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8화
“……아직도 안 나오시나?”
“예, 여전히 대답이 없으십니다.”
“식사는 하셨고?”
“아뇨. 오늘 낮부터 지금까지 계속…….”
하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대답했다. 그리 말하는 얼굴에는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표정이 어둡기는 집사장 고든 역시 마찬가지였다. 주인이 갑작스레 침실에 처박혀 나오질 않으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일단 나와 봐라. 내가 말해 보지.”
“예.”
몇 걸음 가까이 다가간 그가 똑똑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후작님, 저 고든입니다.”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곧장 다음 말을 이어나갔다.
“몸이 안 좋으신 것인지요? 간단히 미음을 준비했으니 허기라도 때우시는 것이…….”
―잠시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물러가라.
멀리서 듣기에도 착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저건 낮에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게 어떤 일인지 당최 알 수가 없으니…….’
이리저리 수소문해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아무런 일도 없었다고 입을 모아 말할 뿐이었다.
고든의 권유마저 퇴짜 맞자, 한결 더 불안한 표정을 지은 하인이 물었다.
“마님을 불러 올까요? 그분이라면 해결하실 수 있을 것 같은데…….”
“쯧, 조금만 더 기다려 보고 그때도 영주님이 방을 나서지 않으시면 그때 마님을 찾아뵙자꾸나.”
바쁜 나디아를 귀찮게 하고 싶진 않았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두 사람은 그러잖아도 불편한 주인의 심기를 거스를세라 조심조심 자리를 떠났다.
한편, 같은 시각.
불도 켜지지 않은 영주의 서재 안.
어둠 속에 잠긴 글렌은 물도 입에 대지 않은 채 의자에 앉아 있었다.
실연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다섯 가지 단계가 존재한다.
첫 번째, 부정.
‘아니, 그게 본심이었을 리 없다. 혹시 또 몰라? 나를 애태워서 넘어오게 하려는 계획일지도. 모략을 세우는 건 나디아의 특기이니.’
‘역시 영리해. 말 몇 마디로 상황을 바꾸다니 과연 타고난 전략가군.’
두 번째, 분노.
‘하, 아무리 내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라지만 어떻게 그런 거짓말을 할 수 있지? 나를 얼마나 우습게 만들려는 생각이었으면…….’
‘내가 받을 상처는 생각하지 않은 건가?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은 나도 필요 없다! 좋아. 네 뜻대로 따라 주지. 서로 목적을 이룬 뒤에는 칼같이 갈라서면 될 일이야.’
세 번째, 타협.
이 단계 직전에 그는 나디아가 자신과 이혼한 후 휴양지에서 다른 남자를 만나는 상상을 했다.
그러잖아도 뒤집어진 속이 또 한 번 뒤집어지는 것 같다. 위액이 역류하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이혼은 안 될 말이지. 사람이 너무 절박하면 그럴 수도 있어. 남녀 사이에는 적당히 애태우는 것도 필요한 법.’
‘다시 다가오면 모른 척 넘어가 주도록 하자.’
네 번째, 우울.
‘……그래, 사실 낮에 했던 말은 전부 진심이겠지…….’
그저 아버지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결혼을 택했다는 그녀의 말.
애당초 말 한 번 나눠 보지 않은 상대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헌신한다는 것부터 이해가 안 되긴 했다.
그에 비하면 오늘 들은 나디아의 해명 쪽이 훨씬 설득력이 있는 편이었다.
다섯 번째, 수용.
‘……그러니까 짝사랑을 하는 건 그쪽이 아니라 나라는 거군.’
‘그녀에게 나라는 인간은 그저 좋은 거래 상대일 뿐이고…….’
‘…….’
글렌이 말없이 손바닥 위로 이마를 묻었다.
머릿속으로 수십 가지 가능성이 떠오른다.
만약에.
만일 그때, 나디아가 아직 자신을 사랑한다고 주장하고 있을 때 그녀의 마음을 받아 줬다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관계를 시작할 수 있었을까?
만일 처음부터 나디아를 아내로 인정했다면, 아니, 조금만 더 빨리 제 본심을 자각할 수 있었더라면…….
지금이라도 구질구질하게 매달려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는 본능적으로 알아챌 수 있었다.
그렇게 행동하는 순간 일말의 가능성조차 완전히 사라지리라는 것을.
정신이 재가 되어 파스스 흩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가 암담한 얼굴로 하염없이 땅굴을 파 들어가고 있을 때였다.
쾅쾅쾅! 쾅쾅!
침묵이 맴도는 서재 안에 문이 문을 부셔져라 두드리는 소음이 울린다. 글렌의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몇 번이고 말했건만. 그가 혀를 쯧 차곤 물었다.
“무슨 일이냐?”
