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3화 (83/142)

제83화

“이 멍청한 것들! 길게 설명할 시간이 있을 것 같으냐? 잔말 말고 어서 따라와!”

“하지만 저희는 이 짐마차를 지켜야 합니다!”

“왕궁 경비대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뭐가 걱정이란 거야!”

“그렇기는 하지만…….”

하인들의 시선이 경비대원들로 향했다. 그러자 그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연다.

“이곳은 우리가 지키고 있겠다. 너희들은 어서 연회장 쪽으로 가 보아라.”

“가, 감사합니다. 그래도 한 명 정도는 남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데…….”

“내가 남을게.”

그렇게 말하고 나선 이는 하인들 중 하나인 베넷이었다.

그가 카레인을 돌아보며 말했다.

“레이디 카레인, 저 한 사람은 남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으음…….”

카레인은 못마땅하다는 듯 입술을 삐죽였지만 결국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경비병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럼 부탁하지.”

“예, 레이디.”

카레인은 그리 말하며 경비병들과 눈짓을 주고받았다. 윈터펠의 하인들은 알아차리지 못한 눈짓이었다.

하인 두 명이 서둘러 카레인을 따라나섰다.

“마님과 영주님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연회장 안에 있다. 나를 따라와.”

그녀의 뒤를 따라가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 남은 찝찝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대체 어떤 곤경에 처했기에 일개 사용인들의 도움이 필요하단 말인가?

‘직접 가 보면 알겠지.’

카레인을 따라가는 발걸음이 점차 초조해졌다.

* * *

“지난 개선식 때 이후로 처음이군. 수도에 방문한 걸 환영하네, 윈터펠 후작.”

그렇게 말하며 손을 내미는 이는 현 왕비의 아들, 2왕자 리암이었다.

왕비를 닮은 흑발. 총기가 맴도는 흑안은 과연 한 국가의 왕자라 할 만하다.

나디아가 그를 탐색하며 생각했다.

‘문제는 이 사람이 윈터펠의 적이라는 거지.’

적이 유능하면 유능할수록 아군이 힘들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오래간만이군, 후작부인. 결혼을 하고 난 이후 수도를 방문하는 건 처음이었던가?”

“…….”

자신이 내세워야 할 1왕자 프레이가 왕위에 조금도 욕심이 없는 한량이라는 것.

금발에 벽안인 1왕자가 웃으며 글렌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동화 속 왕자님처럼 잘생긴 얼굴임은 분명했지만, 어딘가 백치미가 흐르는 미모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인성이 쓰레기는 아닌 것 정도라고 할까…….’

지난 생애 평생을 공작 영애로 살았기에 왕실과의 교류도 많이 가질 수 있었다.

그 덕분에 1왕자가 구제불능의 망나니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다.

이유 없이 아랫사람들을 괴롭히지도 않고, 분에 넘치게 사치를 부리지도 않는다.

그냥…… 망나니라기보다는 놀기 좋아하는 한량이었다.

전 왕비가 산욕열로 사망한 이후, 새 왕비는 양아들을 견제하기 위해 그에게 왕위 계승자로서의 교육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런 환경 속에서 그는 팔자 좋은 한량으로 자라났다.

아니나 다를까 글렌이 눈짓으로 묻는다.

‘정말…… 이자가 최선인가?’

‘어쩔 수 없어요. 선택이 여지가 없으니까.’

그 말 그대로였다. 왕자는 둘뿐인데, 하나는 확실하게 아버지의 사람이니 나머지 하나를 고를 수밖에.

나디아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1왕자 저하께서도 그간 잘 지내신 모양이군요. 안색이 밝으십니다.”

“나야 늘 그렇듯이 하루하루가 즐겁지. 하하하하!”

그런데 그때였다.

“실례합니다.”

단상 위로 왕궁의 시종이 걸어 올라왔다. 왕족들 중 하나에게 용건이 있는가 싶었는데, 그가 바라보는 것은 나디아와 글렌이었다.

“후작님, 그리고 후작 부인. 윈터펠의 사용인들이 두 분을 뵙길 청하고 있습니다.”

“응?”

의아해하며 시선을 돌리니 윈터펠 가의 하인들이 상석을 올려다보는 모습이 보인다.

차마 왕족이 있는 상석 위로 올라올 생각은 못하고 왕실의 시종에게 말을 전한 듯했다.

나디아는 단번에 그들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짐마차를 지키라고 명령한 하인들인데…….’

그들이 이 자리에 있다는 건 무언가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었다. 불길한 느낌이 등허리를 감쌌다.

“무슨 용건이라고 하던가?”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후작님과 후작 부인을 불러 달라고만 하더군요.”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직접 물어볼 수밖에.

나디아가 왕비를 향해 살짝 몸을 숙이며 말했다.

“비전하, 가문의 하인들이 제게 급히 전할 말이 있다 하여 이만 물러가려 합니다.”

“급한 용건이 있다면 가 봐야죠. 다음에 봐요, 윈터펠 후작 부인.”

나디아와 글렌이 왕족들에게 인사한 후, 서둘러 상석을 내려왔다.

두 사람이 계단을 내려오자, 하인들이 쪼르르 달려온다. 그들이 입을 열기 전에 나디아가 먼저 물었다.

“여기는 왜 온 거지? 분명 다른 임무를 줬을 텐데.”

“위급한 일이 생긴 것 아니었습니까?”

“뭐?”

“마님의 여동생이라는 분이 찾아와선…… 영주님과 마님이 곤경에 처했으니 어서 연회장으로 가 보라고…….”

