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9화 (79/142)

제79화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대신 나갔을 것을.’

파비안의 실력으로는 우승을 노리긴 힘들 테니 말이다.

뒤늦게 후회되었지만 이미 떠나간 배였다. 하는 수 없이 다음 기회를 노릴 수밖에.

“후작님, 이제 파비안의 차례입니다.”

“드디어.”

때마침 경기장 안으로 친숙한 얼굴이 들어왔기에 두 사람의 대화는 자연스레 중단되었다. 긴장된 기색이 맴돌기 시작한다.

“윈터펠 후작가의 가신, 레사드 녹스 준남작의 아들, 파비안 녹스 경!”

이름이 호명됨과 동시에 투구 덮개를 내렸기에 나디아는 더 이상 제 호위 기사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기사들 간의 결투에 흥미가 없는 그녀였지만 이번 경기만큼은 집중해서 지켜봐야 했다. 다칠까 봐 걱정이 되었던 탓이다.

하지만 그녀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파비안은 단 10합 만에 승리를 거두었다.

“저 녀석 제법인데?”

“그러게 말입니다. 저렇게 날아다닐 줄은 몰랐는데.”

“결승까지 갈 수 있지 않을까?”

“대진운이 따른다면 우승까지 노려보는 것도…….”

“에이, 그건 너무 나갔다.”

“만약에, 만약에 파비안이 우승한다면…… 황금 장미는 누구의 것이 될까요?”

누군가 당연한 것을 왜 물어보냐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히 마님의 것이겠지. 당연한 걸 왜 물어? 저 녀석 애인도 약혼녀도 없잖아.”

“짝사랑하는 여자는 있을 수도 있죠.”

“그런 거 없어. 확실해.”

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들 중 진지하게 우승을 기대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지루한 와중에 수다거리가 생겨서 기쁠 뿐.

다들 신이 나서 파비안의 결승까지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점쳐 보고 있을 때였다.

대진표를 들여다보고 있던 기사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어, 우승은 좀 힘들겠는데요?”

“왜?”

“여기 대진표 좀 보십시오. 이 대진표대로라면 다음 경기에서…… 이지호 경을 만나게 됩니다.”

“…….”

“아마 발라지트 가문을 대표해서 나왔겠지요.”

가신들 사이에서 잠시 침묵이 흐른다. 그들 중 대다수는 글렌과 함께 칼라아이 원정에 참전했던 이들이었다.

그 말인즉, 두 눈으로 직접 그의 실력을 목도했다는 뜻이다.

짧은 침묵을 깨고 누군가 입을 열었다.

“왜 나왔대? 이런 경기에 나올 위치가 아니신데.”

“글쎄다.”

그건 나디아 역시 의아한 점이었다.

‘이지호가 토너먼트에 나왔던 적이 있었나?’

지난 생으로 따지자면, 이맘때의 토너먼트는 약혼 이후에 열린 경기였다.

만일 과거에도 그가 이 시합에 나섰다면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어쩌면 나와 약혼을 못 한 게 나비 효과가 되어 경기에 나오게 된 걸지도 모르지.’

어떤 이유이건 그녀가 신경 쓸 바가 아니긴 했다. 어쩌면 제 이력에 토너먼트 우승 한 줄을 덧붙이고 싶었을지도 모르지.

그러는 와중에도 토너먼트는 계속 진행되었고, 어느새 파비안의 다음 경기가 시작될 차례였다.

결과는 예상했던 대로였다.

갑옷을 벗고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그가 머쓱한 얼굴로 뒷목을 만지며 말했다.

“영주님, 저 왔어요.”

“다친 곳은?”

“타박상이 좀 있긴 한데 금방 나을 거 같습니다. 그리고…… 빨리 탈락해서 죄송합니다.”

“아니, 수고했다. 어차피 그리 중요한 행사도 아니니 마음 쓸 것 없어.”

정말 우승을 노렸다면 다른 기사를 내보냈을 것이다.

나디아가 그에게 음료를 내밀며 말했다.

“이제 편하게 남은 경기나 관람해요.”

“감사합니다, 마님.”

