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5화
“제가 준비한 것은 마술입니다. 폐하께서도 분명 마음에 들어 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마술?”
비로소 왜 굳이 서커스 뒤로 순서를 바꾼 것인지 이해가 된다.
공연으로 무르익은 분위기를 그대로 이어 나가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 내렸으리라.
방금의 공연이 매우 마음에 들었던 국왕으로서는 환영할 일이었다. 그가 흔쾌히 허락을 내렸다.
“좋다. 한번 선보여 보아라.”
“감사합니다.”
나디아가 문가를 향해 몸을 돌리며 소리쳤다.
“가져와라!”
끼익.
연회장의 거대한 문이 열리고, 윈터펠 가의 하인들이 비단을 씌운 무언가를 가지고 들어왔다.
두꺼운 비단이 씌워져 있었지만 얼핏 보이는 실루엣으로 그 정체를 추측할 수 있었다.
“저건…….”
“사람 형태의 조각상 같은데요? 설마 저게 그 드래곤에게 빼앗겼다는 국보……?”
나디아가 정답이 들린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맞아요. 이것이 바로 저희가 준비한 탄신일 선물입니다.”
“호오?”
국왕의 눈이 흥미로운 듯 커다래졌다. 대체 무슨 일을 벌일 작정인지 궁금증이 차올랐다.
그녀의 행동을 유심히 바라보는 건, 이 자리에 모인 이들 대다수가 마찬가지였다. 다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중앙을 바라보고 있다.
나디아는 사람들의 시선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것처럼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이 조각상에 마술…… 아니, 마법을 걸 예정이랍니다.”
마술도 아니고 마법이라. 연회장 구석구석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지만 그녀를 제지하는 이는 없었다.
“조각상을 강탈당한 것은 백여 년 전이지만, 그 모습이 그림으로 남아 있으니 다들 그 생김새를 아시겠지요.”
그렇게 말하고는 조각상 위에 덮어씌운 비단을 단숨에 벗겨 냈다.
“오오!”
“저게 바로……!”
백여 년 동안 도둑맞았던 보물이 왕실로 되돌아오는 순간이었다.
윈터펠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이들도 이 순간만큼은 그녀의 움직임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연회장의 화려한 불꽃 아래에, 섬세한 조각상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다.
한 올 한 올 조각한 듯 등허리 위로 흘러 내리는 머리카락,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눈동자, 딱딱한 대리석으로 조각했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만큼 부드러운 몸의 곡선.
악마와 계약하여 영혼과 재능을 교환했다는 천재 조각사의 작품다웠다. 정말 천사가 눈앞에 강림한 것처럼 생동감이 넘쳤던 것이다.
그래, 왕가의 보물로 삼아도 이견이 없을 만큼 멋진 작품인데…… 정말 그럴 가치가 있는 작품이긴 한데…….
“보석이…… 없잖아.”
“세상에서 제일 커다란 블루 다이아몬드를 쥐고 있다 하지 않았나?”
정작 중요한 것이 빠져 있었다. 성인 남자의 주먹보다 더 크다는 소문이 자자했던 블루 다이아몬드. 값을 매길 수조차 없는 보석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이다!
연회장 안에 살짝 당황스러운 기색이 흐르기 시작했다. 낮은 목소리로 웅성거리는 사람들 틈에서, 귀족 사내 한 명이 의문을 표했다.
“후작 부인, 이게 어떻게 된 거요? 중요한 게 없어진 듯한데.”
“없어진 게 아닙니다. 제가 마법으로 이동시킨 거죠.”
“……뭐?”
나디아의 뻔뻔한 대답이 질문한 남자의 입이 떡 벌어진다. 그러나 그녀는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뻔뻔하게 말을 이었다.
“폐하, 제 마법으로 인해 블루 다이아몬드는 이 태양궁 안 어딘가로 이동했습니다. 물건을 손도 대지 않고 옮기는 마법이지요.”
“이 태양궁 안? 태양궁은 몹시 넓다. 정확한 위치가 어디인고?”
“저는 그 장소를 알지만 알려 드리지 않을 겁니다. 그러면 너무 재미가 없잖아요.”
“뭐, 뭐라?”
“가장 먼저 그 위치를 찾아내는 이에게 드래곤 레어에서 발견된 보물을 선물 드리겠습니다. 고대 왕국의 멸망을 불러 일으켰다고 하는 목걸이랍니다.”
“……!”
연회장 안에 경악에 퍼져 나간다. 귀족들이 속삭이듯 대화를 나눴다.
“공작 영애, 아니, 후작 부인께선 대체 무슨 장난을 치시는 건가?”
“미리 계획된 이벤트 아닐까요?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귀한 물건으로 이런 장난을…….”
“왜요. 재미있잖아요. 무엇보다 폐하께서도 흥미로워하시는 것 같은데.”
“순서대로 선물을 바치기만 하면 재미없죠. 보물찾기 같은 건가요? 어릴 적 생각이 나네.”
“이런 이벤트도 나쁘지 않은걸요. 재미있네요.”
이 상황에 대해 흥미로워하는 이가 절반, 의구심을 품은 이가 절반이었다.
과연 국왕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나디아에게로 쏠렸던 시선이 다시 상석으로 돌아갔다.
