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6화 (76/142)

제76화

글렌이 반사적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 방 안에 남아 있는 사용인이 있는지 확인해 보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방 안엔 저 요망한 짐승과 자신 외의 인물은 보이지 않았다.

파르르 떨리는 시선이 다시 소파로 향했다.

“방금…… 말을…….”

“흥! 사람 말도 못하는 용이 어딨어?”

유창한 왕국어가 줄줄 쏟아진다. 심지어 발음도 억양도 모두 완벽했다.

아니, 말할 수 있었어?

여태껏 마물이라 육감이 발달한 줄 알았는데, 정말로 사람의 언어를 이해하고 있었던 거라니.

경악한 글렌을 향해 용이 코웃음 치며 말했다.

“내 나이가 네놈 나이보다 훨씬 많다, 이것아.”

그러더니 작은 날개로 파닥파닥 날아올라 창밖으로 가 버린다.

“…….”

덩그러니 홀로 남은 그는 멍하게 열린 창문을 바라보기만 해야 했다.

잠시 후, 황당함이 가시자 미처 떠올리지 못했던 분노가 스멀스멀 새어 나온다.

“하…… 하하…….”

그러니까, 뻔히 말을 할 줄 알면서도 말 못하는 짐승인 척하며 나디아의 관심을 독차지한 것 아닌가?

용이 떠난 자리를 응시하는 그의 시선에 노기가 더해졌다. 아무래도 저 녀석과 친해질 날은 매우 요원한 듯하다.

* * *

시간이 흘러 수도로 떠나는 날이 다가왔다.

왕에게 바칠 선물을 채운 마차가 한 대.

수도에서 사용할 물품을 채운 마차가 두 대.

그리고…… 정체불명의 상자로 채운 마차가 한 대.

나디아의 눈에는 저 나무 상자들이 마차 금덩이처럼 보였다. 흐뭇한 마음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절로 입가에 걸린다.

“준비 다 됐다. 이만 가지.”

“아, 네.”

글렌의 말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린 그녀가 말 위로 올라탔다.

고개를 돌리니 영주 부부 일행을 배웅하기 위해 한 무리의 사람들이 늘어선 광경이 보인다.

개중에서 가장 앞에 나와 있는 것은 선대 후작인 아이작이었다.

지팡이를 짚고 서 있긴 하지만 예전에 비해 한결 혈색이 도는 얼굴이다.

글렌이 말했다.

“아버지가 계셔서 다행입니다. 영지를 떠나는 게 그리 걱정되지 않으니 말입니다.”

“내가 잘 지키고 있을 테니 걱정 말고 다녀오너라.”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그때, 선후작의 어깨 위로 동글동글한 얼굴이 고개를 내밀었다.

“키잇!”

커다랗고 투명한 황금빛 눈동자가 올망하게 나디아를 바라보고 있다. 지나가는 이의 발목을 붙잡아 세울 수 있을 만큼 애처로운 눈빛이었다.

아이작이 등 뒤에 매달린 새끼 용을 앞으로 고쳐 안으며 말했다.

“옳지. 마침 잘 왔다. 너도 인사하거라.”

“키르르…….”

“잘 다녀올게, 노아.”

“킹…….”

시무룩한 얼굴로 꼬리를 휘휘 내젖는 모습이 나름대로 깜찍하다고 해 줄 만했다.

저 녀석이 유창하게 사람 말을 하는 모습을 목격하지만 않았더라면 글렌 역시 그렇게 생각했으리라.

글렌의 눈이 서서히 가늘어지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나디아는 시무룩한 용을 쓰다듬어 주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야영하고 싶지 않다면 빨리 출발하는 게 좋을걸. 해 지기 전에 도시에 도착해서 푹신한 침대에서 잠들 수 있어.”

출발을 재촉하는 목소리에 그녀는 아쉬워하며 손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그럼 바로 출발할까요? 야영은 솔직히 자신이 없네요.”

“그러지. 아버지,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무사히 다녀와라.”

이윽고 글렌이 출발 신호를 내리자마자 선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도로 향하는 행렬이 성 바깥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 * *

이동을 시작한 첫날, 수도로 향하는 행렬은 예정대로 인근 영지의 영주관에 도착하게 되었다.

오늘 하루 그들이 신세를 지게 될 장소였다.

“어서 오십시오, 윈터펠 후작님. 그리고 윈터펠 후작 부인.”

미리 연락을 받고 기다리고 있던 늙은 영주가 이웃 후작 부부를 환영해 주었다.

글렌이 말 위에서 내리며 말했다.

“늦은 시간에 도착해서 미안하군.”

“아닙니다. 편히 쉬다 가십시오.”

“하룻밤만 실례하겠네.”

자그마한 영지의 영주 부부는 후작가 일행을 대접하는 데에 정성을 아끼지 않았다.

따뜻한 식사를 대접받은 일행은 모두 만족하며 잠자리를 찾아 흩어졌다.

일반 병사들과 사용인들은 임시 천막으로, 나머지 사람들은 영주관의 손님방으로 안내되었는데, 당연하게도 나디아는 안락한 손님방으로 안내받은 이들 중 하나였다.

그녀가 저를 안내한 하녀들에게 말했다.

“잠들기 전에 우선 씻고 싶은데.”

“그러잖아도 목욕물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목욕 시중을 들어도 될까요?”

“아니, 혼자 씻겠어.”

처음 보는 하녀들 앞에서 옷을 벗기는 왠지 민망한 탓이었다.

하녀들을 물린 나디아가 흙먼지를 씻어 내고 방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눈썰미가 좋은 그녀는 나갈 때와 비교해 침실의 모습이 조금 달라져 있다는 걸 눈치챘다.

