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8화
“제가 도착했다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심부름 나갔던 하인이 알려 줬지. 윈터펠 가의 인장이 있는 마차가 길을 지나가는 걸 봤다고. 마침 시간이 나 너를 보러 온 거란다.”
에이든이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지난번 약혼식 때는 참석도 못 했잖아. 그나저나 너는 내가 반갑지 않은 모양이구나.”
“그럴 리가요. 갑자기 찾아오셔서 조금 놀랐을 뿐이에요.”
그때, 글렌이 팔을 살짝 건드리는 감각이 느껴졌다.
힐끔 시선을 돌리니 그가 눈빛으로 저 자의 신분을 알려 달라고 말하고 있었다.
“아! 죄송해요. 소개가 늦었네요. 글렌, 이쪽은 제 사촌인 에이든 에른스트예요. 오라버니, 이미 아시겠지만 제 남편인 글렌이랍니다.”
비로소 낯선 손님의 정체를 깨달은 그가 ‘아’ 하고 작게 소리를 냈다.
‘어쩐지 공작을 많이 닮았다 했더니.’
삼촌과 조카의 외모가 빼닮은 일은 흔했지만, 친딸인 나디아보다 더 혈육처럼 보이는 건 신기하긴 했다.
글렌이 오른손을 내밀며 인사했다.
“내 아내와 친한 사이였던 모양이야. 도착했다는 말을 듣자마자 찾아온 걸 보면.”
“제가 외동인 터라 어렸을 때부터 사촌 누이들과 가까이 지냈습니다. 이렇게 후작님을 뵙게 되어 기쁘군요.”
“나야말로.”
두 사람이 가볍게 악수를 주고받는다.
에이든이 다시 입을 열어 말했다.
“참, 이걸 받아 주시지요.”
“이건…….”
“토너먼트 초대장입니다. 참관객으로서의 초대장이지요. 미리 도착했어야 했는데 누락된 모양입니다. 사촌 누이의 얼굴도 볼 겸, 제가 대신 전달해 드립니다.”
“……토너먼트?”
그에 대답한 것은 나디아였다.
“탄신연 전후에 열리는 행사예요. 후작님은 작위 승계 후에 탄신연 참석이 처음이시니 낯설 수도 있겠네요. 탄신연에 참석하는 각 가문에서 한 명이 대표로 나와 경기를 치른답니다.”
“사흘 뒤에 열리는 경기의 초대장을 지금 주는 건가?”
“이건 참관객으로서의 초대장이고요. 참가를 묻는 초대장이라면 윈터펠에도 두 달 전쯤에 왔는데…… 기억나지 않으세요?”
듣고 보니 그런 행사가 열린다는 말을 들은 것 같기도 했다. 후작가의 가주가 직접 참여할 만한 일은 아니라서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만 말이다.
대화에 끼어든 사촌누이를 향해, 에이든이 웃으며 물었다.
“참, 나디아. 공작님을 뵈러 올 거지?”
“수도에 온 김에 그래야겠지요.”
별로 내키지는 않지만 말이다.
“조만간 다 함께 모여서 식사라도 하는 게 좋겠다. 카레인도 너를 많이 보고 싶어 할 거야. 아 참, 후작님도 식사 한번 같이 하시지요.”
“……내가?”
발라지트 공작과 하하호호 식사를 하라고?
반사적으로 인상을 구길 뻔했지만 글렌은 그것이 의례적인 인사말이라는 것을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좋다. 대신 여독을 푸는 것이 먼저이니 근래에는 조금 힘들겠군.”
“흔쾌히 허락해 주실 줄 알았습니다. 언젠가 다시 뵙지요.”
정말 빈말이었는지 에이든은 일정을 조율해 보자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나디아를 가볍게 포옹하며 인사했다.
“조만간 또 보자, 나디아.”
“기다리고 있을게요.”
용건을 끝마친 에이든은 시종의 배웅과 함께 곧장 자리를 떴다.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글렌이 물었다.
