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9화 (69/142)

제69화

토벌 준비는 눈 깜박할 사이에 진행되었다.

몬스터 웨이브의 피해를 직격으로 맞는 영지답게 언제든 대응할 수 있도록 체계가 갖춰진 덕분이었다.

“다행히 날씨가 좋네요.”

정갈하게 도열해 있는 병사들과 기사단. 건장한 사내들만 모인 장소에 낭랑한 여자의 목소리가 작게 울려 퍼진다.

이질적인 광경이었지만 이젠 더 이상 그 누구도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후작 부인이 끼지 않는 영지 일은 없다는 걸, 웬만한 가신들은 전부 알고 있는 탓이었다.

선봉을 맡은 기사가 주인을 향해 묻는다.

“후작님, 출발해도 되겠습니까?”

글렌은 대답 대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출발을 알리는 북소리가 울리고, 정지해 있던 군대가 한 발자국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쿵! 쿵!

토벌대가 대로를 가로지르자 불안한 낯빛의 영지민들이 힐끔힐끔 곁눈질을 했다.

여태껏 몬스터 떼가 이곳까지 남하한 적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안한 마음을 완전히 지우기는 힘든 법이다.

“개문-!”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성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서문 바깥의 평야를 향해 토벌대가 첫 걸음을 내딛었다.

그런데 성문을 나선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이었다. 나디아가 말머리를 나란히 하며 글렌의 옆에 섰다.

먼저 다가온 쪽은 나디아지만 먼저 입을 연 것은 글렌이었다.

“예레스 산맥까지는 꽤 멀다. 마차를 타는 것이 좋지 않겠나?”

“아직까지는 괜찮아요. 못 버티겠으면 그때 마차를 탈게요. 그보다 잠시 얘기할 수 있나요? 듣는 사람 없는 곳에서, 단 둘이서만요.”

“그럼 조금 바깥으로 자리를 옮기지.”

“좋아요.”

곧이어 두 사람이 말머리를 나란히 한 채 행렬을 벗어났다.

거리를 한참 벌린 후에야 나디아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글렌…… 혹시 저한테 화가 난 건 아니죠?”

“아니, 그럴 리가.”

대답이 곧장 튀어나오는 것으로 보아 빈말은 아닌 듯싶었다.

나디아는 그의 진심을 가늠하기 위해 천천히 표정을 살펴야 했다. 말했던 대로 화가 난 표정은 아니긴 하다. 다만…….

‘그런데 왜 저렇게 울적해 보이지?’

부친이 건강을 회복하는 등, 최근 들어 좋은 일만 일어났는데도 왜 표정에 근심이 담겨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정말 화 안 난 거 맞아요?”

“그래, 그대에게 화가 날 이유가 없잖아.”

“그렇다니 다행이긴 한데…….”

어찌 됐든 화가 난 게 아니라니 잘된 일이다. 그녀가 얼른 말을 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파비안 경이 어제 제게 묻더라고요. 최근 며칠간 우리 둘 사이에 분위기가 좀 미묘하다고, 무슨 일 있었느냐고요.”

“그놈은 대체 눈치가 빠른 건지 느린 건지 모르겠군.”

“아무튼 파비안 경이 그런 말을 했다는 건 무언가가 평소와는 달랐다는 거잖아요.”

“나는 화가 난 게 아니라…….”

잠시 말을 멈춘 글렌이 표현을 골랐다.

“그저 좀…… 민망해서 그렇다. 그대가 나를 정말 사랑……하는 거라고 생각했거든.”

“제가 조금 과하게 연기한 탓이니까 자책하실 거 없어요.”

“……그래.”

조금도 그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위로라는 걸, 나디아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며칠 전의 일은 저희 둘만 아는 걸로 하자는 거예요. 설마 벌써 어디 가서 말한 건 아니죠?”

“그럴 리가. 그런 얘기를 어디 가서 구구절절 떠들고 싶지는 않아…….”

그리 말하는 목소리에는 진심이 듬뿍 담겨 있었다.

그녀가 생각했다.

‘하긴, 누가 자신을 좋아하는 줄 착각했다는 게 남들에게 알리고 싶은 무용담은 아니긴 하지.’

글렌과 이해관계가 일치해서 다행이다.

이중 첩자 역할을 계속하기 위해서라도, 그에게 진실을 털어놓은 것은 비밀로 유지될 필요가 있으니 말이다.

“그럼 여태 그랬던 것처럼, 대외적으로 저는 당신을 사랑해서 북부로 온 거예요. 제가 아버지를 배신했다는 걸 숨기기 위해서라도 입단속을 할 필요가 있어요.”

