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0화 (80/142)

제80화

예상치 못한 이벤트였지만 장내의 분위기는 긍정적이었다.

종종 라이벌로 비교되었던 두 사람의 결투를 직접 볼 수 있다니. 어디 가서 이런 구경을 한단 말인가?

“어느 쪽이 이길 것 같으세요?”

“글쎄요. 잘은 모르지만 저는 윈터펠 후작님이 더…….”

“지호 경은 드래곤을 쓰러트린 영웅이잖아요. 저는 지호 경에게 한 표 던지겠어요.”

“오늘 있었던 경기 중에 가장 흥미로운데.”

심지어 윈터펠 가의 가신들까지 마침 잘되었다면서, 이 기회에 콧대를 깔아뭉개라고 성원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 결투가 탐탁지 않은 것은 저 혼자뿐인 모양이다. 나디아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말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여기까지 온 이상 물릴 수가 없겠네요.”

이 상황에서 경기를 취소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이지호의 계략에 말려들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게다가 결투 중에 발생하는 부상은 상대의 책임을 물을 수 없으니 걱정이 앞설 수밖에.

“몸조심해요. 절대 다치면 안 돼요. 그리고 이거…… 어차피 미신인 건 알지만, 제 마음이 편해지게 매고 가요.”

그리 말하며 나디아가 꺼내 든 것은 하얀 손수건이었다. 끝머리에 제 이름의 이니셜이 수놓인 손수건.

“전장에 나갈 때 아내가 준 물건을 몸에 지니면, 행운이 찾아온다는 말이 있잖아요.”

“…….”

“뭘 머뭇거리고 있어요? 어서 받아요.”

망설이는 듯한 태도에 그녀는 손수건을 든 손을 더욱 불쑥 내밀었다. 기분 탓인지 그의 뺨이 조금 붉어진 것 같기도 하다.

마침내 손수건을 받아든 글렌이 입을 열었다.

“고맙게 받지.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오히려 지금 상황이 반갑거든.”

“네? 뭐가요?”

나디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지만 글렌은 의미심장하게 웃을 뿐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때, 갑옷을 가져온 하인들이 시중을 들기 시작했기에 그녀는 하릴없이 몇 걸음 물러서야 했다.

파비안이 말했다.

“마님, 일단 객석으로 돌아가시지요.”

“……그래.”

이왕 일이 여기까지 온 이상 그의 승리를 기원하는 수밖에.

나디아는 사용인들과 함께 제자리로 돌아갔다.

* * *

준비를 끝마친 글렌이 경기장 위로 올라왔을 때, 이지호는 이미 오래전부터 기다리고 있던 상태였다.

하지만 그는 글렌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그가 바라보는 것은 글렌이 아닌 글렌의 팔뚝에 매달린 손수건이었다. 너무 노골적인 시선이라 꽤 거리가 떨어져 있음에도 모른 체할 수가 없다.

‘……이것 봐라?’

처음에는 그저 기사로서의 호승심인가 했다. 소문이 자자한 이방인 기사와 한 번쯤 겨뤄 보고 싶다는 생각은 글렌 역시 해 보았던 것이니까.

하지만 손수건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어떤 직감이 고개를 들었다. 그건 본능적인 불쾌감이었다.

불쾌감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글렌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제가 답할 수 있는 거라면 답해 드리지요.”

“만일 경이 이긴다면 어느 레이디에게 장미를 바칠 건가? 경에겐 아내도 약혼녀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만.”

“제 주군의 따님이신 레이디 카레인에게 바치는 것이 옳겠지만…… 제 갑작스러운 제의로 놀라셨을 후작 부인께 위로의 의미로 드리도록 하지요.”

“하.”

결국 글렌의 입에서 짧게 헛웃음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아무래도 제게 결투를 신청한 이유는, 기사로서의 호승심이 아니라 연적으로서의 적개심인 모양이다.

“경의 고향이 동대륙이라 했나?”

“아니요. 동대륙보다 훨씬 더 먼 곳입니다.”

“뭐 동대륙이든 어디든 좋아. 내가 충고 하나 하지.”

“충고?”

“경의 고향에선 어떨지 몰라도, 이 나라에서 남의 아내를 넘본다면 칼침을 피하지 못하게 될 거다. 바로 오늘처럼 말이야.”

그러자 이지호가 눈썹을 치켜올린다.

“갑자기 그런 이야기가 왜 나오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걸 굳이 내 입으로 말해 줘야 하나? 이미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을 텐데.”

“…….”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이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매우 인위적인 미소였다.

“후작님의 충고는 마음속에 새겨 두지요. 보답으로 저도 한 가지 알려 드리고 싶습니다. 아이가 없는 부부는 진짜 부부가 아닙니다. 그 말인즉, 이혼이 매우 쉽다는 뜻이죠.”

그가 웃으며 비아냥거렸다.

“설마 공작님께서 귀한 따님을 평생 열악한 북부에 처박아 둘 거라고 생각하신 건 아니겠지요?”

“…….”

이혼. 그건 글렌의 아픈 부분이었다.

나디아에게서 모든 일이 끝나면 이혼해 주겠다는 말을 들은 것이 얼마 전의 일이었으므로.

하지만 이대로 입 다물 수는 없었다.

“나와의 결혼을 택한 건 공작이 아니라 나디아 본인이라는 걸 설마 모르고 있는 건가?”

“…….”

글렌은 미처 몰랐지만 그건 이지호의 가장 아픈 부분이었다.

