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3화
“영주님께서…… 집안 서열 3위라고요?”
“그래, 이놈아.”
나단은 적잖이 당황스러운 표정이었다.
“가주이신 영주님께서 3위에 불과하다니요! 선후작님이야 부친되시니 그렇다 치더라도, 마님의 발언권이 후작님보다 위에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척 하면 척이지. 그걸 아직까지 눈치채지 못한 걸 보니 아직 독립하긴 그른 모양이다. 에잉, 쯧쯧.”
웨인은 오랜 시간 갈고 닦은 눈치로 이 집안의 의사 결정 구조를 꿰뚫어본지 오래였다.
“너는 상인이 되겠다는 놈이 최고 권력자가 누군지도 파악 못하느냐? 하여간 내가 직접 떠먹여 줘야 받아먹는 놈 같으니.”
“그렇지만…….”
“내 말 잘 알아듣겠거든 앞으로 마님 앞에선 최대한 잘 보일 수 있도록 노력하거라. 네게 도움이 됐으면 됐지, 해가 되진 않을 게다.”
저 한심한 제자 놈을 어찌 해야 할꼬. 웨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앞서 나가는 그의 뒤로 허둥지둥 따라오는 조수의 목소리가 들린다.
“자, 잠시만요! 같이 갑시다, 단주님!”
* * *
결국 나디아는 황금숲의 비단을 받아 주기로 했다.
혹시 자신이 끝내 거절할까 도망치듯 사라지는 모습을 보니 돌려주기도 미안했던 것이다.
근데 이 부담스러울 만큼 화려한 옷감을 어디다 쓴담?
골똘히 고민하는 그녀에게 글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단사를 불러서 파티용 드레스나 한 벌 지으라고 하는 건 어떻지? 이 화려한 비단으로 일상복은 무리야.”
“파티용 드레스요? 연회를 열 일도 없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내 예상이 맞는다면, 조만간 수도에서 초청장이 올 것 같거든. 왕의 생일이 머지않았으니 말이야.”
“아, 그러고 보니.”
나디아가 짧게 탄성을 터트렸다.
아버지의 꼭두각시인 왕은 제 생일 연회를 성대하게 여는 것을 좋아했다.
연회를 즐기는 것인지, 혹은 정신연령이 심하게 낮은 것인지 알 수가 없었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왕실의 초대장이 도착한다면 거절할 명분이 없다는 것.
작위를 물려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영지를 떠날 수 없다는 핑계도 하루이틀이지, 더 이상 써먹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수도에는 그녀가 제일 꼴 보기 싫어하는 세 사람이 모여 있다.
‘그 얼굴들을 또 봐야 하네.’
벌써부터 짜증이 샘솟는 듯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쯧 하고 혀를 찬 나디아는 행정관들에게 장부와 영수증, 그리고 금화의 숫자를 일일이 대조해 보라고 명했다.
그러고 나니 더 이상 여기서 시간을 죽일 이유가 없었다. 그녀가 몸을 돌려 세우며 말했다.
“저희는 이만 가죠.”
“그러지.”
글렌은 기사단 훈련을 마저 감독해야 했기에 연무장으로 떠났고, 나디아는 남은 업무가 있었기에 안채의 집무실로 향했다.
안채로 향하던 그녀가 잊어먹을 뻔했다는 듯 하녀에게 말을 건다.
“참, 리사. 의상실에 사람을 보내서 시간을 잡으렴.”
“언제로 약속을 잡으면 될까요?”
“이번 주…… 그래, 이틀 후 일정이 넉넉하니 그때가 좋겠다. 이참에 옷을 몇 벌 지어야겠어.”
사치에는 관심이 없지만-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럴 여유가 없지만- 한 지역의 대귀족 가문에 걸맞는 품위 유지가 필요한 법이다.
덩달아 글렌의 옷까지 몇 벌 주문해야겠다. 그녀가 머릿속으로 이번 달의 예산을 조정하며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안채의 계단을 올라가려는 순간, 나디아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이 있었다.
“……?”
바로 햇볕이 잘 드는 곳에 놔두라고 했던, 정체불명의 알이었다.
빈 드래곤 둥지에서 발견한 정체불명의 알.
창가의 장식장에 놓인 알에 살짝 금이 가 있다.
