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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화 (72/142)

제72화

조금 의아하긴 했지만 그녀는 굳이 따지고 들지 않았다. 어쩌면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한 게 제 착각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까 전부터요.”

“저런, 험한 꼴을 보게 했군.”

“아녜요. 멋진 대련이었는걸요. 직접 검을 쓰는 모습은 처음 보네요. 파비안 경이 기사들 중에 영주님을 이길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더니, 정말 그런가 봐요.”

입 발린 말은 아니었다. 서류 업무가 주력인 그녀로서는 실제 기사들 간의 대련을 자주 접할 수 없었으니까.

험한 꼴은 보여 줬다고 말하면서도 그게 진심은 아니었는지, 멋진 대련이라는 말에 그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가는 게 보인다.

땀을 닦는 척 손수건으로 입가를 가렸지만 나디아의 눈썰미를 피할 수는 없었다.

자세히 보니 뺨이 살짝 붉어져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 그의 모습에 그녀는 그만 픽 하고 웃고 말았다.

‘하여간 남자들이란…….’

칭찬해 주면 좋아서 계속 재롱부리는 강아지를 보는 느낌이랄까.

단순해서 말로 구슬리기 쉽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녀의 시야 바깥에서 하인 하나가 쪼르르 달려 들어왔다.

“영주님! 영주님!”

헐레벌떡 뛰어 들어온 하인은 글렌에게로 가까이 다가가더니 무어라 말을 전했다.

목소리를 높이지 않은 대화까지 들릴 거리는 아니라, 나디아는 난간에 몸을 붙인 채 그에게 물어야 했다.

“무슨 일이에요?”

“수도로 상행을 떠났던 웨인이 돌아왔다는군.”

“어머, 정말요?”

나디아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마침 웨인에게 시킬 일도 있던 차다.

그런 그녀의 속내를 읽기라도 한 듯, 글렌이 제안했다.

“지금 알현을 기다리는 중이라는데, 같이 보러 갈 텐가?”

* * *

웨인과 윈터펠 후작 부부의 접견 장소는 응접실이 아닌 그레이트 홀이었다.

수도에서 가져온 판매 대금과 다른 물품들을 늘어놓기에 응접실은 지나치게 좁았던 것이다.

웨인이 늘어진 궤짝 더미를 가리키며 말했다.

“보석류와 미술품은 대부분 경매를 통하여 처분했습니다. 경매장 수수료를 제외하면 총 8만 4천 30골드. 자세한 건 여기 장부와 서류를 봐 주시지요.”

“흐음.”

글렌과 나디아가 건네받은 서류를 가볍게 넘겨 보다가, 그것을 하인에게로 넘겼다.

당장 이 자리에서 장부와 실제 액수를 일일이 대조해 보는 건 무리다. 웨인의 알현을 받아 준 건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자세한 건 조금 후에 확인하기로 하고…… 수도에서 별 일은 없었나?”

“드래곤 레어에 보관되어 있던 보물의 양을 떠보는 이가 있긴 했습니다만, 그걸 제외하면 달리 별 일이라고 할 만한 건 없었습니다.”

“다행이군. 여하튼 수고했네.”

“제가 마땅히 해야 될 일이지요.”

웨인이 공손한 자세로 상체를 살짝 숙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글렌과 나디아가 동시에 서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는 눈빛으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렇게 깍듯하게 나오니까 일 더 시키기가 좀 그런데……. 여독도 안 풀린 사람에게 또 상행을 떠나라고 하는 건…….’

‘어쩔 수 없어요. 수수료 좀 더 쳐준다고 하세요.’

짐만 안전하게 나른다고 좋은 중개인이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좋은 질의 물건을 최대한 저렴한 가격에, 그리고 시일에 맞춰 구할 수 있어야 하며, 무엇보다 신뢰할 수 있는 이여야 한다.

지금 이 시점에서 웨인 마커스는 최선의 선택지였다.

‘그럼 잘 얘기해 줘요. 저보다는 당신하고 더 친하잖아요.’

‘…….’

나디아는 눈빛과 표정으로 제 의사를 전달한 뒤 딴청을 부리기 시작했다.

하릴없이 입을 여는 건 글렌의 역할이 되어야 했다.

“윈터펠에서 수도까지 왕복하려면 꽤 길이 멀었을 텐데, 굳이 겸양 떨 필요는 없다.”

“아닙니다. 저야 이것이 업인걸요. 관례보다 더 중개 수수료를 높게 쳐주시니 저에게도 이득인 셈이죠.”

그래, 그 말이 나오길 바랐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은 글렌이 얼른 말을 이었다.

“그럼 한 번 더 해 보겠는가?”

“예?”

“수도까지의 상행 말이다. 아무래도 북부 내에서 자급자족하기는 무리가 많거든. 특히 다량으로 구매할 것이 있을 때는 더더욱.”

“다량으로 필요한 물건이라 하시면…….”

“최근에 몬스터 웨이브가 터졌다는 소식은 들었나?”

“몬스터 웨이브요?”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에 웨인이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소식은 접했습니다. 윈터펠령 내에서 큰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났다고, 수도까지 파다하게 소문이 퍼지더군요. 다소 걱정을 했는데 지금 두 분의 표정을 보니 잘 해결된 모양입니다.”

“그 덕에 몬스터 부산물을 꽤 얻게 되었지. 그걸 팔아 볼 생각이다.”

“……예?”

그 순간 웨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방금 뭐라고 하신 거지?’

몬스터 부산물을 많이 얻었다. 그래서 그걸 팔 생각이다.

