…… 그러니까 후작님께서 약학의 중요성에 대해 느낀 바가 있는가 보더라고요. 가시덩굴 허브가 흑사병의 치료제라는 걸 더 빨리 알았다면 희생자를 줄일 수 있었을 테니까요.”
“아하, 그러셨군요.”
“마침 운 좋게 가시덩굴 허브를 독점한 덕에 여유 자금이 생긴 것도 있고요. 각지의 유명한 약제사들을 초청해서 약학 연구에 투자했답니다. 그 와중에 어쩌다 보니…….”
물론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말이었지만 장사에는 적당한 스토리텔링이 필요한 법이다. 나디아가 약재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이런 미용약을 개발하게 된 거죠. 물이 개어서 바르면 피부가 백옥처럼 매끈하고 하얘질 거예요.”
“어머나, 그거 참 놀랍네요.”
감탄한 표정을 지은 왕비가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미쳤다고 이런 정체불명의 약을 내 얼굴에 바르겠니?’
그리고 나디아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말은 저렇게 해도 실제로 사용할 리가 없겠지.’
그저 선물 준 사람의 체면을 생각해서 반응을 해 주는 것뿐. 귀부인들의 대화는 매사 이런 식이었다.
예상컨대 왕비는 약을 불신해 주변의 사용인들에게 사용해 보라며 던져 줄 것이다.
‘그거면 됐어.’
약의 효과는 즉각적이다. 나디아는 과거에 이 약이 얼마나 무서운 기세로 수도를 휩쓸었는지 기억하고 있었다.
왕비가 염치 불고하고 추가적인 약을 요청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으리라.
제 속내를 이미 들켰다는 걸 알기나 하는지, 그리젤다는 생글생글 웃으며 상자를 하녀에게 건네 주기만 했다.
“후작님의 선물도 정말 마음에 쏙 들어요. 그 분께 제가 기뻐했다는 말을 꼭 전해 주세요.”
“물론이죠.”
목적을 이룬 나디아는 오래 지나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응접실을 나서려는 그녀를 왕비가 붙잡으며 묻는다.
“참, 수도에는 얼마나 머무를 생각인가요?”
“탄신연이 끝났으니 더 이상 수도에 있을 이유가 없긴 하지만, 남편을 졸라서 좀 더 시간을 끌 생각이에요. 간만에 고향에 돌아오니 기쁘네요.”
“그럼 북부로 돌아가기 전에 왕궁에 한 번 더 들러요. 오늘 받은 선물에 대한 답례를 줄 테니.”
마지막 인사치레를 끝으로 나디아가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문이 닫히자마자 시녀가 가까이 다가와 묻는다.
“비전하, 이 약재와 거울은 어떻게 할까요? 침실에 가져다 두면 되겠습니까?”
“거울은 내 침실에 가져다 놓아라. 그리고 이 약재는…….”
나무 상자를 바라보는 왕비의 눈빛이 께름칙하게 변했다. 역시 북부 남자라 그런지 센스가 최악이군.
“대체 뭘 믿고 이런 정체불명의 약을 내게 선물한 건지…… 쯧. 내가 사용할 일은 없을 것 같으니 이건 궁의 시녀들에게 나눠 주렴. 원하는 사람은 사용해도 좋다고.”
“예, 전하.”
명령을 내린 그리젤다의 시선이 곧장 거울로 향했다.
제 아름다운 얼굴이 매끈한 거울 위로 선명하게 비춰지는 것이, 정말 마음에 쏙 드는 선물이다.
그녀가 거울을 들여다보며 연신 감탄했다.
“고대 왕국의 기술은 정말 대단하구나. 어쩌면 이렇게 깨끗한 거울을 만들었을까?”
정작 중요한 물건은 아랫사람들에게 나눠 주었다는 걸 꿈에도 모른 채.
* * *
왕비궁을 나선 나디아는 곧장 거처로 발걸음을 옮기진 않았다.
그녀에겐 함께 입궁한 동행인이 있었으므로.
“곧바로 돌아가시겠습니까? 후작님과 함께 돌아가시지 않고요?”
