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2화
시간이 흘러 마침내 왕의 탄신연 당일이 되었다.
왕궁으로 향하는 날의 이른 아침, 일찍 일어난 나디아가 타운 하우스의 창고로 향했다. 왕에게 바칠 선물이 보관되어 있는 장소였다.
“여긴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마님?”
“오늘 연회에서 바칠 선물을 마지막으로 확인하려고 해.”
“아, 이쪽으로 오십시오.”
나디아가 신경 써서 다시 한번 점검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놈의 천사상 때문이지, 뭐.’
백여 년 전 드래곤에게 빼앗긴 왕실의 보물. 그것을 생일 선물 형식으로 바치는 것에 합의했기 때문이다.
이제 와서 문제가 생기면 괜히 트집 잡힐 구실만 만드는 셈이니 주의를 기울일 수밖에.
끼익.
창고 문이 열리고 번쩍거리는 보물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하나 같이 진귀한 물건들이었지만 개중 화룡정점은 가운데에 놓인 조각상이었다.
함께 뒤따라온 하녀 리사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와…… 괜히 왕가의 보물이 아니네요.”
“그지?”
나디아도 그 말에는 열렬히 동의하는 바였다.
양손을 모은 채 위를 바라보고 있는 천사상은 마치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 듯 생동감이 넘쳤다.
물론 그뿐이었다면 아무리 조각사의 솜씨가 신통하다 한들 왕실의 보물이 되진 못했으리라.
핵심은 천사상이 양손으로 붙잡고 있는 블루 다이아몬드였다.
웬만한 남자 주먹보다 훨씬 커다란 크기의 보석. 반짝이는 보석이라면 환장하는 드래곤이 강탈해 갈 만했다.
“본성의 입구에 장식해 놓으면 참 어울리겠는걸요.”
“응, 정말 그렇…… 아니, 아니. 무슨 소리니, 리사? 이건 돌려줘야 하는 물건이야. 왕실의 보물이잖아.”
“치이, 왜 이럴 때만 왕실 노릇이래요? 가뭄이 찾아왔을 때는 외면하기만 하더니.”
토박이 북부인이라 그런지 왕실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듯했다. 북부와 남부 간의 감정의 골을 보여 주는 단적인 예였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고 하잖아. 적어도 수도 안에 있을 때는 말을 조심하렴.”
“네에…….”
“그리고 너희들, 이 조각상을 반드시 흠집 하나 나지 않도록 섬세하게 옮겨야 한다. 왕실의 국보를 부숴 먹었다간 나도 너희들을 보호해 주기 힘들어.”
“명심하겠습니다, 마님!”
“좋아.”
준비한 선물에 문제가 없다는 건 확인했다. 이제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몸을 치장해야 할 때였다.
나디아가 몸을 돌리며 말했다.
“자, 이제 목욕부터 하러 가자.”
* * *
몇 시간 후.
“북부의 맹주, 윈터펠 후작님과 후작 부인 입장하십니다!”
입장을 알리는 시종의 목소리를 뒤로 하며, 두 사람은 동시에 연회장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연회의 규모는 대단했다. 그 화려함을 말로 설명하자면 반나절은 걸릴 정도였다.
연회장 안을 둘러보던 글렌이 짧게 감상을 표한다.
“처음 생일 파티를 여는 어린아이의 파티장 같군.”
“그 나이에 그러고 있으니 아버지의 꼭두각시 노릇이나 하고 있지요.”
“그나저나 이렇게 성대하게 연회를 열어 놓고선, 정작 본인은 보이지 않는데?”
“파티의 주인공은 마지막에 등장해야 한다, 라는 지론이 있는 게 아닐까요?”
연회장의 반대편에는 왕족들이 자리하는 상석이 있었는데, 국왕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의 아내와 자식들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왼쪽부터 공주, 왕비, 그리고 1왕자와 2왕자.
나디아가 멀리서 그들의 면면을 하나씩 확인하며 생각했다.
‘공주는 별로 존재감이 없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문제는 왕자 두 명이었다.
