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1화
결투가 끝났음에도 토너먼트의 승자를 누구로 봐야 할 것인지 의견이 분분했다.
본래 우승자는 지호 경이었지만, 윈터펠 후작이 지호 경을 꺾었으니 그를 우승자로 보아야 한다.
아니다. 결승전이 끝난 시점에서 이 토너먼트는 이미 끝난 것이다. 그 이후의 결투는 추가적인 이벤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우승자는 지호 경이 맞다.
양쪽 모두 그럴듯한 주장이었다. 당연하게도, 이지호를 감싸는 쪽은 발라지트 공작의 파벌에 속한 이들이 주류였다.
어느 한쪽도 물러서지 않는 팽팽한 대치가 이어지고 있을 때, 치료를 받고 나온 당사자의 한마디가 상황을 종료시켰다.
“제가 졌으니 우승자는 마땅히 후작님이 되어야지요.”
본인이 패배를 시인한다니 달리 더 말을 얹을 수 있을 리가.
공작이 언짢은 표정을 지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리하여 우승 상품은 글렌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가 장미를 바치는 레이디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표현하는 쪽이 옳겠지만.
“승자, 글렌 윈터펠 후작은 국왕 폐하께 예를 표하십시오.”
글렌이 국왕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갖췄다. 왕실의 시종이 유리 케이스 안에 놓인 황금 장미를 가지고 들어온다.
황금 장미를 받아 든 그가 경건한 태도로 몸을 일으켰다.
“자, 이제 자네의 레이디에게 꽃을 바치게나.”
국왕이 그리 말하자 흥미 어린 시선이 나디아에게로 향한다.
황금 장미의 주인이 누가 될지, 답이 명확했던 것이다.
아내가 있는 우승자가 다른 여인에게 장미를 바쳤던 전례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글렌이 한 걸음씩 발을 옮기가 주변 사람들은 뒤로 물러나 길을 터 주었다. 순식간에 나디아에게로 향하는 길이 만들어진다.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나디아가 얼떨떨하게 눈을 깜박였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람…….’
황금 장미를 받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조금도 예상지 못한 상황인 만큼 매우 당황스러웠고, 당황스러운 만큼…… 기뻤다.
그녀의 입가에 미처 숨기지 못한 기쁨이 배실배실 새어 나오고 있었다.
카레인의 황금 장미를 남몰래 부러워했던 건 어린 시절의 치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이렇게 기쁜 걸 보면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다.
뚜벅.
마침내 글렌이 코앞까지 다가와 섰다. 그와 눈을 마주치기 위해 나디아는 고개를 꺾어 위를 올려다보아야 했다.
가까이 다가온 그를 올려다보고 있자니 문득 결혼식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도 이런 자세로 마주보고 서서 맹세의 입맞춤을…….
‘아니, 내가 무슨 생각을.’
그때도 생각했지만, 참 잘난 얼굴이다. 그녀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어째서인지 심장이 터질 듯이 뛰고 있었다.
지척까지 다가온 글렌이 한쪽 무릎을 꿇는다. 그러고는 팔을 뻗어 황금 장미를 바치며 말했다.
“부디 이 장미를 받아 주겠나?”
“네, 기꺼이.”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나디아가 수줍게 웃으며 장미를 받아들었다. 그러자 사방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온다.
나디아가 어느새 일어선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덕분에 제가 황금 장미를 받는 날도 오네요.”
“이리 기뻐할 줄 알았으면 파비안 대신 내가 나갔을 텐데.”
“저도 제가 이렇게까지 좋아할 줄은 몰랐어요.”
나디아가 행복하면서도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황금 장미를 쓸어내렸다.
아주 오래전에 단념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이복동생이 받는 호의나 관심 같은 것들이 내심 부러웠나 보다.
“정말, 정말 기뻐요.”
“…….”
“고마워요, 글렌.”
……그런데 이 뒤에는 어떻게 하면 되더라?
그녀가 과거의 기억을 더듬으며 고민했다. 황금 장미를 받은 카레인이 어떻게 행동했던가?
‘아마…… 장미를 준 기사에게 감사의 입맞춤을 했었지.’
뺨에 살짝 입술을 가져다 대는 가벼운 키스였다.