“음…… 오래 걸리지 않으려나?”
바로 지금쯤 태양궁에 도착해 있을 글렌이었다.
국무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들린 것이니 꽤 오랜 시간이 걸릴 터였다.
게다가 오늘은 카레인의 죄에 발라지트 공작에게도 책임을 물을 것인지 정하는 날 아니던가. 기나긴 갑론을박이 펼쳐질 것이다.
“먼저 돌아가도록 하지. 왕궁에 오래 머무르다가 괜히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릴 수도 있으니.”
“예, 마님.”
귀가를 결정지은 나디아가 벽돌 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왕을 제외하곤 왕궁 안에서 마차를 타는 건 크나큰 무례였기에 하릴없이 두 발로 걸어가야 했다.
그나마 날씨가 선선하다는 것 하나는 다행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오랫동안 다리를 놀렸을까?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발견하곤, 그녀가 길 가장자리로 물러나 길을 터 주었다.
선두에 서 있는 자가 1왕자 프레이였기 때문이다.
“오, 공작 영애…… 아니, 윈터펠 후작 부인 아닌가? 여기서 또 보는군.”
아니나 다를까 그가 먼저 알은체를 해 온다.
“1왕자 전하를 뵙습니다.”
“남편과 함께 온 건가?”
“함께 온 건 맞지만 용건은 다르지요. 저는 왕비궁에, 정확히 말하자면 공주님께 드릴 물건이 있어서 입궁한 거랍니다.”
“비비안에게 줄 물건이라면…… 아, 설마 그 마리 여왕의 목걸이?”
“맞아요.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워낙 인상적이라 잊을 수가 있어야지.”
연회장에서의 일을 떠올린 듯, 1왕자 프레이가 돌연 너털웃음을 터트린다.
호쾌하게 웃고 있는 외양 하나만큼은 정말이지 흠 잡을 데 하나 없이 완벽하다.
금괴를 녹인 듯한 금발, 푸른 눈동자, 거기에 세기의 미인이었던 어머니를 닮은 이목구비까지. 겉모습만 보면 동화 속의 왕자님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나디아는 알고 있었다.
‘이 인간…… 완전히 한량이야.’
그에겐 반드시 왕이 되어야겠다는 의지도, 동생을 이겨야겠다는 경쟁심도 없다는 것을…….
‘달리 생각하면 그 덕에 지금까지 살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이지만.’
영리하고 야망 있는 사람이었다면 지금쯤 아버지 손에 암살당했을지도 모른다.
한때는 그가 게으른 한량인 척 아버지의 눈을 속이고 있는 건 아닐까 기대를 걸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이자는 정말…… 너무 순진해. 동생과 공존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으니까!’
당연한 말이겠지만 왕족으로서의 소양도 부족하다. 군주론을 완독하기나 했을지 의문일 정도였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확고히 아버지의 편인 2왕자를 끌어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니, 남은 선택지를 고를 수밖에.
나디아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프레이는 혼자서 주절주절 말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원래 말이 많은 사람이긴 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발만 동동 구르다가 보물을 제대로 간수하지 못했다고 처벌이나 받았을 거야. 보석을 되찾는 건 꿈도 못 꿨겠지. 임기응변이 대단하던걸.”
“짧은 꾀를 내었을 뿐입니다. 그보다 전하께서는 태양궁으로 향하는 중이신지요?”
“아, 귀찮지만 회의에 참석하게 되어서…….”
잘생긴 얼굴에는 정말 귀찮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좀 더 얘기하고 싶지만 이만 가야겠군. 회의 시간에 늦으면 부왕께서 또 잔소리를 하실 테니까.”
“살펴 가십시오.”
“다음에 또 보지.”
그러고는 휘적휘적 걸어가 버린다. 시종들이 그 뒤를 꼬리처럼 뒤따랐다.
나디아는 그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며, 지금쯤 태양궁의 대회의실에 도착해 있을 글렌을 떠올렸다.
‘잘해 내겠지?’
그녀가 오늘 그에게 부여했던 임무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