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1화
-쉬이잇!
“마, 마님!”
“……!”
그 순간, 죽은 줄 알았던 뱀이 쏜살처럼 움직였다.
나디아가 위험을 감지했을 때, 메두사의 뱀은 이미 허공을 날다시피 하며 제게 달려드는 중이었다.
쩌억 벌어진 입 사이로 독액이 맺힌 송곳니가 드러났다.
점점 가까워지는 뱀의 머리가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느리게 느껴졌다.
‘젠장.’
이건 피할 수 없다. 목숨이라도 건지고자 반사적으로 방어 자세를 취하는 찰나, 무언가 굵은 것이 나디아의 허리를 낚아챘다.
일순간 몸이 휘청거린다. 뱀이 제 허리를 휘감았다고 착각한 그녀가 몸부림쳤다.
판금 갑옷의 흉갑이 시야를 가득 메우고 나서야 나디아는 제 허리를 감싼 것이 사람의 팔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채앵!
검을 뽑는 소리 뒤로 철벅, 하고 무언가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이어진다.
슬로우 모션처럼 느껴지던 현실이 다시 원래대로 되돌아갔다.
“아…….”
멍하게 눈을 깜박이던 나디아가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동공이 크게 벌어진 금색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 글렌.”
“괜찮나?”
“조금 놀란 거 빼고는…… 괜찮은 거 같아요.”
“아, 급하게 잡아당기다 보니 살짝 삐끗했을 수도 있겠군.”
글렌이 붙잡았던 몸을 놓아 주며 말했다. 갑작스레 허리를 낚아채인 탓에 등허리가 조금 뻐근하다.
나디아는 아릿한 허리를 문지르며 그의 뒤편을 힐끔 바라보았다. 뱀의 머리가 바닥 위를 뒹굴고 있었다.
글렌이 몸으로 그녀를 감싸고, 다른 기사들이 뱀을 베어낸 모양이다.
‘까딱 잘못했으면…… 여기서 허무하게 죽었을지도 몰라.’
최근 들어 모든 일이 마음먹은 대로 술술 풀리다 보니 긴장이 헤이해진 것인가? 나디아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침을 꿀꺽 삼켰다.
“와, 이놈 이거 아직도 움직이네.”
“뱀 계열의 몬스터는 목숨이 질기지. 본체가 죽은 후에도 살아 있는 경우가 왕왕 있다고 들었어.”
“죄송합니다, 마님. 조금 더 꼼꼼하게 확인했어야 하는 건데…….”
“아니에요. 제가 멋대로 다가간 건데요, 뭘.”
이번만큼은 자신의 부주의 탓이 컸다.
겁먹은 그녀가 본능적으로 글렌에게 몸을 밀착시키며 제안했다.
“위험할 수도 있으니 자리를 옮기도록 해요.”
“마님의 뜻대로 따르시지요. 아직 숨이 붙어 있는 놈이 더 있을 수도 있으니 안전한 곳에서 이야기 나누는 게 좋겠습니다.”
“알겠다.”
글렌은 병사들에게 확인사살을 지시한 후, 일행은 군영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까지도 글렌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던 그녀가 위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런데 당신은 다친 곳 없어요?”
“멀쩡하다. 닿지도 않았지만 만약 그랬더라도 별 문제 없었을 거다. 뱀의 송곳니가 철갑을 뚫을 수는 없지.”
“그래도 몬스터인걸요. 메두사가 하급 몬스터라서 다행이지, 중급 이상이었다면 위험했을지도 몰라요. 다음부터는 몸으로 막아서는 건 하지 마세요. 당신은 윈터펠의 가주인걸요.”
“…….”
나름 걱정해서 한 말이었는데,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나디아가 뒤늦게 아차 하고 제 실수를 깨달았다.
‘위험을 감수하며 구해 줬더니 괜히 잔소리나 한다고 생각할지도.’
그녀가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고 해명하려는 순간, 글렌이 순서를 가로채 먼저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대가 위험했을 수도 있어.”
“네?”
“같은 독이라면 남자인 내 쪽이 훨씬 더 잘 견디겠지.”
“아…….”
굳이 따지자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여자인 걸 감안하고도 작은 체구의 그녀와 달리, 저쪽은 어지간한 성인 남성의 평균 체격을 훨씬 넘어서니 말이다.
다만…… 가짜 아내를 위해 자기 몸을 던지는 남자가 몇이나 있을까 싶어서 그렇지.
그녀가 살짝 입을 벌리며 감탄했다.
