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4화
옛 기억이 빠르게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과거에 주고받았던 대화 내용이 귓가에서 재생되었다.
“벌써 애칭을 부르기엔 그대와 내가 너무 덜 가까운 사이가 아닌가 싶은데.”
“하지만 저희는 곧 가족이…….”
“윈터펠 후작. 혹은 그냥 이름. 둘 중 하나를 사용해.”
“그럼 글렌이라고 부를게요.”
나디아와의 결혼이 결정되고, 약혼 축하 파티가 열렸을 때의 일이었다.
“…….”
생각해 보니 그런 말을 하긴 한 것 같다. 그것도 제 입으로.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는 글렌의 등허리에 식은땀에 조금씩 맺히기 시작했다.
할 말을 잃고 만 그에게 나디아가 천연덕스럽게 묻는다.
“왜요? 기억 안 나요?”
“…….”
너무 생생하게 기억나서 더 문제였다. 조금만 더 희미했다면 그런 말 하지 않았다고 우겨 보기라도 할 것을.
“정말 기억 안 나는 거예요? 당신이 언제 그런 말을 했느냐면, 예전에 수도에 있을 때의 일인데…….”
“그만! 그만……. 기억난다. 기억나.”
“전 또, 대답이 없으셔서 기억 못 하시는 줄 알았죠.”
“…….”
“아! 물론 옛날 일을 아직까지 마음에 담아 두고 있는 건 아니고요, 그때는 저도 다른 화제로 이야기를 돌리려고 일부러 애칭을 불렀을 거예요. 서운한 감정은 정말 없어요.”
“그…… 런가.”
“별로 친하지도 않은 남이 갑자기 애칭을 부르면 싫을 법도 하겠죠. 이해한답니다.”
“…….”
“어? 갑자기 왜 그래요?”
나디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가 상체를 살짝 휘청거리더니 의자 등받이에 손을 짚었던 것이다. 마치 갑작스레 현기증이라도 온 사람 같았다.
“몸이 안 좋아요?”
“……그대가 무사하다는 걸 확인하니 긴장이 풀린 모양이야. 해코지라도 당했을 줄 알고 깜짝 놀랐거든.”
“괜한 걱정을. 발톱 한 번 안 세우던걸요.”
나디아가 그리 말하며 안고 있던 해츨링을 들여올려 그에게 내밀었다.
“이거 봐요. 엄청 순하게 생겼잖아요. 혹시 이 애의 이름으로 그럴듯한 게 있을까요? 여럿이서 고민하면 더 좋은 이름이 나오지 않을까 해서요.”
“이름이라…….”
글렌이 코앞까지 들어 밀어진 해츨링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온 몸을 뒤덮은 까만 비늘. 투명한 황금색 눈동자. 긴 꼬리가 살랑거리고, 머리에는 작은 뿔 한 쌍이 돋아나 있다.
크기는 다 큰 고양이만 했는데, 그 탓에 멀리서 얼핏 본다면 검은 고양이로 착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피막 날개가 없었다면 말이지.’
등 뒤에 날린 한 쌍의 검은색 날개. 허공에 들어 붕 뜬 자세가 불편한지, 항의라도 하듯 세차게 파닥거리고 있다.
여하튼 자세히 보니 더욱 확실해졌다. 이건 드래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해츨링이다.
글렌이 아무렇게나 생각나는 이름을 말했다.
“드래고니아?”
“아니, 그렇게 성의 없는 이름 말고요! 좀 더 멋진 걸로요. 얘가 나중에 이 영지의 수호룡 같은 게 되어 줄 지 어떻게 알아요?”
“수호룡이 될지 재앙이 될지는 그때 가서야 알게 될 일이지. 드래곤이라고 해 봤자 덩치 큰 몬스터에 불과…… 크윽!”
콱!
그가 채 말을 끝맺지도 못하고 신음을 흘렸다. 해츨링이 자신을 가리키는 글렌의 손가락을 덥석 깨문 것이다.