“영주님, 급보입니다!”
그리 말하는 목소리는 굉장히 다급했다.
“기다려라. 곧 나가겠다.”
혼자 있고 싶다고 집사까지 물렸음에도 제 휴식을 방해할 만한 용건이라…….
실연의 슬픔에 잠긴 상태였지만 넋이 완전히 나간 것은 아니었다. 본능적으로 위기를 느낀 글렌이 곧장 몸을 일으켰다.
서둘러 문가로 다가가는 그의 귀에 재앙을 알리는 목소리가 꽂힌다.
“몬스터 웨이브입니다, 영주님! 부, 북쪽에서 몬스터들이 밀려 내려오고 있습니다!”
* * *
“슬슬 터질 때가 되었지.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니 다들 허둥지둥할 필요는 없소이다.”
“지스카르 경의 말씀이 맞습니다. 침착하게 대응하면 될 일입니다.”
때 아닌 시각에 갑작스레 소집된 회의.
몇 년 만에 터진 몬스터 웨이브 탓에 원탁 주변에는 긴장된 기색이 역력했다.
지스카르를 비롯하여 여러 번 몬스터 웨이브를 겪어 본 노기사들이 다독였지만 불안한 분위기가 가시진 않았다.
덜컹.
그때,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영주인 글렌이 회의실 안으로 들어온다.
가신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이하였다.
“오셨습니까?”
“오는 길에 소식은 대강 전해 들었다. 예레스 산맥 인근에서 몬스터 게이트가 열렸다고.”
“예, 북방 한계선 위의 몬스터들인 듯합니다.”
“희생자는 있나?”
기사 아드리안이 침중한 얼굴로 보고서 한 장을 건네주었다.
“소수의 희생이 있긴 했습니다만 인구가 밀집된 지역은 아니라 피해가 그리 크진 않은 모양입니다.”
“하지만 몬스터 떼가 마을이 밀집된 지역까지 밀려오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을 테지.”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대응이 늦어서는 안 됩니다.”
“더 의논할 게 있나? 곧장 출정 준비를 시작해라. 준비가 끝나는 대로 즉시 출발한다.”
당연한 결론이었다. 그가 가신들에게 각자의 역할을 지정해 주려는 찰나-
“글렌.”
“……!”
매우 익숙한 목소리가 귀에 꽂히듯 들려왔다. 사내들만 득시글한 이 장소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여린 목소리.
그리고 그 목소리의 주인은 지금 이 순간 글렌이 마주하기 가장 껄끄러운 상대였다.
그가 어깨를 흠칫 떨며 시선을 돌렸다.
“……여기 있는지는 몰랐군.”
“아까부터 있었어요. 저도 이 자리에 낄 수 있는 자격이 있는걸요.”
엄밀히 말하자면 안주인의 역할은 집안을 잘 돌보는 데에 그쳤지만 그 누구도 나디아에게 자격이 없다고 말할 수 없었다.
“이번 기회에 새로 편성한 부대를 시험해 보는 게 어때요?”
“새로 편성한 부대라 함은, 궁기병과 중장기병 부대를 말하는 건가?”
궁기병은 원래 양성이 굉장히 까다로웠다.
기마에 능숙해지고, 상체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숙련되려면 상당한 훈련 기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들의 발밑을 받쳐 주는 도구가 있다면 말 위에서 균형을 잡는 게 한결 쉬워진다.
그건 궁기병을 대규모로 빠르게 양성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글렌은 일찍이 중장기병과 더불어 궁기병의 양성에도 힘쓸 것을 지시해 두었다.
아무래도 그간 투자했던 것의 위력을 시험할 차례가 온 모양이다.
“네, 허구한 날 허수아비 상대로 훈련하는 건 한계가 있잖아요.”
“그렇긴 하지.”
“실제 전시에 사용하기 전에 실전 훈련을 거치는 게 나을 거라고 생각해요.”
“거기다 예레스 산맥 인근은 보는 눈도 없으니 비밀을 유지하는 데에도 유리할 테고.”
“그렇죠. 역시 하나를 말하면 둘을 알아채시는군요.”
나디아가 생글생글 웃으며 그리 대답한다. 밝게 미소 짓는 얼굴에는 그늘 한 점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 밝은 표정이 심장에 화살을 꽂는 듯했다. 글렌은 다시 한번 절절하게 느껴야 했다.
‘이 여자는 정말 나한테 관심이 없구나!’
낮에 그녀가 했던 말 중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다는 사실을.
명치 부근에서 무언가 울컥 치솟는 것 같았지만 지금은 사적인 감정에 휘둘릴 때가 아니었다. 일단 몬스터 떼부터 해결해야 한다.
그의 시선이 다시 책상 위의 지도로 향했다.