“그러니까…… 다른 이들 앞에서는 이제까지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자는 건가?”

“네, 비밀은 아는 이가 적을수록 좋으니까요. 하지만 합방을 피하려면 선후작님께는 살짝 귀띔 드리는 것도 필요하겠죠. 정말 믿을 만한 사람, 그중에서도 입이 무거운 사람에겐 알려도 될 거 같네요.”

“……어디서 말이 새어 나갈지 모르니 나와 그대만 아는 비밀인 걸로 해 두지.”

“그럼 선후작님께는 저희가 항상 각방을 쓰는 걸 어떻게 설명하시려고요?”

“그건…… 내가 방법을 찾아보겠다.”

“으음…….”

본인이 알아서 하겠다니 더 말을 얹기도 뭣하다.

‘나와의 합방을 피하고 싶은 건 저쪽도 마찬가지이니 최선의 방법을 찾아내겠지, 뭐.’

그렇다면 믿고 맡기는 수밖에.

나디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좋아요. 그 일은 당신이 알아서 처리하겠다니 그만 논의하고, 다른 문제로 넘어가요.”

“여기서 더 문제가 있다고……?”

빠르게 중얼거리는 목소리라 미처 듣지 못한 나디아가 되물었다.

“뭐라고요? 못 들었으니 한 번만 다시 말해 줄래요?”

“아, 그냥 혼잣말이었다. 말을 끊어서 미안하군. 계속하도록 해.”

“……?”

그녀의 고개가 갸우뚱 기울었다. 아까부터 안색도 좋지 않은데, 정말 무슨 문제가 있는 걸까?

“글렌, 혹시 걱정거리가 있다면 혼자서 끙끙 앓지 말고 꼭 저한테 말해야 해요. 둘이서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면 해결책이 나올 수도 있잖아요.”

“……걱정해 줘서 고맙지만 그대와 상의할 만한 고민거리는 없다. 괜히 마음 쓰지 않아도 돼.”

“그렇다면 다행이긴 한데……. 아, 제가 방금 전에 얘기하려고 했던 내용이 뭐냐면, 저를 이전처럼 대해 달라는 거예요.”

“내 태도가 달라졌다고?”

“네. 계속 미묘하게 절 피하고 계시잖아요. 후작님이 계속 저를 피하시면 다른 사람들의 의심을 사게 되는 건 시간문제일걸요! 그러니까 평소처럼 대해 줘요. 괜히 혼자서 민망해할 필요 없다니까요? 전 정말 아무 생각 없답니다.”

“…….”

한동안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의아해진 나디아가 대답을 재촉하기 직전, 비로소 그의 입이 열린다.

“……노력해 보겠다.”

“꼭이에요!”

그리 대답하는 표정이 조금 미묘했지만 어찌 됐건 확답을 받아내긴 했다.

용건을 끝낸 나디아가 말머리를 살짝 돌리며 말했다.

“그럼 이만 돌아가요. 너무 오래 떨어져 있으면 다들 걱정할 테니까요.”

“그러지.”

“그럼 나중에 다시 봐요.”

글렌은 행렬 앞쪽의 자리로, 그리고 나디아는 행렬 중앙의 원래 자기 자리로 향해 말머리를 돌렸다.

그런데 몇 걸음을 옮겼을 무렵이었다.

“하아…….”

등 뒤에서 크게 울려 퍼지는 한숨소리에 그녀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아야 했다.

글렌은 자신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그 자리에 멈춰선 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뒤돌아 서 있기에 표정을 볼 수는 없었지만, 뒷모습만으로도 짐작이 되는 듯했다.

‘계속 무슨 일이냐고 캐물을 수도 없고…….’

본인이 아무 일도 없다고 했으니 더 이상 간섭하는 것도 실례이리라.

결국 그녀는 하릴없이 본래 자리로 되돌아가야 했다.

* * *

본래 인간들이 사는 땅에는 몬스터가 서식하지 않는다.

저 머나먼 동부, 마족들의 땅 할스타드와 북방 한계선 이북의 얼어붙은 땅이 몬스터들의 고향이었다.

그곳의 몬스터들은 종종 발생하는 게이트를 통해 긴 거리를 뛰어넘었는데, 그것이 바로 몬스터 웨이브였다.

원인도, 해결방법도 알려지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막을 방법이 없는 자연재해라는 설이 나오기도 했다.

여하튼 중요한 것은 게이트의 발생 위치가 북부에 치우쳐져 있다는 것이다.

북방, 그리고 인적이 드문 곳일수록 게이트가 열리는 빈도가 잦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 이유는 밝혀져 있지 않다.