토너먼트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정오가 지나자 왕실의 하인들이 객석에 음식을 가져다주었다.

“글렌, 제가 비록 검술을 잘 모르지만 말이에요.”

“음?”

“그런 제 눈에도 오늘 토너먼트의 우승자가 보이는 것 같거든요.”

“누가 우승할 것 같나?”

“몹시 아니꼽지만 발라지트 공작가에서 무난하게 트로피를 가져가겠는걸요.”

눈이 달려 있는 이상 모를 수가 없었다. 여태껏 이지호가 나온 경기들은 죄다 10합을 넘기지 못했으니 말이다.

방금도 또 한 번의 경기가 그의 승리로 끝났다. 빠른 승리가 반복되다 보니 관중들도 더 이상 놀라지 않을 정도였다.

“이제 결승만 남았군.”

“그래도 저 사람 덕분에 경기 시간이 줄어든 건 좋네요.”

슬슬 집으로 돌아가서 쉬고 싶던 차였다. 계속 앉아 있다 보니 허리가 뻐근해지기 시작한다.

결승전 역시 이지호의 승리로 싱겁게 끝나 버리자, 이제 남은 절차라곤 우승자가 자신의 레이디에게 황금 장미를 전달하는 것뿐이었다.

다시 말해 하이라이트만 남았다고 할 수 있겠다.

누가 올해 황금 장미의 주인이 될 것인가?

‘뻔하지, 뭐. 카레인한테 주겠지.’

나디아가 심드렁하게 생각했다.

발라지트 공작의 수하인 그가 달리 누구에게 황금 장미를 바친단 말인가?

나이 어린 귀족 영애들이 카레인을 부러운 눈빛으로 힐끔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자신을 부러워하는 분위기에 카레인이 의기양양해진 것이 멀리서도 느껴질 정도였다.

이지호가 왕족들이 모여 있는 상석으로 올라가자, 사람들이 목소리를 낮춘 채 속삭였다.

“올해 토너먼트는 재미가 없네요. 너무 시시하게 끝났어요.”

“그래도 그 유명한 드래곤 슬레이어의 실력을 두 눈으로 볼 수 있었잖습니까?”

“소문보다 대단하던걸요. 발라지트 공작님께서 괜히 출신 모를 이방인에게 후원을 자처한 것이 아니더군요.”

“제 말이요.”

출신 모를 이방인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분위기가 절반, 그의 실력만큼은 존중하는 분위기가 절반이었다.

하지만 어수선했던 것도 잠시, 국왕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귀족들은 다 함께 입을 다물었다. 곧이어 국왕의 목소리가 울린다.

“우승을 축하하네. 과연 듣던 대로 훌륭한 실력이군.”

“감사합니다, 폐하.”

“그러고 보니 경은 미혼이었지? 내 기억이 맞다면 아직 약혼녀도 없을 테고. 황금 장미를 바칠 레이디는 마음속에 정해 두었나?”

카레인의 이름이 나오겠지.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모두의 예상을 깨는 것이었다. 일단 그것은 사람의 이름이 아니었다.

“폐하, 외람되지만 한 가지 요청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응?”

무슨 요청? 이런 얘기는 공작에게서 들은 적 없는데?

왕이 발라지트 공작을 향해 시선을 돌린다. 하지만 의아한 얼굴인 건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이 일은 이지호의 독단인 모양이었다.

어쨌든 좋은 날이고, 오늘의 우승자이니 들어주지 못할 것도 없으리라. 국왕이 너그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 말해 보라.”

“황공합니다. 황금 장미를 받기 전에, 이 자리에서 겨뤄 보고 싶은 상대가 있습니다.”

“……뭐?”

“그자와의 결투를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하, 하지만…….”

국왕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퍼져 나갔다. 기껏 우승자가 되어 놓고선 또 결투를 하겠다고?

당황해하는 것은 국왕 한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당연히 제 이름이 불릴 거라고 생각했던 카레인은 물론, 다른 귀족들까지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결투를 한 번 더 하게 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 같습니다.”

“왜요? 아니, 그 전에 대체 누구와요?”