착각인가? 나디아가 몇 번이나 눈을 감았다 뜨며 다시 살펴보았다.
“리사.”
“네, 마님.”
“저거…… 살짝 금이 간 것 같지 않니?”
“예? 무슨…… 어머, 말씀을 들으니 조금 그런 것 같기도요.”
“아니, 원래 이랬었나?”
각도에 따라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실금이었다.
“혹시 저 알에 무슨 짓 했니?”
“아뇨. 먼지 안 쌓이게 가끔씩 닦아 준 거 빼고는 아무 짓도 안 했어요.”
“흐으음…….”
나디아의 입에서 낮은 신음이 새어나왔다.
‘설마 부화하는 건 아니겠지? 한참 방치된 알이 이제 와서 부화할 리가…….’
어쩌면 원래 실금이 있었는데 발견하지 못했을 것일 수도 있다.
지금도 밝은 햇볕 아래에서나 겨우 실금처럼 보이지, 그림자를 드리우면 매끈해 보이지 않은가?
“그래도 혹시 모르니 다른 이상이 생기지는 않는지 자세히 살펴보라고 해라.”
“그냥 치워 버릴까요?”
“아니, 뭐. 그럴 것까지야.”
그때까지만 해도 나디아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어쩌면 방치된 지 몇십 년이나 지난 알이니, 하녀들의 청소 과정에 금이 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밀린 업무가 산적해 있었기에 그녀는 깊게 생각하니 않고 지나쳤다.
그러나…….
하루.
이틀.
사흘.
일주일.
의상실에 주문한 드레스가 완성되어 도착할 만큼 시일이 지난 후에야…….
나디아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거 진짜 부화하는 거 아닐까?”
‘저것’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알이 살짝 들썩였다.
달그락.
“어머, 어머. 방금 움직인 것 같아요!”
“움직인 거 같아요, 가 아니라 진짜 움직였어요!”
하녀들이 목소리를 높이며 호들갑을 떤다.
그도 그럴 만한 것이, 손도 대지 않은 알이 혼자서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방금은 벽면에 부딪히는 소리까지 났다.
거기에 어느 각도에서 봐도 선명하게 새겨진 금까지.
이젠 더 이상 부정할 수가 없었다. 이 정체불명의 알은 조만간 부화한다.
그것도 굉장히 빠른 시일 내에.
나디아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드래곤 테이머니 라이더니 하는 농담을 하긴 했지만, 진지하게 저 알이 부화할 거라고 여긴 이는 없었던 것이다.
설마 했던 그 일이 현실이 되려 하고 있었다.
“어, 어떻게 할까요, 마님?”
“일단 조심해서 나쁠 건 없겠지. 남자 하인들을 불러 저 알을 바깥에 내놓도록 해라. 혹시 위험할지 모르니 하루 종일 지켜보는 눈을 붙여둬야…….”
그런데 채 말을 끝맺기도 전이었다.
파삭!
“응?”
“어, 어어어?”
말을 꺼낸 것이 무섭게 곧장 껍질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린다. 모두의 고개가 삐걱거리며 한 곳으로 돌아갔다.
“어? 어?”
“어…… 어, 저거…….”
착각이 아니었다. 껍질 위를 가로지르고 있는 금이 더욱 진해지고 있었다.
나디아가 당황해하며 뒷걸음질했다.
‘아니, 벌써?’
조만간 부화할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설마 지금 당장일 줄이야.
리사가 그녀의 옷깃을 살짝 잡아당기며 말했다.
“마, 마님. 뭐가 나올지 모르니 일단 도망가요.”
“그, 그래. 그러는 게 좋겠다.”
나디아는 하녀들과 함께 곧장 몸을 돌렸다.
메두사에게 공격받아 죽을 뻔한 것이 얼마 전의 일이지 않은가?
막 태어난 새끼이니 그리 위험하진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조심해서 해가 될 일은 없으리라.
그런데 채 몇 걸음도 내딛지 못한 순간이었다.
파삭! 콰직!
“……!”
등 뒤로 알이 완전히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나디아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고 말았다.
그리고.
“키익?”
호박색 눈을 깜박거리는 새까만 파충류와 눈이 마주쳤다.
* * *
안채의 복도.