미리 예방할 방법이 없다면 대응이라도 신속하게 하는 수밖에.

지금 그의 임무는 몬스터 웨이브의 원인을 밝혀내는 것이 아니라, 눈앞에 펼쳐진 몬스터 떼를 토벌하는 것이었다.

글렌의 시선이 차분하게 정면을 향했다. 징그러울 만큼 빽빽하게 도열한 괴물들이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다.

―크르르륵…….

―키이익! 키익!

몬스터들의 울음소리가 산기슭 아래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듣기만 해도 오금이 저릴 만큼 소름끼치는 소리였다.

적들을 둘러보던 글렌이 입을 열었다.

“주변 마을 주민들은 안전한가?”

“대부분 대피했습니다. 하지만 가장 먼저 공격받은 두 마을은…….”

끝까지 말을 잇지 못하고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쯧.”

소규모 마을이 저만한 규모의 몬스터 웨이브를 막을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짧게 혀를 찬 글렌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우선 정면에는 방패-라기보다는 나무판자를 든 것에 가까웠지만-를 든 중형 몬스터들이 일렬로 도열해 있었다.

‘아무리 잘 훈련받은 기병이라도, 방진을 이루고 있는 방패병에게 돌격하는 모험을 할 필요는 없겠지.’

무엇보다 오늘은 중장기병의 위력을 시험해 보는 첫 무대였으니 말이다. 좀 더 쉬운 사냥감부터 시작하는 것이 옳으리라.

마침내 결정을 내린 그가 입을 열었다.

“궁기병 부대는 정면을 우회하여 측면을 친다.”

“중형급 이상의 몬스터들은 피부가 두껍습니다. 화살로 큰 피해를 입히긴 힘들 겁니다.”

“알고 있다. 하지만 전열을 흐트러지게 하는 효과는 있겠지. 일정 거리를 유지하면서 계속 공격하도록. 적진의 방진이 느슨해지는 순간 중장기병을 돌격시킨다.”

글렌의 명령으로 궁기병 부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토벌대측에서 먼저 돌격하자 반대편에서도 움직임이 생겨났다. 방패를 앞세운 채 천천히 전진해온 것이다.

쿵! 쿵! 쿵!

수백 마리의 몬스터들이 일제히 움직이자 땅이 진동했다.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이 제 발로 달려오고 있다는 생각에 사기가 더욱 고조된 모양이다.

-캬륵?

하지만 그대로 충돌하리라는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인간의 군대는 우측으로 우회해 버렸다.

도리어 넓게 거리를 벌린 상태에서 무기를 꺼내 들기까지 했다.

피잉!

퍽!

멀리서 날아온 화살이 몬스터 부대의 머리 위로 날아든다.

일부는 방패에, 일부는 흙바닥 위에, 그리고 나머지 일부는 몬스터들의 피부 위로 박혀들었다.

-키이이익!

비록 치명상을 입진 않았지만 피부와 근육을 찢는 아픔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통증과 피 냄새가 그들을 더욱 흥분시켰다.

-카아아악!

-크륵!

흥분한 몬스터들이 전열이고 뭐고 무작정 적을 뒤쫓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지스카르가 말했다.

“경기병들을 쫓아가는군요.”

“역시 예상대로군.”

만일 저쪽에 지성을 가진 지휘관이 있다면 이것이 유인책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몬스터 토벌에 참여해 본 글렌은 저들의 지능이 인간보다 현저하게 떨어진다는 걸 알고 있었다.

몬스터들을 정신 지배하는 고위 악마가 없는 이상 저들은 덩치만 큰 오합지졸에 불과하다.

아니나 다를까 피 냄새에 흥분한 몬스터들은 거리를 벌리며 공격하는 궁기병 부대를 막무가내로 따라잡고 있었다.

일부 몬스터들은 군마에 필적하는 속도로 달리기도 했지만, 등자를 장착하여 더욱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게 된 경비병들은 그들이 쉽게 따라붙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몬스터 종류별로 각자 달리는 속도가 다르다 보니 전열은 진작 흐트러진 지 오래였다.

글렌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지금이다.”

백여 기의 중무장 기병들이 마침내 전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심지어 군마까지 철갑으로 뒤덮은 기병 부대의 모습은 아군의 오금마저 저리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돌격!”

이윽고 명령이 떨어지자 중장기병들이 서서히 속도를 올리며 앞으로 내달렸다.

나무판자나 허수아비 인형이 아닌, 실제로 살아 있는 대상을 향한 첫 돌격이었다.

두두두두두!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울리기 시작한다. 충돌에 이르기까지는 순식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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