“맙소사. 괜찮아요?”
“큿…… 상처가 나진 않은 것 같군.”
나디아가 해츨링을 소파 위에 던지다시피 내려두곤 글렌에게로 다가와 상처를 살폈다. 다행히 세게 깨문 것은 아닌지 피가 비치진 않는다.
“그래도 의사를 부를까요?”
“아니, 됐다. 조금 저린 정도야. 5분만 있어도 괜찮아질걸.”
“그러시다면야……. 아무튼 많이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상처가 크진 않다는 걸 확인한 그녀가 화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소파 위에 던져진 해츨링이 날개를 움츠린 채 나디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너, 사람을 공격하면 돼? 안 돼? 네가 계속 사람을 공격하면 내가 널 키울 수가 없단 말이야. 응? 영주를 공격하다니, 가신들이 당장 널 죽이라 해도 할 말이 없어.”
저걸 진심으로 알아들을 거라 생각하고 말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조잘조잘 혼자 떠드는 모양새가 참 귀여워 보였다.
콩깍지가 아니라 진짜로 귀여웠다. 길 가는 고양이에게 자꾸 말을 거는 어린아이를 보는 느낌이랄까.
너무 귀여워서 계속 보고 싶긴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저 위험한 짐승을 나디아에게서 치워 버리는 게 우선이리라.
마침 저쪽에서 먼저 공격을 해 줬으니 명분도 생겼다.
글렌이 잔소리를 하고 있는 나디아를 향해 입을 열었다.
“몬스터는 몬스터일 뿐이야. 사람 말을 알아들을 리가 없…….”
그런데 그때였다.
“키이익…….”
“어머, 얘가 왜 이래?”
까만 해츨링이 다 죽어 가는 신음소리를 내며 나디아의 치맛자락에 매달린다.
몇 번 머리를 비비적거리더니 애처로운 눈빛으로 위를 올려다보기까지 했다.
“끼잉…….”
그때 나디아는 처음 깨달았다. 파충류에게도 표정이란 게 존재한다는 걸.
“……이 녀석, 제 말을 알아들은 걸까요?”
“설마. 분위기를 읽은 거겠지. 동물들도 자기가 혼나는 것쯤은 알아채.”
“그렇겠죠?”
사람 말을 알아듣는 몬스터라니. 몬스터를 하수인으로 부리는 고위 마물, 악마가 아니고서야 말이 안 되는 일이다.
머리로는 제 말을 알아들을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디아는 계속 훈계를 이어 나갔다.
“너, 사람을 다치게 한다면 바로 격리할 거야. 그렇게 되기는 싫지?”
“키잇.”
“옳지. 착하다.”
아기 용이 짧은 다리로 폴짝 뛰어올라 그녀의 품 안에 안겨든다.
반사적으로 해츨링을 안아 든 나디아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역시 귀엽다. 파충류 주제에 이렇게 귀여울 줄이야. 이렇게 귀여운 생물체를 쫓아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가 애원하는 눈빛으로 뒤를 바라보며 말했다.
“글렌, 반성하는 것 같으니 계속 제 곁에 두고 키워도 되죠?”
“…….”
“왜 대답을 안 하세요? 설마 막 태어난 새끼를 내쫓으라고 하시진 않을 거죠? 심지어 저를 어미라고 생각하는 아인데…….”
“……마음대로 해라.”
‘이 집안에서 자기 마음대로 못 할 일이 어디 있다고 왜 굳이 의견을 묻는지.’
반대한다고 해도 어차피 밀어붙일 거면서,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 나디아는 방긋 웃어 보였다.
“고마워요.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지 않도록 제가 잘 관리할게요.”
그 미소에 불만이 스르르 사그라진다. 글렌은 스스로도 그런 자신이 우습다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어린 해츨링에게는 먹이로 뭘 먹이면 될까요?”
“글쎄다, 인간이 드래곤을 키웠다는 기록이 없어서……. 일단 이것저것 던져 줘. 먹고 싶은 걸 알아서 골라 먹겠지.”
