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6화 (86/142)

제86화

문제의 보석이 마침내 발견되었다는 소식에, 따분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 이들까지 모두 고개를 들었다.

선두에 선 사내의 뒤로 병사들이 몇 명 따라오고 있다. 그들이 쿠션 위로 곱게 받쳐 들고 있는 물건은 바로 천사상의 블루 다이아몬드였다.

멀리서도 확연한 보석의 존재감에 국왕이 반색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오! 저것이!”

성인 남성의 주먹만 하다고 들었는데, 실제 보니 웬만한 갓난아이의 머리 크기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신이 난 그거 상석 아래로 뛰어 내려가며 물었다.

“누가, 어디에서 발견한 것이냐?”

“왕녀 전하의 시종들이 발라지트 공작가의 짐마차 안에서 발견했다고 합니다.”

“공작가의 짐마차 안에서? 거 참 찾기 힘들었겠구나.”

웬만큼 간이 큰 자가 아니고서야 감히 공작가의 짐마차를 뒤져볼 엄두를 내지 못할 테니 말이다.

왕녀 전하의 명령을 등에 업은 시종들 정도가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마냥 즐거워하는 국왕과 달리, 몇몇 귀족들은 은밀한 시선을 교환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필이면 발라지트 공작가의 마차에서 발견되다니…….’

‘누군가의 음모일까요? 아니면 정말 보석을 빼돌리려 했다거나.’

‘하지만 후작부인은 공작님의 여식이잖소? 어쩌면 아버지와 합의한 이벤트일 수도 있지.’

미묘해지는 분위기를 읽어 낸 발라지트 공작이 앞으로 나섰다.

카레인에게 설명을 듣는 건 저택으로 돌아가서 해도 늦지 않다. 지금은 사태를 수습할 때였다.

“감축드립니다, 폐하. 전설 속의 보물이 왕녀 전하의 것이 되었군요.”

“하하, 그렇지. 그보다 윈터펠 후작 부인은 어디에 있나? 마술의 비밀에 대해 빨리 듣고 싶군!”

젠장.

공작은 욕지거리를 입 밖에 내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이 머저리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왕의 지능이 평균 이하라는 것이 이렇게나 통탄스러울 수가 없었다.

상식적으로 그런 마술 따위가 존재할 리 있겠느냐는 말이다!

일단 잠시 자리를 뜨는 한이 있더라도 왕에게 지금 이 상황을 이해시키고, 조용히 덮을 것을 종용해야 한다.

“폐하, 잠시 귀 좀…….”

그런데 그때였다.

“폐하!”

털썩!

왕을 부르는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주저앉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첫째 딸 나디아가 울상이 된 얼굴로 무릎을 꿇고 있다.

그 순간, 공작의 등허리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그건 본능적으로 딸의 입에서 나올 말을 예측했기에 느낄 수 있는 공포였다. 상황이 통제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에 대한 공포.

아니나 다를까, 그녀가 입을 열어 이렇게 말한다.

“폐하…… 마술의 비밀에 대해 말씀 드리기 앞서, 한 가지 용서를 빌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용서?”

마술의 속임수를 알려 달랬더니 웬 용서?

당황한 국왕이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일단 들어나 보지.”

“사실…… 저는 폐하께 한 가지 거짓을 고했습니다. 천사상의 보석을 이동시킨 것은 제 마술이 아닙니다.”

“아니, 후작 부인.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언제는 마술을 보여 주겠다더니 이제는 마술이 아니라고? 그럼 저것이 어떻게 공작가의 마차에서 발견될 수 있었단 말이냐?”

“누군가가 천사상의 보석을 훔친 후, 그곳에 물건을 숨긴 것이지요.”

“뭐?”

술렁.

충격이 연회장 안을 한 차례 강타했다.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던 것과 직접적으로 듣는 것은 달랐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 대강 짐작하고 있었던 이들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충격이 맴도는 연회장 중앙에서, 나디아가 말을 이어 나갔다.

“제가 마술쇼를 가장한 것은 도둑을 잡아내고 국보를 되찾기 위함입니다. 감히 왕궁 안에서 도둑질을 했으니 경비대 일부를 매수했을 테고, 정상적인 방법으로 도난을 알렸다간 빠져나갈 물꼬를 터 주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허나 폐하께 거짓을 고한 것은 엄연한 중죄. 벌을 내려 주신다면 달게 받겠습니다.”

그 누구도 뒤의 두 마디를 귀담아 듣지 않았다. 지금 이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연회장 내의 소란이 더욱 커져만 갔다.

“대체 무슨 의도인가 했더니 이런 일이…….”

“허, 그럼 누가 감히 왕실의 보물에 손을 댔다는 말인가요?”

“그야 보석이 발견된 장소와 무관하지 않겠죠.”

“예? 그 말씀은…… 아니, 설마.”

모두의 고개가 천천히 한 곳을 향해 돌아간다. 이 나라에서 제일가는 충신과 그의 적녀가 서 있는 방향이었다.

‘설마, 공작가가?’

의구심 섞인 눈빛에 카레인의 숨결이 일순간 멎었다. 발밑으로 피가 빠져나가는 것만 같다.

“아, 아니야…….”

굳어 버린 입술을 움직이는 것이 그토록 힘들 수가 없었다. 카레인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겨우 입을 열었다.

“아, 아버지의 충심은 다들 잘 아시지 않나요? 우리 발라지트가 이 나라의 보물을 후, 훔치려 했다니! 말도 안 돼요!”