“오늘 토너먼트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이겠죠. 어디 보자, 이지호 경과 검을 겨뤄 볼 만한 실력자가…….”

“허, 설마.”

순간적으로 모두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이가 있었다. 은근한 시선이 한 곳으로 모여든다.

그들의 추측에 쐐기를 박듯, 이지호가 국왕에게 깊게 읍하며 말했다.

“윈터펠 후작님의 명성은 오래전부터 들어왔습니다. 또한 작년의 원정에서 그분의 실력을 직접 목도하고 한 번쯤 겨뤄 보고 싶다는 욕심을 키워 왔지요. 폐하, 부디 청컨대 결투를 허락해 주십시오.”

“……!”

조금도 예상치 못했던 사태에 윈터펠가 일행 사이에서 작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글렌의 미간에도 미미하게 주름이 잡힌다.

국왕이 말했다.

“이보게, 지호 경. 마음은 알겠지만 이건 너무 갑작스러운…….”

“물론 윈터펠 후작님께서 원치 않으신다면 저도 더 이상 청하진 않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시선은 글렌에게 고정된 채였다.

“허…… 그, 그렇다면 일단 당사자의 의견을 들어 봐야……. 윈터펠 후작, 어떻게 생각하오?”

“…….”

갑작스레 지목받은 글렌이 차분히 주변을 살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돌발적인 행동이었지만 장내의 분위기는 그에게 부정적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긍정적이라고 봐야 할 정도였다.

가뜩이나 지루했던 행사에 볼거리가 하나 더 생긴 것이다. 게다가 기사에게 호승심이 높다는 건 명성에 득이 되었으면 되었지, 결코 흠이 아니었다.

라이벌로 여겨지던 또래의 기사에게 결투를 청하는 건 참으로 기사답지 않은가?

사실 글렌 역시 결투 신청을 흔쾌히 받아 주었으면 받아 줬지, 거절하는 편은 아니었다.

나디아가 식은땀을 흘리며 생각했다.

‘보아하니 이 결투에 부정적인 건 나뿐인 것 같은데…….’

부상자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이리 무모한지. 그녀가 글렌의 옷깃을 살짝 잡아당기며 작게 속삭였다.

“글렌, 당신은 아무런 준비도 없이 온 거잖아요. 그런데 갑자기 결투라니, 불리할 거예요. 그냥 거절해요.”

“아니, 거절하면 내가 겁을 먹고 피했다는 소문만 퍼지겠지.”

원치 않는다면 더 이상 청하진 않겠다, 라는 말의 의미는 사실상 도발에 가까웠다.

글렌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곡선을 그렸다. 걸어오는 싸움을 피하는 취미는 없다.

“요청을 받아들이겠습니다, 폐하.”

“오오!”

글렌이 흔쾌히 받아들이자 국왕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걸린다.

아무리 눈치가 없는 그라도 여기서 거절당한다면 무르익었던 분위기가 식으리라는 것쯤은 예상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럼 시일은 언제가 좋겠는가?”

이지호가 대답했다.

“제가 멋대로 청을 드린 것이니 시일은 후작님께서 정하는 것이 맞겠지요.”

“그러는 게 좋겠지. 어떻게 생각하나, 후작?”

“저는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다만…….”

글렌이 말을 이었다.

“몇 차례 연달아 경기를 치러 지쳤을 테니 그 점을 고려하여 하루 뒤가 어떻겠습니까?”

언뜻 들으면 배려해 주는 말 같지만, 실상은 져 놓고 컨디션을 탓할 생각일랑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속뜻을 알아들은 이지호가 빙긋 웃으며 대답한다.

“지금 당장이라도 상관없습니다.”

“그거 반가운 소리군.”

두 사람 모두 웃는 얼굴이었지만 눈빛만큼은 만년설처럼 차갑기 그지없었다. 지척에 있는 나디아에게 한기가 전해질 정도였다.

남편과 전 약혼자를 번갈아 바라보는 그녀의 입이 살짝 벌어진다.

‘갑자기 결투라고?’

이게…… 왜 이렇게 흘러가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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