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8화 (88/142)

제88화

“…….”

카레인의 말문이 딱 막히는 순간이었다.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다. 귀담아 들을 가치도 없었다. 그러니 당장 꺼지라며 고함을 고래고래 질러야 하는데도, 이상하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아니, 고함을 지르기는커녕 숨을 쉬는 것조차 어려웠다. 폐에 물이 한가득 차오르는 기분이다.

한참 동안 입만 뻐끔거리던 카레인이 겨우 모기만한 목소리를 짜냈다.

“무슨…… 헛소리를…….”

“왜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해? 너, 아버지가 왜 에이든 오라버니에게 작위를 물려 주려고 하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봤니? 적녀가 있으니 데릴사위를 들이면 될 일인데도. 아니, 그 이전에 아버지가 왜 재혼하지 않는지 궁금하게 여긴 적이 없어?”

“아버지는…… 내, 내 어머니를 줄곧 그리워하셨으니까.”

“푸흡!”

나디아는 그만 실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동생의 대답이 너무나 우습고, 또 가여워서……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하하하하하!”

그녀는 창살에 머리를 기댄 채 한참 동안이나 웃었다.

평소의 카레인이라면 이쯤 돼서 그만 웃으라고 고함을 지르고도 남았을 텐데, 어쩐지 아직까지 아무런 반응이 없다.

사실은 본인도 어렴풋이 불안해하고 있었던 것이겠지.

너무 웃었더니 눈물이 고일 지경이다. 눈가에 맺힌 물기를 닦아 낸 나디아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자기가 말하고도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지? 우리 아버지가, 아니, 공작님이 그렇게 낭만적인 사람이야?”

“입…… 닥쳐.”

“예전에 주치의와의 대화를 엿들은 적이 있거든. 그는 후계를 가질 수가 없는 몸이야. 여자를 임신시킬 수가 없다고.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그 사람의 친자식일 수 있겠어?”

“입 다물랬지!”

쾅! 쾅!

카레인이 위협하듯 창살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소리 질렀다.

물론 나디아가 여동생의 말을 순순히 들어줄 리 없었다. 그녀는 마치 노래 부르듯이 신나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 남자는 옛날부터 조카들의 말이라면 껌벅 죽었잖아. 조카들은 애지중지 아끼면서 정작 친자식들은 냉대하다니,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어?”

“그, 그야 에이든 오라버니는 남자니까! 아버지는 아들을 줄곧 바랐어. 그러니 에이든 오라버니를 특별히 아낄 수밖에!”

“에이든 오라버니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거 알잖아. 우리에게 사촌이 한둘이니?”

“그럼 아버지가 어머니의 외도를 알면서도 묵인했다는 말이야? 그 자존심 강한 분이?”

“자존심 강한 사람이니까 문제 삼지 않은 거지. 부인의 부정을 까발리려면 본인이 성불구라는 것부터 알려야 하는걸.”

“거, 거짓말…….”

“남들에게 정상적인 남성으로 보이고 싶었겠지. 귀족 남성이라면 첩에게서 둔 사생아가 하나쯤 있기 마련이니 내 존재 역시 묵인한 것이고. 마침 우리 둘 다 딸이었잖아. 정략결혼에 이용해 다른 가문과 결혼시켜 버리면 발라지트의 핏줄을 더럽히지도 않아. 그 사람이 널 진작 죽이지 않은 이유는 그뿐이란다.”

“…….”

그쯤 됐을 때, 카레인의 얼굴은 종이보다 더 하얗게 질려 있었다. 뇌가 온통 새하얗게 변하는 것만 같다.

어질어질한 와중에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과거의 대화가 있었다. 아마 죽은 어머니의 추모식 때 들은 대화였을 것이다.

“공작님은 결국 재혼은 하지 않으실 생각인가 보군요.”

“그러게 이상하네요. 아직 젊으시니 다른 여인에게서 충분히 후사를 보실 수 있을 텐데…….”

“조카를 후계로 삼을 생각이실까요? 아니면 카레인 양과 데릴사위를 결혼시킬 생각이실까?”

“카레인 양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공작님의 따님 두 분이요. 참…… 안 닮지 않았나요? 조금도 가족처럼 보이지 않아요. 부친 쪽의 피가 전혀 안 튄 것처럼요.”

“어머, 설마 재혼을 하시지 않는 이유가…… 아니, 내가 무슨 말을. 작고하신 공작 부인을 기리기 위해서이겠지요.”

그날, 카레인은 감히 망언을 한 손님들을 차마 내쫓지 못했다.

소란을 피웠다간 자신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무슨 대화를 들었는지 밝혀야 하기 때문이다.

불현듯 공작 저 현관에 걸린 일가족의 초상화가 떠올랐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어린 자신의 모습이 그려진 초상화.

그 그림속의 아버지는…… 혼자서만 동떨어진 생김새였다. 마치 가족이 아닌 것처럼.

휘청.

초점이 사라진 눈동자의 카레인이 돌바닥 위로 쓰러진다. 무릎이 딱딱한 바닥 위에 처박혔지만 통증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사실은 너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지?”

“흐, 으…….”

“그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서 내 탓을 했잖아. 아버지가 널 사랑하지 않는 이유는 내가 아버지의 관심을 빼앗아 갔기 때문이라고. 내가 없으면, 유일한 딸이 되면 그 사람이 널 봐줄 거라고 생각했어?”