하지만 그건 미혼인 레이디와 기사의 이야기고, 나디아와 글렌은 엄연히 결혼을 한 부부 사이다.
그런 만큼 뺨에 입맞춤을 하는 것 정도로는 부족한 감이 있으리라.
“글렌, 잠시만 고개 좀 숙여 봐요.”
“이렇게? 그런데 왜…….”
“잠시 실례 좀 할게요.”
고개를 숙여 주긴 했지만 원체 키 차이가 있었던 터라 까치발을 들어야 했다.
발꿈치를 들어 올린 나디아가 글렌의 목에 팔을 감았다. 그의 어깻죽지가 딱딱하게 굳는 것이 팔 아래로도 느껴진다.
글렌이 당황해하며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그녀의 입술이 말소리를 삼키는 것이 먼저였다.
“……!”
그의 눈이 커다랗게 벌어지는 것을 보며 나디아는 눈을 감았다. 입술 위로 따뜻한 사람의 체온이 부드럽게 내려앉는다.
입맞춤은 길지 않았다. 애당초 퍼포먼스용이었으니 과할 필요는 없었다.
짝짝짝짝짝!
짧은 접촉 후 나디아가 떨어져 나가자, 주변의 환호성이 더욱 커져갔다.
요란한 환호성 속에서 글렌이 입을 뻐끔거리고 있었다. 말을 잇지 못하는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다.
“지금, 이게…….”
“갑자기 미안해요. 그런데 보통 황금 장미를 받은 레이디는 감사의 입맞춤을 한다고요. 사람들이 보고 있잖아요. 어서 웃으세요.”
그 말 그대로였다. 이 자리에 모인 이들 중 나디아가 갑자기 입맞춤을 한 것을 남사스럽게 여기는 이는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쏟아지는 환호성 속에서 나디아가 수줍게 웃었다.
마냥 행복했던 나디아는 미처 알지 못했다. 오늘 일이 어떤 일을 몰고 올지.
* * *
“아아악! 그건 내 거였는데!”
토너먼트가 파하고 각자의 자택으로 돌아가는 길.
호화로운 공작가의 마차 안에 찢어질 듯한 악다구니가 울리고 있었다. 공작 영애 카레인 발라지트의 목소리였다.
함께 올라탄 측근 하녀가 벌벌 떨며 그녀를 달랬다.
“아, 아가씨께선 재작년에도 황금 장미를 받으셨는걸요. 윈터펠 후작 부인은 아가씨께서 이미 옛날 옛적에 받은 물건을 뒤늦게야 얻은 것뿐이랍니다.”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내가 2년 전에 받은 적이 있다고 해서, 그걸 왜 언니한테 뺏겨야 하는데!”
고함을 지르는 그녀의 얼굴은 수치심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지호가 토너먼트에 참가한다고 했을 때, 올해의 황금 장미도 당연히 제 것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드래곤도 토벌한 최강의 기사가 아니던가?
그가 결승에서 간단히 승리했을 때만 해도 모두가 자신을 부러워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건 언제 느껴도 짜릿한 시선이었다. 그녀의 허영심을 채워 주기에 충분할 만큼.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이변이 일어났다. 이지호가 갑자기 윈터펠 후작에게 결투를 신청한 것이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카레인은 개의치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했다.
얄미운 이복 언니의 남편을 꺾은 기사가 제게 황금 장미를 바치면 더더욱 기분이 좋아질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는 끝내 윈터펠 후작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지 못했고, 그 결과 저까지 망신을 당한 것이다.
‘황금 장미를 받을 줄 알고 우쭐대더니 꼴좋다고 생각하겠지.’
자신을 질투하는 이들이 어디 한둘이던가? 다들 이때다 싶어 저를 깎아내릴 것을 생각하니 약이 올라 미칠 것 같았다.
카레인의 목소리가 더욱 날카로워진다.
“대체 왜! 그 망할 놈은 왜 그런 행동을 한 거야! 가만히 있었으면 토너먼트의 우승자가 될 수 있었을 것을!”
“카레인, 자중하거라.”
“아버지는 화가 나지도 않으세요? 그자의 돌발행동 때문에 제가 망신을 당했잖아요. 저의 체면은 곧 가문의 체면이라고요. 그를 벌해야 해요. 네?”