“친한 사이였나?”
“글쎄요. 딱히 친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나쁜 사이는 아니었어요. 그냥 서로 무관심한 사이였죠.”
아들이 없었던 아버지는 오래전부터 에이든에게 후계자 교육을 시켰는데, 그렇게 바쁜 사람이 사촌 여동생에게 관심을 기울일 리가 없었다.
나디아는 제 후계 구도에 조금도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서녀였으니 말이다.
카레인처럼 그녀를 못살게 굴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특별히 챙겨 준 것도 아니었다.
당연히 나디아 역시 그에게 혈육의 정 같은 건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녀가 에이든을 살려야 하는 이유는 특별히 그에게 호감이 있어서가 아니다.
‘이지호를 방해하기 위해서지.’
죽기 전 아버지와 이지호 사이에 오간 거래의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대체 무슨 이유로 그가 자신을 배신한 건지, 대강 짐작은 간다.
그리고 아버지가 다른 명문가의 귀족 영식이 아닌, 이방인 기사를 택해야 했던 이유…….
그에 관해서도 대강 짐작이 갔다. 다만 전생에선 그녀와 무관한 일이라 생각해 관심 두지 않았을 뿐.
중요한 건 악마 전쟁 중에 전사할 예정인 에이든의 목숨을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오래도록 살아남아서 이지호를 견제하는 역할을 해 줘야 한다.
‘뭐…… 당장 해결해야 하는 일은 아니니 조급하게 생각할 건 없지만.’
악마 전쟁까지는 시일이 남아 있었다. 마냥 마음 놓고 있을 일은 아니지만 당장 해결해야 할 사안 또한 아니었다.
지금 중요한 건 수도에 방문한 김에 해치워야 할 일은 모두 해결하는 것이다.
그녀는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일단…… 오늘은 푹 쉬는 걸로 해요. 내일, 늦어도 모레쯤이면 매우 바빠질 테니까.”
“그러지. 이제 들어가겠나?”
“네, 그래요. 슬슬 배도 고프네요.”
글렌이 에스코트하듯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었기에 나디아 역시 반사적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
이윽고 손을 잡은 두 사람이 함께 실내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넝쿨로 뒤덮인 담장 너머로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 * *
에이든이 전해 준 초대장에 응할 것인가, 혹은 자택에서 쉬며 여독을 풀 것인가?
“글렌, 어떻게 할래요? 반드시 참석할 필요는 없어요.”
“우리 가문 기사들 중에서 경기에 나가는 이가 있나?”
그에 대답한 것은 나디아가 아닌 다른 이였다.
“아, 저요. 제가 나가기로 했습니다.”
바로 기사단 막내 파비안이었다.
파비안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글렌이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안 갈 수가 없겠군.”
경기에 나가는 가신이 있는데도 가주가 참관하지 않는다니. 그랬다간 파비안의 체면이 심하게 깎일 것이다.
그리하여 글렌은 경기에 참관하겠다는 답신을 써서 보내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 어느덧 경기 당일.
후작가 일행은 토너먼트를 구경하기 위해 콜로세움에 당도했다. 어마어마하게 큰 건축물의 규모에 몇몇 가신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거의 성채만 하네요.”
“토너먼트라고 해 봤자 1년에 한두 번 열릴 텐데, 그동안 이런 큰 건물을 어디에 쓴답니까?”
그에 대답한 것은 나디아였다.
“검투사들의 경기가 열릴 때 사용하지. 수도는 검투장 문화가 발달해 있거든. 하루라도 쉬는 날이 없을 정도로 북적이는걸.”
“아하…… 검투사들이.”
그때 글렌이 입을 열었다.
“자주 와 본 것 같군.”
“자주…… 는 아니고요, 아버지를 따라서 종종 오곤 했죠. 자의는 아니었지만요. 피 튀기는 모습을 굳이 돈 쓰면서까지 보고 싶지는 않은지라.”