‘기사 작위도 있다더니…… 이런 게 기사도 정신인가?’
기사도란 허울 좋은 위선이라고 생각했건만.
그녀가 오랜 시간 친분을 쌓았던 기사라고는 출세 앞에 약혼녀를 버렸던 이지호뿐인 탓이었다.
반쯤은 진심으로, 그리고 반쯤은 잔소리하려던 의도가 아니었다고 해명하기 위해, 나디아가 재차 입을 열었다.
“글렌, 방금 좀 멋졌어요.”
“응?”
“제가 조금만 더 철이 없었으면 방금 후작님께 반했을지도 몰라요.”
마지막 말은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도록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그러자 일순간 그의 동작이 우뚝 굳는다. 그 반응을 오해한 그녀가 서둘러 덧붙였다.
“물론 진짜 반했다는 뜻은 아니니 안심하세요.”
“…….”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표정이 묘하다. 나디아는 다시 한번 진심을 다해 해명해야 했다.
“어어, 정말 그냥 해 본 말이라니까요? 왜 표정이 그래요?”
“……착각이다.”
착각이 아닌 거 같은데.
“흐음.”
나디아는 가늘어진 눈으로 그의 표정을 뜯어보았다. 시시각각 변하는 표정을 관찰하는 건 꽤 재밌는 일이었다.
도토리를 잃어버린 다람쥐처럼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가 싶더니, 좋은 생각을 떠올렸는지 ‘아’하고 탄성을 내뱉기도 한다.
이내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오르는 걸 나디아는 놓치지 않았다.
“왜 혼자서 웃고 그래요?”
“아니, 잠깐 생각할 게 있었다. 별 일은 아니야.”
“무슨 생각이요? 영지 일에 관한 거라면 저랑 의논해요.”
“아아, 중장기병의 운용에 대한 일인데…….”
글렌이 꺼낸 이야기에 집중한 탓에 그녀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그가 입으로는 아무 말이나 꺼내며, 머릿속으로는 어떤 계획을 짜고 있다는 것을.
* * *
몬스터 웨이브를 정리한 직후, 토벌대는 곧장 본거지로 돌아왔다. 수레에는 몬스터 부산물을 잔뜩 실은 채였다.
영지민들은 귀환한 토벌대가 어떤 전리품을 가져왔는지 의아해했지만 끝내 그 정체를 알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며칠 후.
몬스터 웨이브가 끝난 지 보름째 되던 날.
해가 머리 꼭대기까지 떠오른 시각, 본채와 안채를 잇는 다리를 일련의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바로 나디아와 윈터펠의 행정관들이었다.
“가죽과 뿔, 그리고 치아 등은 분리하여 서늘한 곳에 보관 중입니다. 고기는 오래 보관하려면 몇 차례 건조 과정을 거쳐야 할 듯싶습니다.”
“그 문제에 관한 건 경에게 맡기겠어. 그건 그렇고…….”
보고를 듣던 나디아가 갸웃 하고 고개를 기울였다.
“내게 무슨 할 말이 있는 얼굴인데?”
“저, 그게…….”
속마음을 들킨 것인지 행정관 에드워드는 정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우물쭈물하던 그가 용기 내어 질문했다. 그녀의 사업 구상을 들은 이후 하루도 빠짐없이 했던 생각이었다.
“진심으로 몬스터 부산물로 약을 만들 생각이십니까? 괴물을 약으로 만들 수 있다니 이건 정말 말도 안 됩니다.”
“아, 그러고 보니 옛날 생각이 나네.”
“예?”
갑자기 웬 옛날 생각?
뜬금없이 딴 이야기를 꺼내는 마님을 보며 그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나디아가 빙긋 웃으며 말을 잇는다.
“내가 가시덩굴 허브로 허브차 사업을 하겠다고 했던 때에도 다들 지금과 비슷한 반응이었지.”
“그, 그건……!”
행정관이 당황한 듯 말을 더듬으며 눈알을 굴린다.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생각해보니 마님은 늘 그러했다.
왜 저런 기행을 벌이는가 싶다가도, 결과론적으로 보면 그녀의 선택은 항상 옳았던 것이다.
그러니 이번에도 계획이 있으시겠지. 민망한 표정이 된 행정관이 짧은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하아…… 제가 어리석은 질문을 한 모양입니다. 마님께 따로 생각이 있으시겠지요.”
“재료가 이것저것 필요하긴 하지만 그거야 지금부터 구하면 될 일이고.”