공작에게서 전해 들은 말이 그의 상처를 헤집었다. 개선식 직전에 약혼이 뒤집어진 건 다름 아닌 나디아 본인의 선택이었으니.

“마음대로 생각하십시오. 어차피 결혼 생활은 길지 않을 테니 지금 즐겨 두는 것이 좋겠지요.”

“경이야말로 지금 멋대로 떠들어 두게. 이 경기가 끝난 후엔 그러지 못할 테니.”

“…….”

“…….”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경기장 위를 서리라도 내려앉을 것 같은 한기가 감싼다.

챙!

두 사람이 동시에 검을 빼들자, 객석에서 환호성과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곧이어 거대한 충돌음이 요란한 환호성을 덮어 버린다.

쾅! 카가가가각!

정면으로 충돌한 오러가 허공에 불꽃처럼 일렁였다. 마치 오러가 폭발하는 것 같은 장면이었다.

동시에 뒤로 몇 걸음 물러난 두 사람이 곧장 다시 검을 내리 긋는다.

챙! 채앵! 챙!

검과 검이 순식간에 수십 번 충돌하자 마치 검이 우는 것 같은 소리가 울렸다. 관중들 대부분은 눈으로 따라갈 수 없는 속도였다.

“큭!”

글렌이 얼굴 바로 옆을 스쳐지나가는 검을 고개를 비틀어 흘려보냈다. 그러자 검이 곧장 방향을 틀어 목을 노리고 날아온다.

탓!

거리를 벌려 공격을 피한 글렌이 입을 열었다.

“……이 토너먼트가 친선전이라는 걸 잊은 건가?”

“결투 중 발생하는 부상에 대해서는 책임을 물을 수 없지요.”

그리 말하는 목소리는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불행하게도 부상이 너무 심해서 목숨을 잃는 사례도 존재하고요.”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군. 공작은 알고 있나?”

“모르십니다. 하지만 저를 내치실 것 같진 않군요. 당신이 이곳에서 죽고 나면 북부와 전쟁을 벌여야 될 테니.”

말을 끝마치자마자 다시 검격이 글렌을 향해 뻗쳐 온다. 시커먼 오러가 마치 파도처럼 넘실댔다.

글렌은 힘 대결을 하는 대신 몸을 옆으로 돌려 빠져나갔다. 그러자 파도처럼 넘실대던 오러가 땅 위로 처박힌다.

화약이 폭발하는 듯한 굉음이 울렸다. 아니, 실제로도 땅이 터져 나간 듯 커다란 구멍이 생겼으니 과장은 아니리라.

글렌은 일순간 균형을 잃은 지호를 향해 검을 내질렀다. 하지만 검이 허공을 갈랐을 때 이지호는 간신히 몇 걸음 뒤로 물러난 상태였다.

“하아…….”

그가 거칠어진 숨결을 고르려 하는 순간, 글렌이 연속적으로 공격을 다했다.

챙! 카가각!

검과 검이 빠르게 맞부딪쳤다. 허공에 오러의 잔상이 신기루처럼 남아 있다.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낀 이지호가 오러를 쥐어짜내다시피 검에 밀어 넣었다. 안개처럼 일렁이는 기운을 두른 검이 커다란 소리를 내며 격돌한다.

콰아앙!

굉음과 함께 흙먼지가 일었다. 시야가 흐려질 만큼 많은 양이었다. 관객들이 당황해하며 웅성거린다.

“뭐, 뭐야? 어떻게 된 거지?”

“경기장이 안 보여.”

잠시 후, 흙먼지가 걷히고 시야에 들어온 것은 상대의 목에 검을 들이대고 있는 글렌의 모습이었다.

챙그랑!

“그만!”

바닥에 검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국왕이 커다랗게 소리쳤다. 장내의 움직임이 모두 우뚝 멎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국왕이 결투를 중재했다.

“두 사람 모두 그만하게, 더 이상 결투를 이어 나가다간 어느 한쪽이 심한 부상을 입을까 걱정되는군.”

“폐하, 저도 가급적이면 그러고 싶습니다만…….”

글렌은 이지호를 힐끔 쳐다보곤 말을 이었다.

“아시다시피 결투는 한쪽이 패배를 인정할 때까지 이어나가는 것이 원칙이라.”

“…….”

사람들의 시선이 바닥에 널브러진 검으로 향했다.

결투 중에 검을 놓쳤다는 건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지호가 무덤덤하게 패배를 인정했다.

“……졌습니다.”

토너먼트의 우승자가 뒤집히는 순간이었다.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객석에서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아아!”

짝짝짝짝짝!

요란한 박수 소리를 들으니 그제야 끝났다는 것이 실감이 난다. 글렌은 짧은 한숨과 함께 투구를 벗었다.

저 건방진 놈을 흠씬 두들겨 패 주고 싶은 마음과는 별개로, 보는 눈이 많으니 일단 기사로서의 예의는 지켜야 한다.

그가 먼저 손을 내밀자, 이지호가 악수에 응한다. 두 사람이 정중하게 결투를 끝내는 모습을 보이니 객석에서 들리는 함성이 더더욱 커졌다.

짧은 악수를 끝낸 그가 곧장 객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디아의 모습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상석으로 시선을 옮겼을 때, 글렌은 단번에 그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안도한 듯 웃고 있지만 여전히 창백한 기색이 가시지 않은 나디아의 얼굴을.

비로소 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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