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5화
의심할 만도 한 것이, 멀리서 혼자 놀고 있다가도 글렌이 나디아를 데려가려는 것 같으면 순식간에 들러붙은 적이 벌써 수십 번이다.
그 딴에는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아직까지는 무릎 위에 올려 둘 만해요. 조금 더 크면 무리겠지만…… 아아, 내가 만져서 깼니? 다시 자도 돼.”
나디아가 그릉거리는 새끼 용의 날개 죽지를 쓰다듬으며 그리 말했다.
하루 종일 나디아의 몸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모습이 심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얄미운 몬스터를 바라보는 글렌의 시선에 자연히 힘이 들어갔다.
“키잇.”
“…….”
그 시선을 눈치챈 듯, 새끼 용이 그를 향해 얄미운 표정을 지어 보인다.
마치 내가 마음에 안 들면 뭐 어쩌겠냐고 말하는 듯.
글렌의 미간에 서서히 주름이 잡혔다.
하지만 이번에는 저 요망한 짐승 새끼도 어쩔 수는 없을 것이다. 제까짓 게 수도까지 쫓아올 수는 없을 테니까.
그가 의기양양하게 품속에서 편지 한 통을 꺼내 들었다.
“그건 뭐예요?”
“수도에서 온 편지.”
“아, 설마.”
“왕실에서 보낸 초대장이다. 왕의 탄신연이 열리니 반드시 참가해 달라는군.”
“반드시, 라고요…….”
바스락. 나디아가 편지 봉투 안에 든 초대장을 꺼내 읽었다. 글렌이 말했던 대로 정말 ‘반드시’라는 표현이 적혀 있다.
“웬일이래요? 왕실은 북부를 반기지 않을 텐데.”
“끝까지 읽어 봐라. 하고 싶은 말이 뒤에 나오더군.”
글렌의 말에 그녀의 시선이 다시 초대장으로 향했다.
예상 밖의 드래곤 레어 발견을 축하하는 내용이 이어진다. 무슨 소리를 하려고 그 일을 언급하나 했더니, 이어진 말은 생각보다 훨씬 기막혔다.
“레어의 주인은 레드 드래곤 발락티스로 추정된다. 발락티스는 150년 전, 왕실의 보물인 천사상을 강탈했다. 윈터펠이 왕실을 존중한다면 나라의 보물을 왕실에 반환하는 것이 옳다……?”
“확인해 보니 정말 천사상이 있더군. 커다란 블루 다이아몬드가 박힌 물건 말이야. 기억나나?”
“그러고 보니 창고에 그런 물건이 있었던 것 같긴 하네요.”
몇 달 전 웨인이 보물을 처분하러 수도에 들르긴 했지만 레어에 있던 모든 물건을 현금화한 것은 아니었다.
처분한 것보다 더 많은 보물이 남아 있었는데, 그 말을 듣고 보니 커다란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던 물건이 떠오른다.
“보통 물건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도둑맞은 왕실의 보물인 줄은 몰랐네요. 뭐…… 어쨌든 왕실의 것이 맞긴 하니까 돌려주는 게 좋겠지요.”
“내 생각도 그렇다. 굳이 트집 잡힐 일은 안 하는 게 좋겠지.”
“생일 선물을 바치는 형태로 돌려준다면 윈터펠의 충성심을 갸륵하게 여길 것이다…… 라고 하네요?”
그러니까 왕실이 졸라서 돌려받은 것이 아니라, 윈터펠이 알아서 갖다 바친 모양새가 되게 연출해 달라는 뜻이리라.
조금 빙 둘러서 표현하긴 했지만 핵심은 다르지 않았다.
글렌이 혀를 쯧 차며 대답했다.
“차라리 잘됐지. 천사상 외의 선물은 준비하지 않아도 될 테니까.”
“그래도 천사상 하나만 딱 가져다 바치는 건 좀 그렇고, 이것저것 챙겨서 구실만 맞추는 걸로 해요.”
훗날 일어날 내전을 위해서, 세간에 윈터펠 후작가가 왕실을 우습게 대했다는 인식이 퍼지는 건 조금 곤란하다.
“진귀한 물건 몇 개 더하는 정도로 마무리 지으면…… 어머, 왜 그러니?”
“키이잇.”
그때, 얌전히 안겨 있던 용이 앓는 소리를 내며 그녀의 품에 치대기 시작했다.
옷자락을 살살 긁으며 연신 낑낑거리는 게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모양새다.
“혹시 배가 고파? 식사한 지 얼마 안 됐는데…….”
“그건 아닐 거다.”
“그럼요?”
나디아는 저 짐승의 속내를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지만, 글렌의 눈에는 뻔히 보였다.
‘자기도 데려가라고 저러는 거지.’
눈치 빠른 금수 같으니라고. 절대 안 될 말이다.
“몬스터들은 사람보다 몇 배는 더 육감이 발달했지. 보호자와 떨어져야 하는 걸 직감적으로 깨달은 거다. 하지만 데려갈 수는 없어. 그대도 이미 알고 있겠지?”
찌릿. 그 순간 용의 날카로운 눈빛이 글렌을 향했지만 그는 깔끔하게 무시했다.
“역시 어쩔 수 없겠죠. 우리 눈에는 착한 아이지만 다른 귀족들은 위험하게 생각할 테니…….”
“키잉.”
“미안. 그래도 못 데려갈 것 같아. 혼자서도 잘 놀 수 있지? 집사에게 잘 챙겨 주라고 말해놓을게.”