나디아가 무슨 말을 하느냐는 듯한 표정을 짓자, 그들의 안색이 곧장 새파래졌다.

“아무런 사건도 없었어. 우린 그저 파티의 손님들과 안부 인사를 나눴을 뿐이야.”

“허, 허억! 저, 저희는 마님의 가족분이 너, 너무 위급한 일이라는 듯이 말하기에……. 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베넷이 남아 있습니다. 게, 게다가 왕궁 경비대도 있으니 무,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목소리를 낮춰. 사람들 이목을 끌어서 좋을 것 없으니.”

하아,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안 보인다 싶더니 뒤에서 이런 일을 꾸미고 있었구나.

글렌이 말했다.

“우리가 가져온 선물을 노린 모양이군.”

“그런 것 같네요. 우선 그쪽으로 가 봐요.”

연회장 바깥으로 빠져 나가는 발걸음이 분주했다. 무슨 일이냐며 다가오는 귀족들을 향해, 나디아는 그저 바람을 좀 쐬고 오겠다는 말로 둘러댔다.

그리고 서둘러 짐마차로 돌아왔을 때, 나디아는 한눈에 무엇이 문제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베넷!”

열린 짐마차의 문 아래로 쓰러져 있는 베넷의 모습이 보인다. 하인들이 다가가 축 늘어진 그의 몸을 감쌌다.

“서, 설마 죽은 건…….”

“심장이 뛰고 있습니다. 그저 기절한 것뿐인…… 이게 무슨 냄새야?”

기절한 베넷의 몸에서는 몇 걸음 떨어진 나디아에게까지 가닿을 만큼 심한 술 냄새가 나고 있었다.

깜짝 놀란 마음에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자세히 보니 그의 신체 일부와 옷자락에는 젖은 자국이 선연했다.

마치 일부러 술을 뒤집어씌우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상황을 짐작한 나디아의 입에서 짧게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 소리에 깜짝 놀란 하인들이 손사래를 치며 변명했다.

“마, 마님. 아닙니다. 베넷은 절대 마님이 주신 임무를 내팽개치고 술을 마셨을 사람이 아니에요!”

“나도 알아. 어서 짐마차 안을 살펴보렴.”

결과는 예상했던 대로였다.

“보, 보석이…… 사라졌습니다..”

생일 선물을 바치는 형식으로 왕가에 돌려주기로 했던 보물. 블루 다이아몬드가 들려 있었던 천사상의 양손은 텅 비어 있었다.

이럴 줄 알았다. 나디아가 쯧 하고 혀를 차며 말했다.

“그러니까 하인들 중 두 명은 임무를 내팽개쳤고, 나머지 한 명은 보초를 서다 술을 마셨다. 하인들을 잘 관리하지 못해 보석을 도둑맞은 것은 윈터펠 가문의 잘못이다…… 이렇게 몰아가겠군요.”

글렌이 답했다.

“그대의 여동생이라는 작자가 가져간 것이겠지?”

“그렇겠죠. 하지만 카레인의 독단적인 행동일 가능성이 높아요. 아마 아버지나 왕실 쪽에서는 모를 겁니다.”

우선 왕실은 이런 소동을 만들어 낼 이유가 없었다.

그들 입장에선 보물을 되찾는 것이 목표일 텐데, 이런 가짜 도둑 소동을 벌였다간 기껏 되찾은 보물을 선보이지도 못하고 지하 창고에 숨겨 둬야 하는 불상사가 생겨 버린다.

아버지 역시 굳이 왕가의 뜻을 거스르면서까지 이런 유치한 수작을 벌일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저쪽에서 굳이 보석을 훔칠 이유는 없다고 여긴 것이 실책이었다.

카레인, 그 아둔하면서도 겁 많은 녀석이 혼자 이런 일을 벌이다니.

“왕실의 동의가 없었다면 왕궁 경비대들은…… 아, 카레인이 매수라도 한 모양이군.”

“그렇겠죠. 이 자리에 있던 몇몇 사람들만 매수하면 되니까요.”

발라지트 가문의 위세까지 더해졌으니 왕궁 경비대를 매수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으리라.

나디아가 멀리 떨어져 있는 경비대원들을 힐끔 바라봤다.

다들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뻔뻔한 얼굴로 경비를 서고 있다. 이 일에 대해 추궁해도 자기들은 모르는 일이라고 발뺌하리라.

‘사실을 밝혀 봤자 우리가 부주의해서 잃어버려놓고선, 왕궁 경비대의 잘못으로 몰아간다고 비난할 구실만 주겠지.’

글렌 역시 그 점을 놓치지 않았다.

“왕실이 우리를 도와주진 않을 거다. 왕가의 보물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책임을 물었으면 물었지.”

“맞아요. 아버지 역시 이왕 일이 이렇게 된 거, 우리를 공격할 빌미가 생겼다고 여길걸요.”

“쯧.”

도난을 외부에 알리고 협조를 구할 수는 없다.

그 순간 수색은 뒷전이고, 윈터펠 가문을 비난하는 것만 우선할 테니 말이다.

‘하지만 왕실에 알리지 않고 왕궁을 수색할 수는 없어. 대체 어떻게 해야…… 아!’

초조하게 입술만 물어뜯고 있던 순간, 나디아의 머릿속에 번개처럼 무언가가 스치고 지나간다.

순식간에 계획을 구체화한 그녀가 입을 열었다.

“글렌.”

“응?”

“연극을 해 볼 생각인데 도와줄래요? 좋은 구경 시켜줄게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입가에는 삐뚜름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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