이제 우리는 돈이 많잖아? 그녀가 어깨를 으쓱이며 덧붙였다.
“준비물을 대량으로 구매하려면 상인회와 거래를 해야 될 것 같은데.”
“아, 마침 북부 상인 연합회의 웨인 마커스 님께서 곧 돌아오신다고 합니다. 어제 상단의 서신을 받았지요.”
웨인은 나디아의 명령으로 드래곤 레어 노획물을 일부 처분하기 위해 수도로 향한 바가 있었다.
시기적절하게 돌아와 준 모양이다. 나디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마침 잘되었네. 결과도 보고받을 겸 만나야겠어. 이왕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해치워 버리지. 언제쯤 입성이 가능할지 사람을 보내도록.”
“예, 알겠습니다.”
긴 여정을 막 끝마친 웨인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구해야 할 물건이 너무 많았다.
그녀가 중개 수수료를 조금 더 떼어 줘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발걸음을 옮기는 순간이었다.
등 뒤를 따라오던 하녀들 사이에서 작게 소란이 인다.
“얘, 저기 좀 봐.”
“어머나…….”
조용히 속삭이는 목소리였지만 가까이 서 있는 나디아에게 들리지 않을 크기는 아니었다.
“……?”
의아해하며 힐끔 뒤를 돌아보니 하녀들이 난간 밖을 내다보며 소곤거리고 있었다.
난간 아래로 보이는 것은 기사들이 연무장으로 사용하는 빈 공터였다. 기사들이 대련하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디아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하녀들이 바라보는 곳을 쫓았다. 그러자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글렌?’
카앙! 캉!
난간 밑으로 글렌이 이름 모를 기사와 검을 맞대고 있었다.
잠시 저와 눈이 마주치는가 싶더니, 다시 상대방에게 공격을 몰아치기 시작한다.
검술을 잘 모르는 그녀가 보기에도 꽤 멋들어진 대련이었다. 하녀들이 시선을 빼앗긴 이유가 이해될 만큼.
그런데 자세히 보니 뭔가 이상하다.
“어머, 어마마.”
“역시 기사님들은 다르긴 하네…….”
어린 하녀들은 뺨을 살짝 붉힌 채로 침을 꼴깍꼴깍 삼키고 있었다.
저 반응으로 보아 할 때, 그녀들이 구경하는 건 검술 대련 그 자체가 아니라…….
‘몸을 보고 있는 거였어?’
더운 날씨 때문인지 다들 상의를 풀어헤치고 있었다. 느슨하게 풀어헤친 옷깃 사이로 탄탄한 근육이 보인다.
소매를 접고 목깃을 풀어헤친 건 글렌 역시 마찬가지였다.
남녀를 불문하고 바깥에선 몸을 꽁꽁 싸매는 게 미덕인 시대다. 영주의 체면 때문에라도 웬만해선 그러지 않을 텐데…….
‘많이 더운가?’
나디아가 하늘을 힐끔 올려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선 햇볕이 쨍쨍 내리쬐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체면 차리는 걸 중시하도록 교육받아온 대귀족들은 대개 더워도 몸을 꽁꽁 싸매는 편이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란 게 있는 법이다.
이런 날씨에 검술 대련을 하려니 힘들겠구나, 하고 나디아는 납득했다.
“영주님이 직접 진검으로 대련을 해 주시는 건 오래간만이네요.”
그리 말한 건 행정관 에드워드였다. 그녀의 고개가 그에게로 향한다.
“오래간만이라고?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
“네, 소후작 시절에는 종종 진검 대련을 하시곤 했습니다만, 작위를 물려받은 이후로는 가신들이 만류하여 자제하시는 편입니다.”
“아하.”
선대 주군이 갑작스레 그런 사고를 당했으니 가신들이 진검 대련을 만류하는 것도 이해는 됐다.
진검을 맞대다 보면 어떤 사고가 일어날지 모르는 일 아닌가?
“그런데 지금은 왜 하시는 건가?”
“그, 글쎄요. 그건 저도 잘…….”
“흐음.”
몬스터 웨이브 때문에 경각심이 생긴 탓일까?
나디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난간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쯤 글렌과 이름 모를 기사의 대련이 끝나 있었다.
하인이 건네주는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글렌이 난간 위를 바라보았다. 그녀와 시선이 딱 마주친다.
“나디아? 언제 여기 온 거지?”
“응?”
그녀의 입에서 의아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까 나랑 눈 마주쳤잖아? 그런데 왜 이제야 발견한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