바닥에 깔린 붉은색 카펫이 무색해질 만큼 요란한 발소리가 온 집안을 울리고 있었다.
시끄러운 발소리는 안주인의 침실이 있는 3층까지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그 누구도 소란을 일으키지 말라며 그를 제지할 수 없었다.
바로 이 성의 주인인 글렌이 소음의 장본인이었으니 말이다.
마침내 후작 부인의 침실 앞에 선 그가 문을 열어젖혔다. 뒤따라오는 가신들이 열어 주길 기다릴 여유 같은 건 없었다.
벌컥!
“나디아!”
“아, 왔어요?”
하지만 그를 반긴 것은 허무할 만큼 태연한 목소리였다.
나디아가 의자에 앉은 채 고개만 돌려 인사했다.
“뛰어왔어요? 급한 일은 아니었는데…… 아, 일단 이것 좀 봐요.”
일어나서 반기는 게 예의라는 건 알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게 있는 법이다.
품 안에 묵직한 파충류 새끼가 똬리를 틀고 있는 경우가 바로 그러했다.
“키익! 키르륵!”
“아, 간지러워.”
자그마한…… 이라고 해 봤자 다 큰 고양이만 한 크기였지만 여하튼. 작은 새끼 드래곤이 나디아의 무릎 위에서 배를 뒤집으며 애교를 부리고 있었다.
머리를 가슴팍에 부비며 재롱을 부리기까지 했다. 영락없는 애완 고양이였다.
“이건 대체…….”
가까이 다가온 글렌이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정체불명의 알이 부화했다기에 걱정되어 달려왔는데, 이렇게 평화로운 광경을 목도하게 될 줄이야.
조금 허탈하긴 하지만 불미스러운 일이 없었던 건 천만다행이다.
글렌은 그제야 놀란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아아, 간지러워! 그만해.”
그가 기겁하여 달려왔다는 걸 알기나 하는 건지, 나디아는 연신 생글생글 웃는 표정이었다.
어린 해츨링의 애교를 매우 기꺼워하는 듯했다. 그녀가 흐뭇하게 새끼 용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아무리 봐도 드래곤의 새끼…… 그러니까 해츨링인 거 같죠?”
“그런 것 같군. 와이번은 저렇게 생기지 않았어.”
“역시, 정말 드래곤의 알이었나 봐요.”
설마 진짜 드래곤의 알일 줄은 상상도 못했을 뿐더러, 그것이 실제로 부화할 줄은 더더욱 상상하지 못했다.
게다가 갓 태어난 새끼 드래곤이 인간에게 순하다는 건 정말정말 상상지도 못한 일이었다.
아무리 특급 몬스터라 해도 일단은 몬스터 아닌가?
“글렌, 인간에게 호의적인 몬스터도 있나요?”
“매우 드물지. 하지만 몬스터는 처음 알에서 깨어났을 때 눈이 마주친 존재를 어미라고 여기는 습성이 있다. 그대를 공격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겠지.”
“아하.”
그녀의 눈빛이 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순하게 구는지 의아해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귀여운 이유다.
“그럼 얘는 절 엄마라고 생각하는 거네요? 귀엽기도 하지, 우리 용용이.”
“……용용이?”
글렌의 표정이 떨떠름하게 변했다.
“벌써 이름까지 지어 준 건가?”
“그럴 리가요. 이름은 좀 더 고민해 본 뒤에 멋진 걸로 지어 줄 거예요. 그건 그냥 애칭이고요.”
“…….”
애칭. 애칭이라…….
그 단어에 살짝 심술이 샘솟은 건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이었다. 사랑이란 원래 비이성적인 법이다.
그가 떫은 눈빛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웬 시커먼 짐승이 온몸을 나디아에게 비비적거리고 있다.
이 상황이 달갑냐고 묻는다면 절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유치한 속내를 그대로 내비칠 수도 없는 일이다.
그가 탐탁지 않은 듯한 어조로 말했다.
“남편에게도 안 쓰는 애칭을 몬스터 따위에게 붙여 주는 건 남들 보기에 좀 이상할 텐데?”
“네? 그렇지만 당신이 예전에 그랬잖아요. 애칭으로 부르지 말라고요.”
“뭐? 내가 언제 그런 말을…….”
곧바로 반박하려던 글렌의 말소리가 뚝 멎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