죽은 첫 번째 왕비가 낳은 1왕자, 프레이.
지금의 왕비가 낳은 2왕자, 리암.
왕위 계승 구도에 긴장감이 생기기 딱 좋은 족보라 할 수 있겠다.
장자라는 정통성을 지닌 1왕자와 현 왕비를 등에 업은 2왕자.
그녀의 아버지인 발라지트 공작이 미는 후계는 단연코 2왕자 쪽이었다.
‘1왕자의 죽은 어머니는 북부에도 남부에도 속하지 않는 제 3세력 가문 출신이고, 현 왕비는 남부 출신이니까.’
본래 계획대로라면 발라지트 공작은 서서히 1왕자의 입지를 말려 죽인 후, 자연스럽게 2왕자를 왕세자로 추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왕은 예상치 못하게 급사한다. 모두가 상상하지 못했던 죽음이었다.
그 때문에 공작은 2왕자의 왕위 계승에 다소 억지를 부리게 되었고, 북부가 반대할 명분을 줘 버리고 말았다.
나디아가 살아 있었다면 그 결과까지 목도할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녀는 가족과 약혼자에 의해 목숨을 잃었고, 그 때문에 누가 왕위를 계승하는지 알지 못했다.
‘승자는 내가 만들면 돼.’
나디아가 팔짱낀 팔을 살짝 끌어당기며 속삭였다.
“일단 왕족들에게 인사하러 가요.”
“그러지.”
아직 왕이 등장하지 않았기에, 손님들은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사교 활동을 하는 중이었다.
나디아와 글렌이 상석으로 걸어가는 도중에도 몇몇 사람들이 다가와 말을 걸기도 했는데, 대다수 북부에서 온 귀족들이었다.
그들에게 적당히 대답해 준 뒤에야 두 사람은 상석에 다가설 수 있었다.
“왕비 전하를 뵙습니다.”
“오래간만이에요, 발라지트 영애. 아니, 이제는 윈터펠 후작 부인이라고 불러야겠죠.”
긴 흑발을 틀어 올린 중년 여자가 부드럽게 웃는다. 2왕자 리암의 친모, 그리젤다였다.
“신혼 생활은 즐거운가요?”
“더할 나위가 없답니다.”
“그거 잘됐군요. 하긴, 그토록 사랑하는 남자를 쟁취했으니 당연한 일이겠죠.”
왕비가 글렌을 힐끔 바라보며 후후 웃었다.
“반가워요, 윈터펠 후작.”
“왕비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폐하의 탄신일을 축하하러 와 줘서 고마워요. 이왕 수도에 방문했으니 모쪼록 즐거운 시간이었으면 좋겠군요. 아 참, 나디아 양…… 아니, 아니. 후작 부인은 부친을 뵈었나요? 거의 1년 만에 돌아오는 고향이잖아요.”
“지난주에 공작 저에서 함께 식사를 했답니다.”
“오랜만에 가족과 만나서 기뻤겠어요. 참, 방금 발라지트 공작도 내게 인사를 하고 갔답니다. 어디 보자……. 아, 저기 있네요.”
나디아는 왕비가 가리키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인 발라지트 공작이 다른 귀족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서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이 살짝 가늘어진다.
사실 그가 이 자리에 참석한 것 자체는 이상할 것 없는 일이었다. 아니, 오히려 참석하지 않았다면 더 이상했겠지.
다만 나디아가 의아하게 여기는 것은…….
‘카레인은 어디 갔지? 안 왔을 리가 없는데.’
* * *
“하암…….”
윈터펠 가의 하인, 윌슨이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했다. 아무 할 일도 없이 가만히 서 있는 건 의외로 괴로운 일이다.
사실 할 일이 아무것도 없는 건 아니고, 엄연히 ‘경비’라는 임무가 주어져 있긴 하지만…….
“왕궁에 도둑질을 하러 들어오는 미친놈이 있기는 한가? 게다가 오늘 같은 날은 경비병들이 사방에 쫙 깔렸는데 말이야.”