“뷔페라도 차려 줘야겠어요.”
어지간히 기분이 좋은지 그녀는 흥얼흥얼 콧노래까지 부르며 발걸음을 옮겼다. 품 안에는 여전히 새끼 용이 안긴 채였다.
그러던 중, 나디아는 연신 키륵키륵 울던 용이 어느 순간부터 말이 없어졌다는 걸 깨달았다.
힐끗 옆을 돌아보니 새끼 용은 제 어깨 위로 고개를 뺀 채 뒤를 바라보는 중이다.
‘어딜 보는 거지?’
의아해진 나디아가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곳엔 글렌이 굳은 표정을 지은 채 자신을, 정확히는 그녀의 어깨 위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가 황당하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뭐 해요? 설마 몬스터와 눈싸움이라도 하는 거예요?”
“그럴 리가. 눈동자 색이 나와 비슷해서 쳐다보고 있었을 뿐이야. 사람에게는 드문 색깔이니까.”
“아아, 듣고 보니 그러네요.”
글렌과 새끼 용의 눈동자는 모두 호박 같은 황금색이었다.
굉장히 멋진 색이라고, 나디아는 생각했다.
“이것도 인연인데 둘이 잘 지내봐요.”
“……그래, 이것도 인연이지.”
그리 말하는 목소리가 이를 가는 것처럼 들리는 건 어째서인지.
그리하여 윈터펠의 주민 명단에는 거대 도마뱀이 추가되었다.
* * *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 어느새 나디아와 글렌의 결혼 1주년이 다가오고 있었다.
유민들을 받아들이고 세금 제도를 개편하는 등, 두 사람의 통치 아래 영지는 나날이 발전하는 중이었다.
“글렌, 각 마을 이장들이 접견을 요청했는데 시간 나면 한번 나가봐 줘요. 참, 그리고 구빈원과 보육원을 짓는 안건 말인데…….”
열심히 업무를 보던 나디아가 말을 멈췄다. 업무 파트너인 글렌이 몹시 떫은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이다.
“제 말 듣고 있어요?”
“듣고 있다.”
“근데 표정이 왜 그래요? 몸이 안 좋으면 접견은 미뤄도 돼요.”
“…….”
그는 나디아의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생뚱맞은 얘기를 꺼냈다.
“그보다 그거 안 무겁나?”
“네? 노아 말하는 거예요?”
“그래. 꽤 묵직해 보인다만.”
“키륵.”
새끼 용은 말이 떨어지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디아에게 머리를 비볐다.
무릎 위에서 낮잠을 자다가 제 이름이 불리니 귀신같이 눈을 뜬 듯했다.
“딱히 무겁다는 생각은 안 해 봤는데요.”
“다시 생각해 봐. 지금은 앉아 있으니 그렇다 쳐도, 다른 곳으로 이동할 때도 항상 그대에게 붙어 있잖아. 지난주에 성 바깥으로 뱃놀이를 나갈 때도 그랬고, 우리 둘이서 영지를 시찰할 때도 그랬어. 게다가 그대가 내게 독대를 청할 때도 항상 곁에 있었지.”
“음…….”
지난 기억을 하나하나 떠올리는 나디아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러고 보니 계속 붙어 있긴 했네?’
노아가 알에서 깨어난 이후로 글렌과 단 둘이 있어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그 이전까지는 영지 일에 관해 긴히 논의할 때면, 두 사람은 항상 둘이서만 얘기를 나눴다. 기밀을 바깥으로 유출하지 않기 위함이었다.
“말귀 못 알아듣는 짐승이잖아요. 이 애가 첩자 노릇을 하겠어요, 뭘 하겠어요?”
“어쩌면 말을 알아들을지도 모르지.”
“설마 그럴 리가요.”
나디아가 재밌는 얘기를 들었다는 듯 꺄르르 웃는다.
하지만 글렌은 농담을 한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몹시 합리적인 의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