“말도 안 되는 소리. 이 토너먼트는 그저 사소한 친선전에 불과하다. 이런 중요하지도 않은 행사에서 패했다고 수하를 벌하란 말이냐?”
“왜 중요한 행사가 아니에요? 폐하의 탄신연 때문에 전국 각지의 귀족들이 참관한 경기인걸요! 그런 자리에서 제가 망신을 당한 거잖아요.”
“쯧.”
공작이 눈을 감으며 혀를 찼다. 통 말귀를 알아먹질 못하는군.
제 수하가 윈터펠 후작에게 패배한 이상, 이쪽에선 이 토너먼트를 사소한 이벤트쯤으로 치부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었다.
이런 작은 경기에서 패한 것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그런데 자신이 이지호에게 벌을 내린다면 그것은 발라지트 공작가가 오늘의 패배에 신경을 기울이고 있다는 뜻밖에 더 되는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 같으니라고.
“한 번만 더 내 앞에서 그 얘기를 꺼낸다면, 벌은 지호 경이 아닌 네가 받을 줄 알아라.”
“아, 아버지! 어떻게 제게…….”
급기야 카레인의 눈가에 살짝 물기가 맺혔지만 공작의 태도는 요지부동이었다.
마차가 공작 저에 도착할 때까지 그는 딸에게 위로의 말을 단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달칵.
“도착했습니…… 으아앗!”
문을 열어 주며 도착을 알리는 마부를 밀치곤, 카레인이 저택 안으로 뛰어갔다.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는 그녀의 눈가가 빨갛게 물들어 있다.
망신을 당한 것이 더 서러운지, 아니면 아버지가 제 편을 들어주지 않은 게 더 서러운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발라지트 공작이 한숨과 함께 말했다.
“하아…… 저 철없는 것 같으니라고. 너는 어서 가서 달래 주기나 하거라.”
“네, 넷!”
그 말에 눈치만 보고 있던 측근 하녀 역시 서둘러 저택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새 아가씨의 모습은 사라져 버렸지만 그녀가 갈 곳이야 뻔하다. 측근 하녀가 카레인의 침실 문을 두드리며 물었다.
“아가씨, 들어가도 될까요?”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침묵은 때때로 답을 대신하는 법이다. 아니나 다를까 문이 열리는 소리가 울렸음에도 꺼지라는 고함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다.
“카레인 아가씨?”
“흐윽, 흑. 흐어어엉.”
카레인은 침대 위에 엎드린 채 엉엉 울고 있었다. 조심스레 침대 맡에 다가간 그녀가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울지 마셔요, 아가씨.”
“흐윽…… 아버지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공작님께서도 미안하셨는지 저를 보내셨답니다. 가서 달래 주라고 하시더군요. 그분께서도 승리를 빼앗긴 것에 속이 상하셨겠지요. 진심으로 하신 말씀은 아니었을 거예요.”
“그렇지만, 흣, 가장 속상한 건 나란 말이야…….”
말은 그렇게 해도 목소리에 담긴 서러움은 많이 꺾인 상태였다. 아버지가 자신을 달래 주라고 직접 명령했다는 것에 위안을 얻은 듯했다.
서러움이 가시자 찾아오는 것은 분노였다. 제 것을 빼앗아간 이복 언니에 대한 분노.
으득, 그녀가 이를 갈며 중얼거린다.
“오늘 당한 건 반드시 갚아 줄 거야.”
윈터펠 후작가가 한 일이라곤 결투 신청을 받아 준 것뿐인데 대체 무슨 원한을 갚겠다는 건지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시중 드는 입장에선 주인의 비위를 맞춰 줄 수밖에.
“네, 네. 그럼요. 언젠가 기회가 올 거예요. 그러니 그만 우셔요. 몸이 상할까 걱정됩니다.”
따뜻한 위로에 조금 진정이 됐는지, 한참을 울던 카레인이 마침내 고개를 들었다. 눈물이 마른 눈동자가 증오로 번뜩거린다.
“마틸다.”
“네, 말씀하세요.”
“폐하의 탄신연이 열리는 날짜가 정확히 언제지?”
귀족들이 한 자리에 모인 그때, 오늘의 망신을 반드시 되돌려 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