방 안을 환히 밝혀두었던 방금 전과는 달리, 침대 주변의 촛불 두어 개를 제외하곤 모두 불이 꺼져 있었던 것이다.

‘일부러 불을 꺼 준 건가?’

제 손으로 일일이 촛불을 끄려면 번거로울 테니 배려해 준 모양이다.

나디아는 그렇게 납득하곤 침대로 걸어갔다.

한눈에 보기에도 커다란 크기의 침대는 불투명한 휘장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녀의 손이 단숨에 휘장을 젖힌다.

“어……?”

“응?”

이 침실 안에 저 말고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걸 깨달은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침대에 누운 채, 잠에 빠져들기 일보 직전인 듯한 글렌과 눈이 딱 마주친 것이다.

나디아는 물론, 반쯤 잠에 빠져들었던 글렌의 입에서까지 의아한 탄성이 흘러나온다.

멍하게 눈만 깜박이며 서로를 쳐다보길 잠시, 먼저 정신을 차린 나디아가 입을 열었다.

“다, 당신이 왜 여기 있어요?”

“그야 안내받은 침실이 이곳이니까…… 그대야말로 왜 여기 있지?”

“저도 마찬가지예요. 이곳의 하녀들이 이 방에서 묵으면 된다고 해서…….”

“…….”

“…….”

두 사람 사이에 미묘한 침묵이 내려앉는다.

사실 어쩌다 이런 사고가 생긴 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숨겨진 속사정이야 어찌 됐건, 남들이 보기에 두 사람은 결혼한 지 1년이 다 된 부부인 것이다.

어느 문화권에 가건 결혼한 남녀가 같은 침실을 쓰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 말인즉, 이건 저쪽의 실수라기보다는 이쪽의 실수라고 해야 옳았다.

당연하게 각방을 쓴 지 오래된 탓에 남들 눈에 어떻게 비칠지 간과한 탓이다.

나디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 어떡하죠?”

“어떡하긴. 방을 하나 더 비워 달라고 해야지.”

“……이 야밤에 이제 와서 방을 하나 더 내놓으라는 게 가능할까요?”

“…….”

본래 손님방은 자주 사용하는 장소가 아니다.

평소 쓰지 않던 방을 사용하려면 청소도 해야 하고, 이불도 내와야 하며, 하여간 이것저것 문제가 많아진다.

이 밤중에 새로운 침실을 하나 더 준비해 달라는 건, 공짜로 남의 집에 묵는 처지에 아무래도 좀…….

“조금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지. 사례를 충분히 해 주면 될 거다.”

“아뇨. 예의 문제를 떠나서 더 중요한 문제가 따로 있어요.”

“그게 뭐지?”

제가 생각지도 못한 문제점이 더 있단 말인가? 글렌의 얼굴에 놀라움이 퍼졌다.

하긴, 그녀는 언제나 자신이 미처 떠올리지 못한 부분을 짚어내는 재주가 있었으니 말이다. 나디아의 입가를 바라보는 그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저 많이 피곤해요.”

“…….”

“새 침실을 준비하려면 이것저것 준비하는 시간이 걸릴 거잖아요. 그럼 수면 시간이 줄게 된다고요! 당장 내일 아침부터 출발해야 하잖아요. 오늘 밤에 제대로 못 자면 내일은 두 배로 피곤할걸요.”

“그럼 그대는 여기서 자. 내가 나가지.”

“후작님을 쫓아내고 제가 편안하게 잘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침대도 넓은데, 그냥 오늘 하루만 같이 자요.”

“그…….”

“그리고 저희는 일단 명목상 부부잖아요. 같은 침실을 쓰는 걸 다른 사람들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걸요. 오히려 지금 후작님이 침실을 뛰쳐나가서 굳이 저와 다른 방을 쓰겠다고 하시면 더 뒷말이 돌겠지요.”

“…….”

맞는 말이었기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굳이 아내와 다른 방을 쓰겠다고 야밤에 소란을 피운다면 뒷말만 무성하게 돌게 되리라.

나디아가 주장하는 바도 이해되기는 한다. 이해되기는 하는데…….

‘무섭지도 않나?’

이 경우 다른 침실을 달라고 펄쩍 뛰어야 하는 건, 보편적인 인식으로 볼 때 그녀 쪽이 되어야 하지 않느냔 말이다.

혼란스러워하는 그에게 나디아가 한마디를 더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절대 후작님의 털끝 하나 안 건드릴 테니까요.”

“……뭐?”

“당신한테 첫눈에 반했다고 한 거, 거짓말이었다고 말했잖아요. 다 정리된 얘기 아니었어요? 왜 새삼 긴장하고 그래요?”

“…….”

글렌은 문득 울고 싶어졌다.

“……그런 말은 남자인 내 쪽에서 하는 게 일반적이지 않나?”

“하지만 후작님은 안 그러실 거잖아요.”

아니, 물론 그렇기는 한데. 허락 없이 손 댈 만큼 파렴치한은 아니긴 한데…….

그녀의 눈에는 자신이 정말 눈꼽만큼도 이성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인가?

서글퍼진 글렌은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 더 따져 봐야 마음 아픈 이야기만 들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 그럼 오늘 하루만 실례하지.”

“잘 자요, 글렌. 저 졸려서 먼저 잘게요.”

그녀는 그리 말하고는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확실히 침대가 넓기는 한지, 각자 끄트머리에 자리를 잡으니 팔을 뻗어도 닿지 않을 만큼 거리가 벌어진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