“한눈 팔지 말고 똑바로 서. 오늘 같은 날이니까 인파에 섞여서 몰래 왕궁으로 들어오는 이가 있을지 어떻게 알아?”
“그런 놈은 왕궁 경비대가 잡아내겠지.”
윈터펠 가의 하인 세 명이 목소리를 낮춰 수군거린다. 나디아로부터 왕에게 바칠 선물을 지키라는 명을 받은 이들이었다.
물론 겨우 하인 세 명에게 값비싼 보물을 맡긴 것은 아니고, 주변에 왕궁 경비대가 함께 하긴 했다.
그가 입을 다물자, 어수선했던 하인들 사이로 다시 침묵이 찾아온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멀리서 들려온 소음이 짐마차들 사이에 내려앉은 침묵을 완전히 깨부쉈다.
지척에 있는 회랑 전체가 쩌렁쩌렁하게 울릴 만큼 커다란 발소리였다.
“……이게 무슨 소리지?”
“발소리 같은데. 누가 이곳으로 뛰어오는 모양이야.”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궁금증은 곧 풀렸다. 말소리가 멈춤과 동시에 웬 금발의 여인이 등장한 것이다. 입고 있는 옷으로 추측컨대 분명히 귀족가의 여식이었다.
‘귀족 영양이 이곳에는 왜……?’
윌슨이 의아해하며 왕궁 경비대를 부르려는 찰나,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윈터펠 후작가의 사용인이 너희들이니?”
“그렇습니다만 무슨 일로…….”
“맙소사, 아직도 소식을 듣지 못한 모양이야. 큰일이 났으니 어서 연회장으로 가 보아라. 너희들의 주인에게 큰일이 생겼으니.”
“예? 대체 무슨 일…….”
“너희들의 주인, 후작 부부에게 큰일이 생겼대도! 꾸물거릴 때가 아니야!”
“저, 저희는 마님으로부터 이 마차를 지키라고 명받았습니다. 함부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보다 레이디께서는 어, 어느 가문의 영애이시길래…….”
“뭐?”
정말로 제 얼굴을 모른다는 듯한 태도에 금발 여자의 표정이 멍해졌다.
“나, 날 몰라?”
“제가 레이디의 신분을 여쭤도 되겠습니까?”
“허…….”
잠시 멍하게 눈만 껌벅거리던 그녀가 ‘하긴, 북부에서 온 이들이니까’ 하고 작게 중얼거린다. 이내 목소리를 키워 말했다.
“나는 발라지트 공작가의 차녀, 카레인 발라지트다. 윈터펠 후작 부인과는 자매 사이지. 지금 내 언니이자 너희들의 주인이 큰 곤경에 빠졌단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뭘 꾸물거리고 있는 거야!”
……전혀 안 닮았는데?
그녀가 신분을 밝힌 순간, 처음으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생각이었다.
머리색과 눈동자색은 물론, 이목구비도 판이하게 다르다. 아무리 이복 자매라도 이렇게 생판 남 같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저희가 도와드릴 일이 있습니까, 레이디 카레인?”
하지만 뒤이어 다가온 경비병들이 그리 말하자 그녀의 신분을 신뢰할 수밖에 없었다.
“이 자들이 내 신분을 신뢰하지 못하는 모양이야.”
“이 분은 발라지트 공작님의 차녀, 카레인 발라지트 양이 맞소.”
하인들이 난처한 눈빛으로 시선을 교환했다.
‘진짜 마님의 동생분이라는데?’
‘그, 그럼 정말 마님께 문제가 생긴 건 아닌가?’
공작의 강요에 의해 공식적인 자리에선 사이좋은 자매인 척 했기에 두 사람이 남보다 못한 사이라는 건 물밑에서 알음알음 퍼진 사실이다.
여동생이 언니인 나디아에게 큰일이 생겼다고 호들갑을 떨고 있으니 덜컥 걱정이 앞서는 것도 그들 입장에선 당연한 일이었다.
“저, 실례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을 좀 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