본래라면 참관객석은 발 디딜 틈도 없이 가득 차 있었겠지만, 오늘 경기는 기사들 간의 결투이므로 관객의 입장이 엄격히 제한되어 있었다.
귀족이거나, 혹은 귀족에 준하는 명예와 부를 가진 자, 그리고 그들이 부리는 사용인.
그렇다고 큰 공간이 무색해질 만큼 텅텅 빈 것은 아니었다. 왕의 탄신연 때문에 전국 각지에서 귀족들이 올라온 덕분이다.
개중에서도 일반 좌석과 분리된 상석이 존재했는데, 바로 왕족과 대영주들이 자리하는 곳이었다.
당연하게도 나디아와 글렌 역시 상석으로 안내받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들 아는 얼굴이다.
그러니까, 보기 싫은 사람들까지 참석해 있었다는 소리였다. 이래서 오기 싫었는데.
“나디아, 드디어 보는구나.”
“아버지.”
누가 좌석 배치를 했는지는 몰라도 발라지트 가문과는 꽤 가까운 거리였다.
나디아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역시 오셨군요. 이런 경기를 좋아하시니까요.”
“우리 가문에서도 경기에 나서는 이가 있으니 말이다. 오지 않을 수가 없었지.”
“그래요? 어느 분이신가요?”
“그건 보면 알 게다.”
사실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다.
두 사람은 다른 이들의 인사를 하나하나 받아준 후, 제자리로 돌아갔다.
경기 시간이 임박하자 국왕을 비롯한 왕족들까지 당도한다. 국왕 부부, 공주 한 명, 그리고 왕자 두 명.
저 중 한 명, 아니, 두 명에게는 용건이 있지만…….
‘벌써 접근하는 건 조금 성급하지.’
조급하게 생각했다간 될 일도 안 되는 법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왕족에 대한 예우를 표한 그녀는, 곧장 다시 경기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첫 번째 경기가 시작해 있었다. 양측 모두 처음 이름을 들어보는 기사였다.
글렌이 딴청부리는 그녀에게 속삭였다.
“지루한 표정이군.”
“실제로 지루하니까요. 말했잖아요. 피 튀기는 모습을 굳이 구경하는 취미는 없다고. 저 말고 다른 귀부인들도 마찬가지일걸요.”
“하지만 이런 건 흥미롭지 않나? 오늘 우승자가 누구에게 황금 장미를 바칠 것인가, 하는 문제 말이야.”
“아,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던 것이 떠올랐지만 흥미가 생기지 않는 것은 여전했다. 여태껏 토너먼트의 황금 장미는 자신과 거리가 먼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우승한 기사는 자신의 레이디에게 황금 장미를 바칠 권리가 주어지는데, 보통 제 아내나 약혼녀에게 그것을 바치곤 했다.
미혼이라면 제가 모시는 주군의 부인이나 딸, 혹은 그 자리에서 가장 신분 높은 여인에게 바치는 것이 관례였다.
다시 말해 누가 우승하건 황금 장미가 나디아의 손에 들어올 가능성은 한없이 희박하다는 뜻이었다.
발라지트 가문의 기사가 우승한다 해도 황금 장미는 카레인의 것이 될 테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카레인은 실제로 황금 장미를 받은 적이 있었지.’
아마 열일곱 살 때였던가?
부럽다는 감정이 안 들었다면 거짓말이리라.
황금 장미 그 자체보다는 그 애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누리는 대우나 관심 같은 것들이 부러웠다.
적녀는 적녀, 서녀는 서녀.
자기 것이 될 수 없는 것을 탐내서는 안 된다고 진작 체념했지만, 그럼에도 때때로 부러운 감정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올해 황금 장미의 주인은 누가 될지 궁금하네요.”
“받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나?”
“황금 장미라 해 봤자 가격으로 치면 얼마 안 하잖아요. 딱히 관심 없어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순간적으로 눈가에 씁쓸한 기색이 스쳐 지나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녀가 느끼는 감정의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었으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관심 없다는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