그러자 연회장에 있던 귀족들이 의문을 표하기 시작했다.

“그럼 공작가의 마차에서 다이아몬드가 발견된 건 무슨 연유란 말이오?”

“누군가 우리 가문에 누명을 씌우려 한 것이겠지요! 저희를 모함할 생각으로 보석을 가져다 둔 거예요.”

“하! 아무리 유희라 한들 공작가의 마차에 드나들 수 있는 건 왕실 사람들 정도 아닌가요, 레이디 카레인.”

“아무튼 모, 모함이에요! 이건 모함이라고요!”

그때, 발라지트를 변호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작님은 왕실의 충신이시죠. 사사로운 감정으로 국보를 탐했을 리가 없어요.”

“제 말이……!”

맞장구를 치려던 카레인의 목소리가 뚝 멎었다. 공작을 변호한 이가 다름 아닌 나디아였기 때문이다.

“제 아버지, 발라지트 공작님의 충심은 저 또한 잘 압니다. 보석 따위를 탐낼 분이 아니시지요. 하지만 제 여동생은 달라요.”

그녀의 시선이 왕비를 향해 돌아갔다.

“비전하, 제가 전하께 인사를 드렸던 순간을 기억하십니까?”

“기억……하고말고요.”

왕비 그리젤다가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대답한다. 제게 무슨 불똥이 튈지 두려웠던 것이다.

“그렇다면 하인들이 급히 찾아온 탓에, 제가 회포를 다 풀지도 못하고 자리를 떴던 것도 기억하시겠군요.”

“그, 그랬던 것도 같군요. 아니, 확실히 그랬어.”

“그때 그 하인들은 본래 천사상을 지키고 있었던 이들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자리를 뜨지 말라고 명령을 받았던 이들이지요. 하지만 누군가에게서 제가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곤 연회장으로 찾아왔고, 그 틈에 보석을 도난당한 것입니다.”

“그럼…… 부인의 시종들에게 거짓말을 한 자를 찾아내면 되겠네요. 그 자가 이번 사건과 관련이 있을 테니까요.”

“굳이 찾아낼 필요도 없답니다. 제가 위급하다는 거짓말을 할 때, 그 자는 자기 신분을 밝혔으니 말입니다.”

“그, 그자가 대체 누군가요?”

나디아가 조용히 손을 뻗어 한 곳을 가리켰다. 그녀의 손가락 끝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린 이복동생을 가리키고 있었다.

“제 여동생, 카레인입니다.”

“……!”

공작가 전체를 공격해선 안 된다. 그랬다간 아버지가 모든 역량을 동원해 가문을 지키려 할 테니 말이다.

‘여차하면 이쪽이 누명을 씌우려 했다고 역으로 몰리는 수가 있어.’

그로 하여금 카레인 하나만 잘라 내는 것이 더 이득이라고 판단 내리게 해야 한다. 지금은 카레인 한 명만을 공격할 때였다.

“그 자리에 있던 하인들은 제 여동생이 하는 말인 만큼 제가 위기에 처했다는 말에 무게를 둔 것이죠. 보석을 훔치려는 속임수였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요.”

“거, 거짓말이야!”

카레인이 발악하듯이 소리쳤다.

“어, 어떻게 마차에 그런 걸 넣어 놨는지는 몰라도, 이건 음모야! 대, 대체 나한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이런 거짓말을 하는 거야!”

“그건 내가 할 말이지. 대체 왜 그런 거짓말을 한 거니? 내가 보석의 행방에 대해 물었을 때, 너는 모르는 일이라고 했잖아. 아버지를 걸고 맹세한다면서?”

“뭐?!”

카레인의 눈이 접시만큼 커다래졌다.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어? 나, 난 하늘에 맹세컨대 결백하다고 했지! 아버지, 전 정말 아니에요. 제가 아버지를 걸고 저런 맹세를 할 리가 없잖아요! 저, 저와 아버지를 이간질시키려는 거예요.”

걸렸다.

나디아는 울음을 참는 척 입가를 매만져야 했다. 입가에 승리의 미소가 걸렸기 때문이다.

‘카레인의 약점은 아버지니까. 저 애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에게서 미움 받는 걸 몹시 두려워했지.’

카레인은 그런 대화 자체를 한 적이 없다고 부인했어야 했다. 그러나 약점을 찔린 그녀는 감정에 휩쓸려 제 입으로 자백을 하고 만 것이다.

기쁜 표정을 갈무리한 나디아가 마무리 작업에 들어갔다.

“그래? 내게서 보석의 행방에 대한 질문을 들었다는 건 부정하지 않는구나. 그 말은 네가 일찍이 보석이 사라졌다는 걸 알고 있었다는 뜻이지. 그런데 왜 그런 말을 했니?”

“무, 무슨 말을…….”

“어서 천사상의 모습을 보여 달라고 했잖아. 모두가 기다리고 있다고. 보석이 사라졌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 왜 그런 말을 한 거야?”

“!”

카레인은 뒤늦게야 자신이 제 입으로 했던 말을 떠올릴 수 있었다.

“언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여기 모인 사람들 모두 빼앗겼던 국보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걸요. 어서 보물을 보여 주세요. 아까부터 목이 빠질 것 같답니다.”

대체 왜 하늘에 대고 맹세할 수 있겠냐느니 하는 말을 하나 했더니. 여기까지 계산되어 있었단 말인가?

진득한 공포감이 목덜미를 옭아매는 듯했다. 온 몸이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렸다.

“나, 나는…… 나, 난…… 그건 단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