국왕은 정말 놀랐다는 듯 커다란 눈을 껌벅이고 있었다. 나디아와 조각상을 번갈아보던 그가 이내 입을 연다.
“정말…… 물건을 손도 대지 않고 옮긴 게냐? 어떻게? 그게 정말 가능한 것이냐?”
“그건…….”
이런 반응일 줄 알았다.
나디아는 지난 생에 왕실과 교류를 많이 가졌고, 관찰한 바에 의해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그건 바로 국왕의 정신연령이 매우 낮다는 것이었다. 온 세상이 꽃밭이라고 해야 할까?
물론 이 모든 건 국왕의 마음속에 나디아에 대한 호감, 그러니까 제 발로 자처해서 북부에 갈 만큼 충성스러운 여자가 감히 제게 거짓말을 할 리 없다는 신뢰가 깔려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녀가 장난스럽게, 그리고 애교스럽게 눈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건, 보석이 발견되면 알려 드리겠습니다. 벌써 비밀이 밝혀지면 재미가 없지요.”
“으하하하핫! 그래, 네 말도 일리가 있구나.”
보석을 발견하고 나면 그 비밀을 알려 준다는데 마음을 급하게 먹을 이유는 없었다.
무엇보다 꽤 흥미롭지 않은가? 제 생일을 기념하여 이런 이벤트가 생기는 것도 나쁘지 않다.
호탕하게 웃는 국왕이 명을 내렸다.
“고대 왕국의 유물을 가지고 싶은 자가 있거든, 연회장 밖으로 나서서 블루 다이아몬드를 찾아라! 왕족의 사적인 공간을 제외하면 어디든 출입하는 것을 허하노라!”
* * *
사람들이 빠져나간 연회장 안.
의자에 비스듬하게 기대앉은 발라지트 공작이 언짢은 얼굴로 혀를 쯧쯧 차고 있었다.
“이게 대체 뭐 하자는 짓인지…….”
천사상의 보석을 찾으러 바깥으로 나간 이가 절반―물론 직접 찾는 일은 데리고 온 사용인들에게 시키겠지만―, 그게 무슨 체통 없는 짓이냐며 연회장에 남아 있는 이가 절반쯤 되었다.
발라지트 공작은 당연히 후자에 속했다.
“폐하께서도 참, 아직도 이런 장난을 좋아하시니.”
“워낙 장난기가 많으신 분이잖습니까?”
차마 국왕에게 정신연령이 낮다고는 말할 수는 없었기에, 장난기가 많다는 표현으로 포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지척에 다가온 중년 귀족 하나가 공작에게 말을 건다.
“그나저나 공작님.”
“음?”
“윈터펠 후작 부인, 그러니까 따님께서 이런 일을 벌이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글쎄…….”
그가 아까부터 고민하고 있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 아이가 왜 이런 웃기지도 않는 짓을 했을까?’
그의 딸은 재미로 이런 짓을 할 만큼 머리가 나쁘지는 않다. 그 말인즉 이번 일에는 무언가 다른 의도가 숨어 있다는 뜻이었다.
‘태양궁 안에 보석을 숨겨 놓고, 그것을 이리 소란스럽게 찾아내야 하는 이유라…….’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실마리가 스쳐 지나갔다.
‘설마, 태양궁 안에서 보석을 분실한 건가?’
어쩌다가 천사상의 보석만 분실한 것인지는 몰라도 그렇다면 앞뒤가 맞는다.
왕실 경비대의 협조를 얻어 수색하려면 일단 분실 사실을 알려야 하니, 국보를 관리하는 데에 소홀했다는 책임을 피할 수가 없는 것이다.
결론을 내린 발라지트 공작의 입가에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제법 잔머리를 굴렸군.”
“예? 무슨 말씀이십니까, 공작님?”
“혼잣말이었다. 내 예상이 맞는다면 별 일은 없을 테니 천천히 기다리도록.”
마침내 답을 내린 공작이 느긋하게 허리를 기댔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한 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이 남아 있었다.
어떻게 하면 천사상 전체도 아니고, 보석만 분실할 수가 있는 것일까?
‘……분실이 아니라 도난인가?’
단순한 물욕 때문이든 윈터펠을 곤경에 빠트리기 위함이든, 누군가 천사상의 보석을 훔쳤다는 것도 말이 된다.
연회 도중에는 출입이 철저하게 통제되니 도난당한 보석은 아직 태양궁 안에 남아 있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공작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이거 일이 심각해질지도 모르겠군.’
대체 누가 천사상에 손을 댄 것인지는 몰라도, 나디아의 꾀에 걸린 이상 죄목이 까발려지게 되리라.
정체불명의 도둑을 향해 애도를 표한 그가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있는 둘째 딸 카레인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새하얗다 못해 새파랗게 질린 얼굴. 이마를 흠뻑 적신 식은땀. 불안한 듯 이리저리 흔들리는 시선. 무릎 위로 모은 양손은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리고 있었다.
“……!”
누가 봐도 죄 지은 자의 모습이었다. 순간적으로 뒷목이 오싹해진다.
‘설마…… 설마?!’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는 순간이었다.
쾅!
연회장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울리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온다. 선두에 서 있는 남자가 말했다.
“아룁니다! 천사상의 보석을 발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