나디아의 단호한 기색을 읽은 것인지, 노아가 슬픈 표정을 지으며 축 늘어졌다.
퍽 안타까운 모양새였지만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거다.
수도는 발라지트 공작의 손아귀 안에 있는 곳, 즉 적진이다. 괜히 책잡힐 만한 일은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옳았다.
글렌이 물었다.
“그나저나 몬스터 부산물을 특산품화한다는 계획은 여전히 유효한가?”
“당연하죠. 그리고 몬스터 부산물을 파는 게 아니라, 몬스터 부산물로 만든 약을 판매하는 거예요. 효과도 실험해 봤잖아요. 저 못 믿으세요?”
“그런 게 아니라…… 나는 좀 걱정스러워서 그런다.”
“뭐가요? 부작용?”
“아니. 알다시피 귀족 가문이 직접 상업에 손대는 경우가 일반적이지는 않지. 지난 번 가시덩굴 허브는 매우 특수한 경우였고. 가뜩이나 상인을 제 아래로 보는 기조가 있는데…….”
“그러니까 제가 수도에서 무시당할까 걱정된다고요?”
“그래. 특히나 수도, 그러니까 남부 귀족들은 북부인을 야만스럽다고 깔보는 경우가 왕왕 있지 않나? 그런 자들 사이에서 약을 판매하겠다고 하면…… 무슨 소리를 할지 벌써 상상이 된다만.”
그럴 듯한 대사 몇 개가 이미 글렌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북부인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린다더니, 윈터펠 가는 정말 가난한가 보군요?’
‘그러게 후작 부인께선 왜 그런 가난한 땅에 시집가셔선……. 그분도 예전에는 고상한 공작가의 금지옥엽이셨는데.’
‘저런, 안타까워라. 우리가 나서서 북부에 지원을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호호, 노블레스 오블리주란 그런 것이죠.’
……벌써부터 속이 뒤집히는 기분이었다.
그런 조롱이 저도 아니고 나디아를 향한다니, 열이 뻗친 나머지 선전포고를 해도 이상하지 않다.
“굳이 모욕을 감수하면서까지 자금을 확보해야 하는 이유가 있는지 궁금하군.”
“돈이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니까요.”
글렌이 이번 일에 떨떠름하게 반응하는 이유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녀 역시 오래 지나지 않아 일어날 미래를 몰랐다면 특산품을 만들겠다는 계획을 세우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막연히 언젠가 북부와 남부 간의 충돌이 있을 거라 예상하는 그와 달리, 나디아는 그 시일이 머지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걱정해 주신 건 고마워요. 하지만 저도 다 계획이 있으니 걱정하실 것 없답니다. 보시면 알 거예요.”
그리 말하며 빙긋 웃는 얼굴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계획 철회할 생각 없으니 설득할 생각 마세요.’
실행력 하나만은 최고인 여자이니 제가 말린다고 말려질 리가.
익히 예상했던 바지만 그렇다고 걱정되는 마음이 가시는 건 아니었다.
“만일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무리할 필요는 없어. 우리 가문 사람들 중 감히 그대를 탓할 이는 아무도 없을 거다.”
“걱정 마시라니까요. 제가 하겠다고 한 일들 중 실패한 것은 없었잖아요?”
“그거야 그렇긴 하지만…….”
말끝을 흐리긴 했지만 더 잔소리를 하지 못해 안달인 표정이다.
2절, 3절까지 이어지기 전에 그녀는 서둘러 자리를 떠나기로 했다.
“말 나온 김에 창고에 가서 물량 확인을 해야겠어요. 일단 저 먼저 가 볼게요.”
“잠…….”
뒤따라오겠다는 말이 나올세라 그녀는 서둘러 소파에서 일어났다. 무릎 위에 앉아 있던 노아는 당연히 떼어 두었다.
달칵, 쾅!
그녀가 신속하게 자리를 뜨자, 방 안에는 글렌과 새끼 용만이 남게 되었다
“키르르…….”
밑에서 시무룩한 울음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용이 그녀가 떠난 자리를 슬픈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소파 위로 꼬리와 날개가 추욱 늘어져 있다. 시무룩한 얼굴로 연신 그릉거리는 모습이 조금도 불쌍하지 않다면 거짓말이리라.
글렌이 힘없이 늘어진 해츨링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혀를 찼다.
‘좀 가엾긴 한데…….’
얄미운 행동 때문에 종종 까먹곤 하지만, 저놈은 태어난 지 1년도 안 된 새끼였다.
그러니 어미라고 여기는 존재와 떨어지는 게 불안할 법도 하다.
“쯧.”
지금껏 자신을 방해한 것도 엄마를 독차지하고 싶은 어린아이의 투정이라 생각하니 이해될 만도 했다.
멋도 모르는 새끼를 상대로 너무 날을 세운 건가?
그리 생각하니 여태껏 노아를 아니꼽게 생각했던 제 자신이 조금 부끄러워졌다.
‘그래, 어른이 아이를 상대로 진지하게 싸우는 것만큼 볼썽사나운 꼴도 없지.’
지성체이자 연장자인 자신이 먼저 손을 내밀어야지 뭐 어쩌겠는가?
그가 작게 한숨을 쉬며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다. 시무룩해 있는 와중에 쓰다듬어주며 위로를 해주면 저 녀석도…….
―탁!
축 늘어져 있던 꼬리가 신속하게 움직인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허?”
졸지에 얻어맞은 손등에서 화끈한 감각이 느껴진다. 절대 환각은 아니라는 증거였다.
그런데 황당한 일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어디에 손을 올려? 까불지 마, 인간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