나디아의 차가운 시선이 쓰러진 카레인을 훑는다.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위태로운 모습이었으나 가엽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녀 때문에 자신의 어린 시절은 지옥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애정결핍인 어린 아이의 화풀이 대상이 되어야 했던 건 바로 나디아였다.

“내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도 아버지가 널 아껴 주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거야. 애초에 친자식이 아니니까. 정략결혼에 쓰기 위해 키워 둔 도구일 뿐이지.”

“…….”

“그러니 카레인, 수도원에서 천천히 생각해 봐. 내 말이 그른지 옳은지. 앞으로 시간은 많을 거잖아?”

“…….”

카레인은 끝내 고개를 들지 않았다.

하지만 나디아는 지금 이 순간 자신이 내뱉은 한 마디 한 마디가 그녀의 뇌리에 새겨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잘 있어. 가끔 수도원에서의 네 모습을 구경하러 찾아갈게. 비록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다지만 우리는 자매로 자랐잖니?”

나디아는 언젠가 카레인이 제게 했던 말을 그대로 되돌려주며 발걸음을 돌렸다. 이곳에 찾아왔던 목적을 이뤘으니 더 이상 머무를 이유가 없었다.

‘이제 남은 시간 내내 자기 존재를 의심하고 혐오하면서 절망 속에 살게 되겠지.’

죽음을 맞이하기 전까지 줄곧 고통 받으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나디아가 원수에게 내리는 형벌이었다.

걸음을 옮겨 모퉁이를 돌자, 벽에 기대 서 있는 글렌의 모습이 보인다.

그가 입을 열어 말했다.

“용건은 끝났나?”

“네, 속이 다 시원하네요.”

“그렇다면 다행이군. 이만 돌아가지.”

글렌이 팔짱을 끼라는 듯 팔을 내어준다. 나디아는 자연스레 그의 팔에 손을 올리곤 함께 걸음을 맞춰 걸어갔다.

한참을 걸어 지하실의 출구에 도착했을 때쯤, 그가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그런데…… 방금 그 말, 전부 진실인가?”

“어떤 거요? 발라지트 공작이 성불구고, 저와 카레인이 그 남자의 친딸이 아니라는 거요?”

“……그래, 대답하고 싶지 않다면 대답하지 않아도 된―”

“사실 저도 확실히는 몰라요.”

“……뭐?”

글렌이 걸음을 멈추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럼 그게 다 꾸며낸 이야기였다고……?

남편의 표정에 서린 황당함을 눈치챈 듯, 나디아가 어깨를 으쓱이며 설명을 덧붙였다.

“완전히 꾸며낸 말은 아니고요, 여러 가지 상황을 조합해서 추론했을 뿐이에요. 심증만 있고 물증은 없는 상태랄까요?”

“그럼 의사와의 대화를 들었다는 것도…….”

“물론 거짓말이죠. 아버지가 그런 대화를 저한테 흘리겠어요?”

“…….”

글렌이 할 말을 잃은 듯 대답하지 못했지만 나디아는 떳떳했다.

“아주 거짓말은 아니라니까요? 설령 제 말이 거짓이더라도, 적을 상대하는 데에 굳이 진실만을 이용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만일 카레인이 아버지의 친딸이라면…….”

잠시 말을 멈춘 그녀의 입가에 부드러운 곡선이 내걸렸다.

“그건 저로서는 기쁜 일이겠지요. 친자식이면서도 평생 자기 자신을 의심하며 살아가야 한다니, 어쩜…… 가엽기도 하지.”

“…….”

진심으로 뿌듯해하는 그녀의 표정을 바라보며, 글렌은 소리 없이 감탄했다.

“그대는 정말…… 무서운 여자야. 그대가 내 아군이라서 정말 다행이군.”

“예전에는 저도 정말 착하게 살고 싶었답니다. 절 이렇게 만든 건 아버지와 카레인…….”

“하지만 그것조차 매력적이야.”

“네?”

“아.”

무심코 튀어나온 본심에 그는 그만 혀를 깨물고 말았다. 이런 어둡고 축축한 지하실에서 할 이야기가 아니었는데.

“그러니까, 내 말뜻은…….”

“칭찬으로 들을 테니 그렇게 당황해하실 필요 없어요.”

가족과 약혼자에게 뒤통수나 맞는 호구가 되느니 악마 소리를 듣는 게 백 번 낫지 않은가?

그녀가 지난 생을 통해 배운 깨달음이었다. 호구가 될 바에는 차라리 악인이 되어라.

나디아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바깥으로 발을 내딛었다.

“참, 오늘 시간 좀 길게 내줄 수 있어요? 수도에서 해야 할 일이 많아서, 당신이랑 상의 좀 해야겠는데요.”

“기꺼이 내 줘야지.”

제 아래의 갈색 머리를 내려다보던 글렌이 그만 픽 웃고 말았다.

이런 모습조차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걸 보면, 아무래도 단단히 콩깍지가 쓰인 모양이다.

* * *

이틀 후, 나디아는 홀로 왕궁에 방문했다.

가신들은 연회장에 있었던 일의 여파 때문에 당분간 활동을 줄일 것을 권유했지만 그녀는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수도에 방문한 김에 해결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였던 것이다.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게다가 마침 그녀에겐 왕궁을 찾아갈 좋은 구실도 존재하지 않은가?

“이것이 마리 여왕의 목걸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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