간단한 문장인데도 이해하는 게 쉽지 않았다. 그는 한참 머리를 굴린 후에서야 비로소 입을 열 수 있었다.

“설마 벌써 가시덩굴 허브의 일을 잊은 건가?”

“아.”

웨인이 입에서 허탈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출처가 마님이라면 얘기가 달라지는 것이다.

“하긴…… 마님이라면 다 생각이 있으시겠지요.”

여태껏 나디아가 쌓아 온 신뢰는 절대적이었다.

다들 그녀가 길 가다가 뜬금없이 아래에서 금광의 기운이 느껴진다며, 땅을 파 보라고 명령해도 일단 따르고 볼 것이다.

나디아가 나서서 지시 사항을 전달했다.

“칠각조개, 해맞이꽃, 그리고…… 아니, 자세한 물품 목록은 글로 적어서 전달하지. 아주 구하기 힘든 재료는 없을 거야. 음, 아마도?”

“최선을 다해 보지요.”

웨인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자, 그녀는 비로소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중개 수수료를 조금 상향할 생각인데, 자세한 건 에드워드와 상의하면 될 거야. 아 참, 이건 포상금이다.”

“오오, 감사합니다.”

웨인은 상인답게 주는 돈을 마다하지 않았다.

또한 노련한 상인답게 윗사람에게 적당히 바치는 것도 필요하다는 사실을 간과하지도 않았다.

“저 역시 마님께 선물 드리고픈 물건이 있습니다. 한번 봐 주시지요.”

“아니, 계속 상행을 보내는 것도 미안한데 그럴 필요는 없어.”

“제 성의입니다. 일단 한번 봐 주십시오. 정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다시 가져가겠습니다.”

그가 짝짝 박수를 두 번 치자, 상단의 직원들이 커다란 궤짝을 들고 나왔다.

그 안에는 첫 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비단이 들어 있었다.

수도에서 온갖 고급품들을 접했던 나디아의 눈에도 예사롭지 않은 사치품이다. 그녀의 눈빛에 살짝 놀라움이 스쳤다.

“황금숲의 요정들이 짠 실로 만든 비단입니다. 돈이 있다고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닌데, 이번에 운이 좋게도 얻게 되었지요.”

“꽤나 귀한 물건일 텐데.”

황금숲의 실로 만든 비단이라면 카레인 역시 구하지 못해 안달인 사치품이었으니 말이다.

“저보다는 마님께 더 잘 어울리는 물건이니 부디 받아 주십시오. 제 성의입니다.”

“하지만…….”

덥석 받기에는 미안할 만큼 값비싼 물건이었다. 오늘 그녀가 내린 포상금은 푼돈으로 보일 만큼 말이다.

나디아가 머뭇거리는 기색을 보이자 글렌이 끼어들어 말했다.

“파티용 드레스를 짓기 좋겠군. 언젠가 긴히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으니 받아 둬.”

가주인 글렌의 허락이 떨어졌으니 더 기다릴 것도 없었다.

웨인은 서둘러 비단이 근 궤짝을 나디아 앞에 내려놓은 뒤 허리를 숙였다.

“그럼 받아 주시는 걸로 알겠습니다.”

“자네 성의는 고맙게 받지. 일단 오늘은 자택에 들어가서 쉬어라. 며칠 후에 사람을 보내겠다.”

“예.”

나디아가 한사코 못 받겠다고 거절하기 전에, 그는 얼른 두 사람에게 인사하고 그레이트 홀을 빠져나갔다.

* * *

바삐 걸어가는 웨인의 뒤를 상단 직원들이 따라온다. 쫓기듯이 걸어가는 웨인의 뒤로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단주님, 허억, 단주님!”

“음?”

마님이 선물을 돌려보내기 위해 보낸 사람일까 걱정하며 고개를 돌렸는데, 다행스럽게도 그를 부른 이는 상단 직원이자 제 조수인 나단이었다.

그가 거의 뛰어오다시피 하여 제 옆에 섰다. 웨인이 입을 열어 물었다.

“무슨 일이냐? 그보다 목소리 좀 낮춰라. 아직 내성 안이다.”

“아, 죄송합니다.”

“됐고, 용건이나 말해 봐라.”

나단이 잠시 헐떡이는 숨을 고른 뒤 말을 이었다.

“그게…… 왜 황금숲의 비단을 마님께 드렸는지 궁금해서 말입니다. 저는 당연히 그것이 후작님이나 선후작님께 바칠 물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뭐라?”

요정이 직접 짠 실로 만든 비단이라면 돈이 있다고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이왕 권력자에게 귀한 물건을 바치려거든, 가주인 글렌에게 선물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지 않겠는가?

합리적인 의문이라 생각했건만, 어쩐지 웨인의 표정이 이상하다.

아니나 다를까 곧장 불호령이 떨어졌다.

“이 멍청한 것! 내 밑에서 대체 뭘 배운 것이냐?”

“예?”

생각지도 못한 호통에 그는 당황하여 말을 더듬어야 했다.

“제, 제가 실수를 했다면 부디 알려 주십시오.”

“무엇을 잘못 판단 내렸는지 짐작도 못하는 것 같으니 알려 주마. 네 놈은 후작가의 권력 서열이 어떻게 되는 줄 아느냐?”

“그, 그야 가주이신 후작님께서 가장 높…….”

“틀렸다! 쯧쯧, 상인이라는 놈이 이렇게 눈치가 없어서야……. 잘 들어라. 1위가 후작 부인, 2위가 선후작님이며, 현재의 영주님은 3위에 불과하다. 알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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